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79화 (179/220)

179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10)

“교단의 비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더는 잴 것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가 자신의 존재에 절망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빨간 눈의 마을.”

나를 향한 두 사람의 눈초리가 대번에 얼어붙었다. 레베카의 시선에 깃든 건 충격, 루시페우스의 것에 깃든 건 의구심이었다.

“교단에서는 알고 있죠?”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내 입매에 붙박였다. 내가 뱉은 단어 하나하나를 인식이야 하였으나, 그게 모여 구성하는 의미를 납득하기 어려울 테니까.

나는 그에게 보이듯 한 음절 한 음절 꼭꼭 씹어 말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방에 있는, 빨간 눈들이 모여 사는 마을 말이에요.”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한껏 떨렸다. 동공이 한껏 수축하여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먼저 입을 연 건 레베카였다. 늘 온화하던 레베카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은 지 한참이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나는 두 사람이 놀란 것을 인식하지 못한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탐사하던 제 기사가 지난봄에 발견했어요. 이 내용을 학자의 탑에 제보해서 연구 중이고요.”

“어쩐지, 그래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레베카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탑에서 움직였구나.’

학자의 탑 서고에는 건국 이래 제작된 모든 인쇄물이 소장돼 있다. 하지만 교단에서 비밀리에 관리하는 자료는 구할 수 없으니 교단에 자료 협조를 요청한 모양이었다.

‘탑에서도 교단이 빨간 눈의 마을에 대해 알고 있다고 추론한 거야.’

교단이 꼭꼭 감춰둔 비밀은 곧 수면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걸 비밀로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빨간 눈의 아이가 저와 같은 이가 또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입술 안쪽을 작게 깨물며 다음 말을 입에 올렸다.

“조만간 학자의 탑에서 발표할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에 영향을 받아 태어난 자들은 후천적으로 마력을 타고난다고 해요.”

루시페우스가 눈조차 한번 깜빡이지 못한 채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증명이 바로 빨간 눈이고요.”

“…학자의 탑에서도 큰 확신을 가졌나 보구나.”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요.”

말하다 보니 드는 감정은 원망이었다.

교단에서 그 마을의 존재를 알았다면 빨간 눈이 악마와 무관하다는 것도 알았을 텐데.

그걸 왜 굳이 내버려둬서.

어린 루시페우스가 제 눈을 보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접하게 만들고, 스스로의 존재를 폄하하게 만들어서….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악마의 후예라는 증명이 아니에요. 그렇죠?”

리나로부터 빨간 눈의 마을에 관해 보고받은 것이 벌써 다섯 달 전의 일. 그간 마음에 담아온 말을, 당사자 앞에서 내뱉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나를 바라보는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뜨거웠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를 잠시도 쳐다보지 못한 채 레베카의 낯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낯에 떠오른 게 내가 예상치 못한 감정일까 봐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그의 흐트러진 낯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내가 뭐라고.’

당사자는 내가 아닌데.

‘…아니지. 그가 빨간 눈인 걸 안 세월이 얼만데, 다른 빨간 눈이 존재하는 걸 알면서 지금까지 숨겼고….’

하지만 내가 저로 인해 죄책감을 갖는 건, 루시페우스가 원치 않으니까.

나는 그저 덤덤한 낯을 유지하기 위해 입술을 가늘게 깨물 뿐이었다.

레베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듯했다.

‘역시 교단에서는 여기까지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지금껏 비밀로 하고 있는 거였다.

그 실망감에, 이어지는 내 말은 일종의 비아냥처럼 울렸다.

“교단에도 빨간 눈이 한 분 계시잖아요.”

“뭐라?”

“신관 킬리온요.”

레베카의 눈동자에 다시금 충격이 깃들었다. 킬리온이 알비누스 후작의 이복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놀란 기색이었다.

빨간 눈이 악마와 무관하다고 믿는 것과 신관 중 하나가 빨간 눈임을 아는 건 별개의 일일 테니까.

떨칠 수 없는 편견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악마와 무관한 걸 알아도 굳이 공표하지 않았던 걸 수도….

“아로카트령 출신에다, 신성력이 그리도 많으면서 안경을 쓰는 걸 보세요.”

“그거야, 그분께서는 젊으실 때부터….”

“신성력으로 시력을 강화한 걸 유지하는 데는 큰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요.”

내 기사들만 해도 어둠 속에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에 신성력을 덧씌운 채 밤새 다니니 말이다.

하지만 레베카로서는 짐작조차 못 한 바일 거였다. 그 낯이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알비누스 후작은 킬리온 신관이 빨간 눈인 걸 알고 있어요. 그걸 빌미로 그를 협박해서, 성녀님의 살해를 사주했거든요.”

“뭐?”

레베카의 눈매가 다시금 굳었다. 거기에 깃든 게 일종의 분노일까, 이제껏 보인 것과는 사뭇 기세가 달랐다.

“언니께 마지막으로 부탁드리려는 게 이거예요. 후작의 혈통을 확인할 때까지, 신관 킬리온을 대신전 차원에서 보호해 주세요.”

“…그럴 필요가 있겠구나.”

그리 읊조리는 레베카는 이런저런 정치적인 상황을 가늠하는 듯했다.

레베카가 아무리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귀의한 지 오래라지만, 그래도 황실 직계로서의 감각은 그리 쉬이 사라질 게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가 진짜 미친 게 아니라 후작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척을 한 것 같기도 해요.”

“그렇다면 설득할 여지도 충분하겠고.”

“황성에 당장 와달라는 건 아니에요. 필요하다면 후작을 마주치지 않고서 증언할 수도 있게 할 거고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알아봐야겠구나. 성녀의 변고와 연관돼 있다면 교단 차원에서도 중요한 일이니.”

레베카의 말소리가 사뭇 진지하게 울렸다.

어떻게든 도와주겠다는 확답을 바랐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 정도로도 레베카가 알맞은 선택을 해주리라 확신했다.

나를 위해, 그리고 그레이스를 위해.

그리고… 오래간 숨겨두었던 진실이 마땅히 향해야 할 곳을 위해.

다시금 만찬장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종을 흔들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들이 들어와 디저트를 준비해 주었다.

각종 베리를 졸여 만든 콩포트가 뿌려진 꾸덕꾸덕한 치즈케이크였다.

달고도 진한 그 케이크를, 루시페우스는 조금도 건들지 못했다.

만찬을 마치고 레베카와 헤어진 깊은 밤.

나는 루시페우스와 프리지어궁 뒤편의 작은 뜰을 거닐었다.

내 방과 집무실의 발코니에서 보이는, 왕성 뒤편 숲으로 이어지는 공간이었다. 정원이라기보다 ‘뜰’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만큼 조경이랄 것도 없이 소담스럽게 관리돼 있었다.

황궁의 역사와 더불어 자란 키 큰 나무들 사이사이로 마법 가로등의 조명이 어스름하게 공간을 밝혔다.

만찬이 끝날 때까지 루시페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레베카와 헤어질 때 인사말만 겨우 입에 올렸을 뿐.

얘기 좀 하다 갈래? 예.

산책할까? 예.

저쪽 어때? 예.

대꾸는 사뭇 기계적이기까지 했다.

그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깃든 혼란을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서 나는 그저 그를 그렇게 놔둘 수밖에 없었다.

내가 먼저 손을 잡을 때면 늘 그렇듯 움찔하는 기색도 없었고, 괜찮나 싶어 안색을 살폈지만 평소처럼 내 시선에 기민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

‘…너무 충동적으로 저질렀나.’

오늘 레베카에게 빨간 눈의 마을에 관해 교단이 알고 있느냐 추궁하면서 그 마을의 존재에 대해 루시페우스에게 알리려던 것은 맞았다.

하지만 오늘 루시페우스가 에리나 경의 내력에 대해 듣는 것은 내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두 번 충격받을까 봐서 또 미루기엔….’

그가 자신의 태생을 저주해온 세월이 너무도 길었으니까.

‘내 죄책감을 덜자고, 나 좋을 대로 한 걸까…?’

한편으로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일러둘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기도 했다.

다음 주면 정무 회의고, 그 자리에서 귀족파의 성녀 시해 건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빨간 눈의 마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쏴아아, 밤바람이 키 높은 정원수들을 훑고 지나갔다.

날은 시월. 완연히 가을로 들어선 날씨 덕에 바람 끝에는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절로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쌀쌀하네, 그리 생각하며 걸치고 나온 숄을 바투 끌어모을 때.

어깨에 단단히 마감된 옷가지가 내려앉는 느낌이 났다.

“온실로 갈 걸 그랬군요.”

와중에 내가 추워하는 걸 눈치챘는지, 루시페우스가 제 재킷을 벗어 내게 걸쳐준 거였다.

드디어 생각이 좀 정리된 걸까? 나는 작은 반가움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경도 추울 거면서.”

“저야 뭐, 튼튼하고.”

본인에게 신성력이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할 때면 덧붙이곤 하는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러고도 루시페우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만 아까보다는 긴장한 기색이 덜어져, 그의 마음이 정리됐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느릿한 발걸음이 어느새 프리지어궁의 후원으로 이어지는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미안해.”

나는 입가에 넘실대던 말을 뱉고 말았다.

“더 빨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모든 게 다 전하의 대의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대의라. 나는 쓰게 웃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내 어린 시절을 보듬어준 친구의 사랑을 위한 거였는데.

자조감이 깃든 내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의 손끝이 내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저야, 그건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제게 알리면 안 되는 이유가 더 커서 그간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테고, 지금은 알릴 필요가 있으셔서 알리신 거겠지요.”

“아니, 필요라기보다….”

거기에 필요가 있다면, 단순히 그가 자괴감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길 바라는 거였다.

하지만 루시페우스나 내가 말하는 ‘필요’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기에 그 말을 부인하고만 싶었다.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쥐며 대꾸했다.

“그간 경에게 알리지 못한 건, 경이 이렇게 당혹스러워할 것 같아서였어.”

“저, 때문에요.”

“어쨌건 경은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다른 빨간 눈을 본 적이 없잖아.”

나는 호소하듯 말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프리지어궁 모퉁이 너머로 달빛 내려앉은 후원을 등져, 그의 낯이 한껏 어슴푸레했다.

거기에 어떤 기미가 떠올라 있는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처음에야 굳이 말하지 않은 게 맞지. 우리가 반목할… 때였으니까.”

‘반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불쑥 치민 창피함에 나는 절로 낯을 붉히고 말았다. 그게, 실은 나 혼자의 생각이었던 거니까….

그 생각이 다 보이는지,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일순 따스하게 빛났다.

“예, 그랬었죠. 제가 하던 일이 전하의 대업과는 정반대를 향해 있었으니까요.”

그 다정함이 또 새삼스러워,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내가 위로를 받으려던 게 아닌데….

밤공기가 쌀쌀해서일까? 나는 작게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지만…. 연말에 학자의 탑에서 그와 관련된 연구 결과를 발표할 거였거든. 그걸 깜짝 선물처럼 선보여 주려고 했는데….”

“깜짝 선물요.”

“경이 늘 경의 체질을 갖고서 안 좋게 말하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어.”

“그야….”

루시페우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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