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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81화 (181/220)

181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12)

정무 회의는 두 달에 한 번, 황제와 행정부 각료들, 원로원의 모든 의원이 모여 정무를 논하는 자리였다. 나 또한 제국군의 간부로서 이따금 참석했다.

개중에 10월 정무 회의는 특별했다. 추수철이 다가오는 만큼 세율에 관한 논의가 오가기에 지방의 대영주들도 대부분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중립파를 자처하며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공작가들까지 참석하는 행사.

아수라마수라 귀족 사회의 모든 이목이 모인 이곳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할 무대였다.

나는 행정부 구역의 맨 앞에 앉아 흥미로운 낯으로 회의장 곳곳을 살펴보았다.

10월 회의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각 가문의 가주들이 저마다 후계자를 대동하여 자리해 있었다.

레오폴트도 아우렌바흐 공작과 함께 참석했고, 힐베르크 후작의 옆엔 아멜리가 긴장한 낯으로 앉아 있었다.

‘윌로우 놈도 도미닉 놈도 꼴에 후계자라고 와 있고….’

그러던 차에, 내 시선이 도미닉과 부딪혔다.

안 그래도 안색이 안 좋던 놈은 대번에 거무죽죽한 낯이 되어 눈동자를 떨 뿐이었다.

‘그날 금언 마법에 걸린 게 무서웠던가 보지? 역시 담이 작은 놈이야.’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렌틸 자작과 스칼렛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두 사람이 간단히 눈인사했다.

그리고 얼마 뒤, 예정된 회의 시간에 다다랐을 때.

“지고하신 대륙의 태양을 뵙습니다.”

재상인 로젠하르트 백작의 선창에, 회의장의 모든 인원이 인사말을 따라 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달하신 제국의 큰 별을 뵙습니다.”

인사를 받으며 입장하는 황제의 뒤를 황태자가 따랐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아버지와 큰언니가 들어서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이 날인 만큼, 그레이스와의 눈 맞춤 한 번.

제대로 준비했답니다, 그런 의미를 담아 나는 최대한 야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무 회의의 초반인 본회의에서는 그 이름에 걸맞게 몇 가지 당면한 정무에 관해 논했다.

곧 다가올 추수철에는 세율을 어떻게 할 것인지, 월동을 준비하는 북부에는 어떤 지원을 할지, 과잉 농산물을 얼마에 사들여서 어떻게 보관하고 내년 보릿고개를 어떻게 대비할지 등등….

그러는 내내 원로원 의원들에게서는 집중하지 못하는 티가 여실했다.

그들 모두, 얼마 전 원로원 의회에서 렌틸 자작이 어떤 폭탄을 던졌는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눈동자 구르는 소리가 듣기 좋네.’

귀족파들이 모여 앉은 구역에서부터 렌틸 자작과 힐베르크 후작의 자리까지. 의원들의 시선이 바쁘게도 움직였다.

‘그동안 독수리의 서고 문턱이 아주 닳을 정도였댔지.’

원로원 의원들은 열심히도 렌틸 자작이 공개한 귀족파의 업보 목록을 열람했다고 했다. 그 동향을 살핀 기사들 말로는 이따금 줄을 서기까지 했다고.

그래서일까, 회의장 전역에 오늘 게이블스를 비롯한 귀족파의 주류가 얼마나 망신을 당할지 기대하는 기류가 선명했다.

마침내 본회의가 끝나고 기타 안건에 관한 논의 시간이 되었을 때.

원로원 의장이 그간 원로원 의회에서 상정된 안건들 중 중요한 사안들을 추려 소개했다.

그리고 그중 첫 번째는, 게이블스 후작의 자질 문제.

원로원 의장이 그 발의자로 소개한 나의 스승은 아버지의 앞에서 그 내용을 간략히 읊었다.

마기에 오염시킨 베라초를 유통하려 하고 세르니타의 사냥 대회에 세뇌한 마수를 푸는 등, 귀족파의 반사회적인 범죄에 게이블스가 가담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불쾌한 낯으로 인상 평가를 내렸다.

“귀족파의 우두머리라는 가문이 하는 일이 참 가관이군. 그대의 아들의 과오로 징계받은 것을 두고서 마치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양 대리석 공급이며 포도 유통에 분탕 치는 것도 다 눈감아 줬는데 말이지.”

아버지의 일갈에 게이블스 후작의 낯이 흙빛이 되었다.

“자네들의 영애들이 매해 자선 파티를 벌여 억만금을 내놓으면 뭘 하나? 아비들이 다 깎아 먹는 것을.”

쯧쯧, 이어지는 말에 귀족파 주류의 낯 또한 어두워졌다.

황제의 지원 사격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렌틸 자작은 거침없이 공세를 이어갔다.

“거기에 오늘, 서면 자료로 제출하지 않았던 그들의 여죄를 고발하고자 합니다.”

뭐가 또 있다고? 장내가 크게 술렁였다.

그 서류철에 기록된 건 대부분 사기나 부정 청탁 같은 건이었다. 물론 그 나름대로도 피해가 컸지만,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훨씬 더 파급력이 클 거였다.

내 스승이 그린 그림이 머릿속으로 상상하기에도 아름다워, 나는 흥미진진한 낯으로 이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우선 9년 전. 환속한 성녀인 힐베르크 선선대 후작 부인이 사망한 마차 사고가 귀족파의 사주로 인해 일어난 정황이 있습니다.”

렌틸 자작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장내가 충격에 빠졌다. 사전에 아무런 언질도 듣지 못했던 아버지의 낯도 얼어붙었다.

킬리온을 협박한 알비누스 후작과 거기에 가담한 게이블스 후작의 낯이 허옇게 질렸다.

“살인 교사. 당연히 중범죄입니다. 그 피해자가 성녀이니 교단 차원에서도 크게 치죄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학자로서 이 사건이 인류를 위협하는 범죄라고 선언합니다.”

렌틸 자작이 증인석을 향해 눈짓하자, 외알 안경을 낀 갈색 더벅머리의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증언대로 나왔다.

스스로를 학자의 탑 간부 필리프라고 소개한 그는 긴장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탑에서는 21년 전의 격랑에 관해 한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입증되지 않은 가설은 외부에 발표해서는 안 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인상은 심약해 보였지만, 연구 이야기에 접어들자 그 말소리가 유려해졌다.

“21년 전의 격랑은 기존의 격랑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린 시간도 길었고 그 균열의 간격도 훨씬 넓었다고 하지요.”

그때의 광경을 돌이키는지 그레이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곳곳에 자리한, 당시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출정했던 이들에게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탑은 그것을 성녀께서 신성력을 봉인하고 환속하셨기 때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성녀의 신성력이 성녀와 멀어지면서 그 위력을 잃었기 때문으로요. 실제로 황태자 전하께서 출정하시며 봉인구를 가져가신 덕에 격랑을 간신히 막기는 했습니다만, 매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가 짙어지고 있지요.”

맞아, 그랬지, 그의 말에 성기사단 출신의 참석자들에게서 긍정의 추임새가 배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가속화된 것이 정확히 9년 전. 성녀께서 돌아가신 해입니다.”

장내에 자리한 성기사들이 서로의 낯을 확인하였다. 손을 꼽으며 시기를 헤아리는 레오폴트의 낯에는 경악이 번졌다.

“성기사단장 로젤리아 에슈바이크 알 아마리우스 경. 그게 사실인가?”

아버지가 심각한 낯으로 로젤리아를 호명하였다. 여전히 칼같이 잘린 단발을 고수하고 있는 내 둘째 언니의 낯은 어느새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예. 정확히 9년 전인 483년 가을, 파견 간 성기사단원만으로 마기를 잠재울 수 없어서 황성에 잔류했던 1개 소대가 추가로 파견되었습니다. 그 추세가 매년 이어져, 매번 파견 인원을 늘리고 있습니다.”

장내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로젤리아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묵례한 필리프가 진술을 이었다.

“가설이 입증되려면 최소 세 건의 표본이 필요하니 다다음 대의 성녀가 계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당장 대륙의 균형이 깨질 수 있는 상황인지라, 학자의 탑에서는 이례적으로 이 가설을 공개하는 바입니다.”

“고작 마기가 짙어진 것 갖고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오?”

숫제 발악인지, 귀족파의 주류 중 하나인 프렘린 백작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대번에 필리프가 일축했다.

“각하께서 말씀하셨듯 성녀의 부재가 고작 마기가 짙어진 정도에 그친 것은, 성녀의 신성력을 나눠 가진 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

성녀의 신성력을 나눠 갖는다는 표현이 사뭇 어색했다. 모두의 시선이 힐베르크 후작을 스쳤으나 그 역시 아는 바가 없어 보였다.

“본디 성녀의 인적 사항은 교단의 기밀이지만, 성녀의 존속이 대륙의 안전과 직결되는바 교단에서 이례적으로 이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교단의 기밀이라는 말에, 성녀의 신성력을 나눠 받은 이를 찾길 포기한 장내의 이목이 앞쪽을 향했다.

“대륙의 균형에 관한 귀족파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견된 반응에 미소 지으며 렌틸 자작이 발언을 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피해에 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수정이지요. 그런데 올해 귀족파에서 수정을 독과점하는 정황이 있습니다.”

수정에 투자한 것이 비단 귀족파 주류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에 가담한 이들 모두가 눈동자를 떨었다.

“연초에 카그람당 은화 50개이던 수정 가격은 지난주, 카그람당 금화 23개에 다다랐습니다.”

정확히 56배. 수정 투자에 관심이 없던 이들은 그 가파른 상승세에 깜짝 놀라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그들은 수정 원석 현물과 광산을 가리지 않고 사들였습니다. 게이블스의 가주 또한 이에 부화뇌동했다는 증거로 글렌치아로부터 광산 세 개를 매입한 문서를 제출합니다.”

렌틸 자작이 얼마 전 내가 글렌치아 공작에게서 구해다 준 서류를 제출했다.

“글렌치아 공작. 이 서류가 글렌치아 상단의 것이 맞나?”

“예. 글렌치아의 명예를 걸고 보증합니다.”

아버지의 질문에 글렌치아 공작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글렌치아까지 나섰어?

이거, 게이블스는 꼼짝없겠는데?

“수정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걸 보고 얼마나 배가 아프던지요? 상인들에게 사기와 상술이 한 끗 차이라지만 글렌치아 자존심이 다 상했어요.”

나의 새언니 글렌치아 공작은 그렇게 너스레 떨었지만, 수정 유통을 꽉 쥔 그녀야말로 본대륙에 수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수정을 독식하려는 귀족파의 비행은 비단 올해만의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독과점과 투기에 그치지도 않았고요. 한 영지를 인위적으로 파산하게 만드는 데도 이르러 있었죠.”

거기까지 말한 렌틸 자작이 원로원 의원들 쪽 좌석 한 곳을 눈짓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건 힐베르크 후작의 후계자, 레이디 아멜리였다.

‘크으, 내 여주. 이젠 어엿한 소후작이고.’

나는 증언대를 향해 걸어가는 아멜리를 바라보며 수런거리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루시페우스의 전생에서와 달리 별 고난 없이 행복을 쟁취한 아멜리는, 이제 더 근사한 미래를 위해 어렵고 낯선 일에도 거침없이 나섰다.

레오폴트의 낯 또한 감격과 걱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힐베르크령 얘긴가?

힐베르크령 일이라면 아까 얘기했을 텐데…?

저 영애의 원래 출신이 어디였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아멜리가 증언을 시작했다.

“근 50년 전, 귀족파의 여러 가문이 선대 남작에게서 거액을 빌린 뒤 갚지 않아 로즈버리의 경제 사정은 나날이 어려워졌습니다. 최근 빚을 추심하여 로즈버리의 사정이 나아지려는 기미가 보이자, 지난 8월에는 급기야 허가 없이 폐광을 폭파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내부에 수정 광맥이 있다면서요.”

수정 광산을 개발하겠답시고 한 영지를 말려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

아멜리의 증언이 시사하는 바에 장내가 다시금 술렁였다.

“그거, 다 망상 아니오?”

“로, 로즈, 뭐? 그런 들어본 적도 없는 영지가 뭐가 중해서!”

예상한 대로 귀족파 주류에서 잡아떼며 큰소리쳤다.

물론 귀족파에서 로즈버리의 폐광을 처음 노렸을 때는 지금과 그 의도가 퍽 달랐을 거였다.

‘그땐 돌아올 수 없는 바다랑 연관된 음모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귀족파가 오래전부터 수정을 돈놀이 감으로 봐왔다는 거였다. 수정은 본대륙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원인데 말이다.

‘게다가 로즈버리를 그렇게 은밀하게 노렸는데, 우리가 알아차릴 줄은 몰랐겠지.’

그 반응이 너무 투명함에 내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그에 대해 증인을 신청합니다.”

렌틸 자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장의 출입문 앞에 한 남자의 신형이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람들이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이윽고 그가 긴 다리를 내뻗어 회의장 중심부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을 때.

그 남자, 루시페우스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짐에, 그를 아는 모든 이의 낯이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특히 경악에 창백해진 알비누스 후작 부자의 낯이 볼만했다.

“오!”

와중에 윌로우 놈이 제 아버지에게 함빡 미소 지었다.

“다 끝났습니다, 아버지. 저 영식은 제 편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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