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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80화 (180/220)

180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11)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나는 이미 들은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체질을 일종의 천형(天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래서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굴레.

남자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느낀 게…. 예. 당혹스러움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군요.”

“…미안.”

“전하께서 무엇을 하시건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경이 괜찮다고 해서 내가 무심하게 굴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

정말 괜찮은데요…. 남자의 입가에서 그의 미력한 대꾸가 웅웅대었다.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을 무렵.

갑작스레 루시페우스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 손놀림을 따라,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빛 가루가 머리 위에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수놓듯 명멸하는 빛의 파편들….

나는 그 광경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던 상황도 잊은 채, 그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것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런 황홀한 걸 만들어 놓고서 루시페우스는 내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에 이끌려 그를 쳐다봤을 때.

“제가, 제 운명에 절망한 것은 맞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광원(光源)으로 인해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일렁였다.

“달의 신에게서 이번의 삶을 받을 때, 어머니의 신성력을 물려받지 않거나 이 징그러운 힘을 얻지 않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거든요.”

“달의 신이?”

예, 그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한순간도 바란 적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종의 재능이며 능력이기야 합니다만, 아시다시피 제게는 번거로운 것이기만 했지요. 세상에 이런 존재는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이 눈과 마찬가지로….”

“경….”

“하지만.”

루시페우스의 손이 다시금 몇 번의 움직임을 이뤘다.

빛 가루 사이사이로 오색찬란한 운무가 껴, 마치 오로라처럼 보였다.

그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시선을 뺏겼으면서도, 남자의 의도를 가늠하느라 조마조마해졌을 때.

“하지만 이렇게, 전하께 쓰이지 않습니까.”

“쓰이다니….”

“전하께서 위험하실 때 구하고, 전하께서 편찮으실 때 나으시게 돕고, 전하께 대적하는 이들을 처단하고, 또 이렇게….”

그가 한 걸음 성큼 다가와, 내 어깨에서 흘러내린 제 재킷을 고쳐 덮었다. 살짝 파인 네크라인을 따라 밤의 한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내 머리칼을 그러모아 빗어 내렸다.

그가 만들어낸 낭만적인 불빛 아래서 내 머리칼과 그의 손이 몇 번이고 얽혔다.

“전하께서 즐거워하시는 걸 볼 수 있으니, 저는 다 괜찮습니다.”

그에게서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지만, 유독 오늘의 ‘괜찮다’라는 말이 낯설게만 울렸다.

‘…그게 어떻게 괜찮아.’

맨눈을 보일 때마다 멸시당하고 그 누구와도 잠깐이라도 닿지 못하는 것이 어찌 괜찮겠는가.

그것도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늘 그러했다면 더더욱….

12년 전, 저잣거리에서 마주친 어린 루시페우스의 눈을 보고서 메리제인과 란셀이 기겁했을 때. 아이의 붉은 눈동자가 체념으로 어둑해지던 그 광경을 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그런 게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내가 저를 방관한 게 다 괜찮았다는 것도, 그저 그가 참는 게 익숙한 사람이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그는 애초에 무언가를 부당하다 여기는 삶을 모르는 게 아닐까.

모든 게 괜찮다고 생각하며 견디지 않고서는 그 삶을 버티기 힘들었던 것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다시금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이건 가을밤의 싸늘한 대기 때문이 아니라….

“…왜 전하께서 슬퍼하십니까.”

늘 그렇듯 조금 찌릿하고 따뜻한 그 손이 내 양 뺨을 감싸더니, 눈의 앞머리를 꾸욱 찍어냈다.

기다렸다는 듯 눈시울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의 따뜻한 손끝이 내 눈시울을 몇 번이고 닦아내고, 또 닦아내고…. 번진 눈물이 마르며 콧대가 홧홧해졌다.

“외로웠지…?”

“그런 건, 저는 잘 모릅니다….”

그렇게 대꾸하는 루시페우스의 단단한 낯이 미약하게 흐트러졌다. 그의 눈가는 건조했지만 나는 그가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뭐라고, 또 그의 일을 갖고 눈물지어서….

그는 입꼬리를 미세하게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하께선 저와 같은 운명을 진 이들이 또 있으니, 제가 외롭지 않길 바라시는 거지요.”

…그건 맞지만.

맞지만, 그가 이토록 감격한 낯으로 말할 거리는 아니었다.

그건 그저, 아주 손 놓지 않았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거였으니까.

“내가 한 건 고작, 대중에게 와닿으려면 몇십 년은 걸릴 연구 결과를 내놓으라고 학자들을 들볶은 것뿐이었어.”

“고작이라니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이잖아….”

“편하다고 해서 그 의미가 퇴색됩니까.”

“그냥 다, 자기만족이었을 거고.”

“그 또한 저로 인해 느끼신 뿌듯함일 거라 저는 좋기만 합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고단하셨다면 제가 더 슬펐을 텐데요.”

미소를 그리는 그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미안…. 경을 위로하는 건 나여야 하는데, 왜 내가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어.”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의 낯을 바라보는 내 턱도 흐늘거리기 시작했다. 꾹 참지 않으면 엉엉댈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아니, 그러려던 순간. 언제나처럼 남자의 손끝이 내 입술을 꾹 눌렀다.

“저를 위하시는 거여도, 이런 식으로 다치시는 건 싫고요.”

“…흑.”

벌어진 입매에서 울음이 떨려 나왔다.

그의 낯에 걸린 다정함, 그리고 내게 동조하여 깃들기 시작한 슬픔 같은 것들을 바라볼 수가 없어 나는 도망치듯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루시페우스가 난처하다는 듯 짧게 웃으며, 내 어깨를 마주 안았다.

위로받는 건 또 나였다. 시작은, 분명 내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는데.

내가 무얼 했건 하지 않았건, 모든 게 제게는 기쁨이라고 말하는 남자의 넓은 마음에 나는 번번이 면죄부를 얻고 말아서….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제 품에서 웅웅거리는 내 목소리를 잘 들으려는 듯, 그가 나를 안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품이 내 어깨를 깊이 감쌌다.

“경은 이제 외롭지 않아. 경에겐 내가 있고.”

“그것만으로 전 충분합니다.”

남자의 짧은 웃음이 내 머리칼을 간질였다.

“또 나를 위해, 경을 사랑할 준비가 된 내 사람들이 많고.”

“…레베카 전하께서 제게 황송한 약속까지 해주시는 걸 보니….”

거기에 우리의 관계를 궁금해하는 그레이스와 테오도르, 내가 만나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로젤리아.

그리고 그를 신뢰한다고 말하는 내 수하들까지….

이 생에 내가 가진 게 많아서 다행이었다.

내가 세실리아여서, 다행이었다.

“절대로, 경이 나를 용서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할게.”

“용서라니요….”

“경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질 거야.”

그 모든 건 다짐이었다.

“전하. 알렉스 경의 보고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파우더룸. 헨리에테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날이 날인지라 기사들을 면담할 시간이 없으니, 급한 내용을 서면으로 전달한 듯했다.

“상단 거리 쪽 일입니다.”

헨리에테가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내 시녀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다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노출하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한 장으로 꾸려진 보고서에는 보통 크기의 글씨로 몇 가지 내용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아직도 옛 프렘린 집사장의 행방을 못 찾았다라….”

알렉스의 3소대는 요즘 귀족파에서 매입한 수정을 어떻게 빼돌렸는지 추적하느라 바빴다.

한편으로는 알비누스 후작 부자가 직접 운영하기 시작한 상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는 중이기도 했다.

근방에 있는 마차 보관소에서 말들이 또 날뛴 걸 생각하면 마기에 잠식된 무언가가 있는 모양인데, 루시페우스가 그 상단과 연관된 음모가 더 이상 없다고 한 것이었다.

‘실제로 ‘공제눈’에서도 알비누스 상단이 연관된 음모는 베라초 유통 건밖에 없었어.’

‘공제눈’이 아무리 얼렁뚱땅이어도 루시페우스와 연관된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기록돼 있었으니까.

하지만 루시페우스가 귀족파의 일을 그만둔 시점부터 현실은 ‘공제눈’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귀족파에서 수정을 사들이는 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루시페우스가 하려던 일과 무관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자. 생각하자, 세실.’

나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끼워 맞춰보았다.

“앗, 전하. 미간 찌푸리지 마세요.”

“…미안.”

내 화장을 돕던 아네트의 타박에 나는 표정을 풀며 헨리에테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헨리에테가 눈치 좋게 종이가 걸린 서류판과 만년필을 내밀었다.

나는 시녀들이 화장해주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고개를 고정한 채,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알비누스 소후작과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마검사가 있는지 확인할 것.

알비누스 상단 건물에 비밀 공간이나 다른 상단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있는지, 없다면 최근 알비누스 상단 건물에서 큰 공사를 한 적은 없는지 확인할 것.」

내가 서류판을 돌려주자, 헨리에테는 거기 적힌 걸 슬쩍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역시 알비누스가 문제인가 보죠?”

대화가 길어지려는 기색에, 내 치장을 총괄하던 패티샤가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내게 달라붙어 있던 시녀들이 손을 멈추고 자리를 비켰다.

“소후작이 나랑 만난 이후로 제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얼마 전부터 상단 건물에 자주 나타났대.”

“…아하.”

나와 만난 이후,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그에게 금언 마법을 건 날을 의미함이었다.

“그런데 마검사는 그분께서 회유하셨으니, 이제 알비누스를 안 돕는 거 아닌가요?”

“그게 최근의 일이니까. 구금돼 있던 이들이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몰랐을 거잖아.”

“마검사들이 수정으로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헨리에테의 날카로운 짐작에 나는 싱긋 웃었다. 기사들이 보고하러 올 때 늘 헨리에테가 배석해 있으니, 헨리에테는 암조 안에서 도는 정보를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이 본대륙에 온 목적이 마력을 탐구하기 위해서라니까. 마력과 관련된 음모에 개입했다고 볼 법도 하지.”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할게요.”

“응. 서두르라고 해줘. 오늘 정무 회의가 끝나면 놈들이 꼬리를 자른다고 전부 은폐할 수도 있어.”

“네.”

헨리에테가 서류철에서 내가 쓴 쪽지를 빼서 맵시 있게 접었다.

“참, 리나 경 쪽은 아직 연락 없고? 아무리 늦어도 어제는 도착했을 텐데.”

“…네, 아직요. 뭐, 여독을 풀고 이것저것 조사하느라 바쁜 것 아닐까요?”

“그런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리나가 1소대의 막내 린지와 함께 빨간 눈의 마을로 향한 게 지난주의 일. 도착할 때가 됐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서 걱정이던 차였다.

‘본인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도 연락은 오게 되어 있는데…. 후작의 혈통 문제야 오늘은 화두만 던질 거라, 일이야 늦어도 상관없지만 걱정이네.’

뭐, 오늘 안에는 연락이 오겠지. 나는 가볍게 생각을 정리하고서 손을 내저어 헨레에테를 물렸다.

곧바로 시녀들이 돌아와 내 치장을 재개했다. 화려하게 화장한 얼굴이 거울 속에서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은 우선 수정 독과점 혐의로만 몰아세울 거지만, 수정으로 이상한 짓을 한 것까지 밝혀지면 후속 재판 때 아주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겠지.’

뿐만이랴. 나는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았다.

‘우선, 레베카가 참석하기로 했고.’

귀족파에서 벌인 일들에 관해 증언해줄 내 지인들.

숙원을 이루기 위해 오래간 준비해온 내 스승과 친우.

그리고, 윌로우 놈을 자극하기 위한 몇 가지 장치까지.

‘완벽해.’

낮의 정무 회의부터, 저녁의 만찬연까지. 종일 피날레일 거였다.

“전하, 표정이 좀 사악해 보이세요.”

“괜찮아, 이젠.”

나도 이젠, 무해하고 어리숙한 황실의 막둥이인 척은 다 그만둘 때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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