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78화 (178/220)

178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9)

‘귀한 분…?’

레베카가 선택한 단어가 어딘지 의미심장했다. 모르긴 몰라도 에리나 경이 단순한 성기사 이상의 존재라는 이야기일 터였다.

반사적으로 루시페우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의 낯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처럼….

‘아니, 정말 그럴 거야.’

알비누스 후작가에는 에리나 경의 흔적이 정말로 남아 있지 않았다. 알비누스를 담당한 케인이 그토록 오래 수소문했지만 거의 표백 상태라고 느꼈을 정도로.

만일 알비누스 후작이 루시페우스와 단둘이 있을 때 이야기해 주었다면 사용인들도 알 수 없으니 케인이 알 방도가 없었겠으나, 후작이 그럴 리 만무했다.

‘방계도 몰살했는데, 에리나 경이 선대 후작의 유일한 핏줄이니 더더욱 그 흔적을 없앴겠지….’

그의 혼란을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마주 보고 앉은 탓에 그러지 못하여 내가 그저 안타까운 표정만 짓고 있을 때. 레베카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대의 어머니가 성기사로 오래간 몸담은 건 알고 있다고 했지?”

“오래간…까지는 모릅니다만, 예.”

“에리나 경은 성기사들 중에서 독보적인 신성력을 타고났더군. 그게 성기사단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교단에서도 고위급 신관 극소수만 아는 내용이지만.”

독보적인 신성력이라.

루시페우스가 제 신성력이 어머니에게서 왔다고 했고, 그의 신성력이 레베카에 맞먹는 수준이라고 했으니 일리가 있었다.

레베카의 신성력은 그레이스와 비등한 수준이니, 그 정도의 신성력을 타고나면 검을 쥘 것이 아니라 아예 귀의하여 사제가 되어야만 했다. 황실의 안정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짐작대로 에리나 경은 돌아가신 성녀님의 조카가 맞았고.”

“…그렇군요.”

루시페우스의 낯이 어둑해졌다.

출생의 비밀에 대해 듣는 것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는 늘 신성력을 번거롭다고 여겼으니 그런 걸까?

“성녀의 신변에 관해서는 교단의 비밀로 관리되지. 그래서 성녀께 동생이 있으셨다는 것도, 에리나 경의 모친이 그 동생분이라는 것도 밝힐 수 없었어. 그러니 에리나 경의 신성력이 그렇게나 많은 연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세례 때 확인한 신성력 보유량을 허위로 기록한 모양이야.”

“어쩐지….”

알비누스를 조사하면서 열람한 에리나 경의 세례 기록에는, 그녀의 신성력이 평범한 성기사 수준 정도로 적혀 있었다. 그러니 그 아들인 루시페우스의 신성력에 관해서도 크게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니 성기사단에서도 평범한 직책에 그쳤던 것 같고.”

에리나 경의 마지막 직위는 3중대장. 중대장이면 20대 후반치고 빨리 진급한 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실제 신성력 보유량대로 인정받았다면 바로 장성급이 되었어도 무방했을 텐데 말이야.”

한데, 레베카의 말소리가 갈수록 느려졌다. 뭔가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야 해서 최대한 늦추는 느낌이랄까…?

주저하듯 달싹이던 레베카의 입술에서 다음 말이 이어진 건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러니까, 성녀님의 동생분 말인데….”

지금까지 중에 가장 진지한 기색에, 나는 지레 마른침을 삼켰다.

“대중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녀께서 타고나신 신성력은 이전의 성녀들에 비하면 꽤 적은 수준이야. 그 이유가 쌍둥이로 태어난 동생분과 신성력을 나눠 가져서였고.”

“그렇다면, 그 신성력이 에리나 경에게….”

“사실 그건 장담할 수 없어.”

레베카가 내 대꾸를 잘랐다. 하지만 그 어조는 단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녀가 자식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고, 에이든 님과 그 형제… 그러니까 성녀의 아들 둘 다 신성력을 그다지 크게 타고나지 못했잖니.”

그러고 보니, 루시페우스도 그게 타고난 신성력은 아니라고 했지.

루시페우스 또한 제 체질에 대해 곱씹고 있는지, 테이블 모서리 즈음에 시선을 붙박은 채 혼란스러운 낯을 짓고 있었다.

“성녀의 동생분, 그러니까 그대의 외조모가 그전까지 성녀들이 지닌 신성력의 절반에 가까운 양을 타고났어. 그리고 교단의 비밀 기록에 따르면 거의 그만큼을 에리나 경이 지녔다더군.”

“하지만, 아까 성녀의 신성력이 유전되는 건 확신할 수 없다고….”

“응. 그래서 에리나 경이 성녀에게 주어지는 그 신성력을 후천적으로 넘겨받은 건 아닌가 짐작할 뿐이야.”

…루시페우스가 죽어가는 에리나 경으로부터 신성력을 넘겨받았듯이 말이다.

‘에리나 경의 어머니가 산고로 죽었댔으니까, 그쪽도 그때 신성력을 넘겨준 건가. 그럼 루시페우스가 지닌 신성력 역시….’

성녀에게 내려왔어야 하는 신성력이라는 소리.

놀란 마음에 순간적으로 내가 루시페우스를 쳐다보자, 그 또한 당혹스러워하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 눈빛이 내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크게 떨리고 있어서,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차분한 낯을 지으려 애썼다.

‘레베카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거야. 루시페우스가 그 신성력을 물려받았다는 걸.’

나와 루시페우스가 아무런 말도 빚어내지 못하는 동안, 차분하게도 그 정적을 버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루시페우스 본인의 선택이어야만 했다.

“언니, 그렇다면요.”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루시페우스에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줄 겸 레베카에게 말을 걸었다.

“성녀의 신성력이 자연적으로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과 에리나 경이 성녀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그런 게 다 교단의 비밀인 거죠?”

“맞아. 그리고 에리나 경은 그걸 알아서 격랑에 자원한 모양이야.”

“자원…했다고요?”

레베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 이 행성과 태양, 그리고 그 사이의 두 달이 일직선에 놓이는 이중 일식을 전후하여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균열이 크게 벌어지는 현상.

마계의 입구인 그 균열을 통해 마물과 마수가 마치 파도처럼 쏟아져 나온다고 ‘격랑’이란 이름을 붙인 거였다.

그리고 이중 일식이 끝나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다시 닫힐 때까지 마계의 것들을 처리하며 버티는 게 성기사단의 임무였다.

그게 기실 성기사단의 창단 목적이었기에, ‘자원’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어폐가 있는데….

내 낯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레베카가 천천히 덧붙였다.

“본인의 신성력이 격랑의 피해를 막는 데 쓰여야 하는 걸 알았던 거지.”

“아,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꿈속에서 보았던 에리나 경의 최후를 떠올렸다.

그녀의 동료들 역시 부상을 입고 있었지만, 빈사 상태였던 그녀에 비하면 모두 경미한 정도였다.

전사자야 수많았으나, 그녀 정도의 수위급 기사들은 목숨은 보전했다는 소리인데….

“그러니까, 그대의 모친이 지난 격랑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셈이야.”

“…….”

레베카의 진중한 말소리만큼 무거운 정적이 만찬장에 내리깔렸다.

격랑을 최종적으로 수습한 건 그레이스가 황성에 잔류했던 성기사단을 이끌고 진군했기 때문이지만, 그 피해가 그 정도에 그친 건 에리나 경 덕분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에리나 경이 그리도 큰 신성력을 타고났다는 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어서 지금껏….’

지금껏, 그 공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루시페우스의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루시페우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낯을 감추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 스치는 풍경이 무엇일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 무엇일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볼 때.

“이를 지금껏 함구한 데 대해 교단을 대표하여 사과하네.”

레베카가 더없이 진지한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황족에 고위급 신관이 하는 것으로는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아닙니다, 루시페우스는 간신히 중얼거림으로써 대꾸하였다.

“교단에서는 신비랍시고, 또 대륙의 균형을 지킨답시고 너무도 많은 것을 비밀에 부치고 있어. 황실에조차 공유하지 않은 것들도 많지.”

황실에 공유하지 않은 비밀…. 그 말에, 나는 내가 오늘 레베카에게 떠보려고 했던 것을 생각했다.

‘여기서 빨간 눈의 마을 얘기까지 해도, 괜찮을까?’

겸사겸사 루시페우스도 들을 수 있게 하려고 굳이 오늘 만찬에 초대한 건데, 루시페우스가 이미 너무 혼란스러워해서….

그가 입을 열기만을 바라며 내가 잠자코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때.

레베카가 상황을 정리하듯 어조를 바꾸며 말했다.

“요는, 그대가 원한다면 내가 어떻게든 손을 써서 에리나 경의 공을 만방에 공표할 수 있다는 소리야. 용사로 추존된다면 백작 위쯤은 어렵지 않은 것, 그대도 알고 있겠지?”

“귀족 법규가 그러함을 알기야 합니다만….”

그는 레베카의 의도를 쉽사리 파악하지 못한 듯, 가까스로 어색하지 않은 답을 빚어냈다.

레베카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깃들었다. 이따금 나를 보살필 때 떠오르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대가 세실과 함께함에 오로지 작위만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뭐죠?

갑자기 왜 나한테 화살이?

‘그 얘길 하자고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눈동자만 파들파들 떨 때였다.

“…그런 의미셨군요.”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왔는지, 레베카가 에리나 경의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내내 굳어 있던 루시페우스의 낯에 그제야 미미한 온기가 돌았다. 그 입가에는 미소 비슷한 것마저 떠올랐다.

“배려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진정 처음 듣는 것이라…. 실례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미안하네. 교단에서 너무 엄중히도 관리했지.”

“…아닙니다. 그저 제 운명이 그러한걸요.”

그리 말하는 그의 얼굴엔 분명히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거기에 떠오른 건 다분한 씁쓸함이었다.

많은 걸 체념한 얼굴.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게 너무도 슬펐다.

“그거야 제게 일어난 불행일 뿐인걸요.”

루시페우스는 나를 만나 살 의지를 얻은 것처럼 말했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생을 대하는 태도는 절망이었다.

‘그래서 내가 언제까지 살라고 할 때까지만 산다고 하는 거겠지….’

그가 제 운명에 체념한 세월이 지난 생까지 합한다면 수십 년.

그걸 알기에, 나는 그가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내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게 자만이어도 좋았다. 내 마음을 양껏 퍼부어도 그가 쉽사리 변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고, 한편으로는 변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만큼 상처받지 않을 거니까.

그에게 쏟아낸 마음은 아깝지 않을 테니까.

지금도 충분히 보답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가 과거를 돌이킬 때마다, 자신이 손쓸 수 없는 출신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번번이 절망하게 된다면….

나와 함께하며 행복에 젖어 있다가도, 문득 발밑을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은 이런 행복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리면 어쩌지.

그가 잠깐이라도 절망하면 어쩌지.

아무리 짧은 자조여도, 그런 건 싫었다.

내게 이런 행운이 있을 리 없지, 그리 생각하는 심정을 내가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입시를 잘 봤어도 전액 장학금 때문에 하향 지원해야만 했고, 운명적인 연인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끝은 번번이 배신이었던가….’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전생에서 나는 그렇게 번번이도 체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체념은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나조차도 나를 그래도 되는 존재로 폄하하고 말아서….’

그 괴로움을 아는 나는, 루시페우스가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으면 했다.

“언니.”

내가 고민하던 말을 꺼낸 것은, 거기에 생각이 미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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