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8)
‘초면도 아닐 거면서, 긴장했나…?’
그리 생각하고 나니 지레 쑥스러워지고 말았다.
레베카와 루시페우스와 함께 식사를 한다니 나 또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그런 감상에 빠질 자리가 아니야.’
오늘 레베카에게 만남을 청한 것은 알비누스 후작의 혈통 문제를 확인해달라 부탁하고, 킬리온이나 교단의 비밀 등에 관해 묻기 위해서였다.
나는 오늘의 목적에 집중하며 비장한 낯빛을 지었다.
적당한 담소와 함께 전채를 마친 뒤 시종들이 오늘의 메인 요리를 내오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시종들 모두를 만찬장에서 물렸다.
그리고 수비드 기법으로 요리된 돼지고기를 맛보는 그들의 손길이 적당히 늦춰지는 걸 지켜보다가….
“언니, 저….”
“그래, 세실.”
눈치를 보던 내가 말을 꺼내자, 레베카가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시종들 물릴 때부터 말 꺼내고 싶어서 아주 눈빛이 이글이글하더구나.”
레베카의 놀림에 나는 민망함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드시면서 들으시라고, 일부러 사이드디시도 이것저것 많이 준비하라고 했는데.”
“그러게. 어쩐지 많다 했고.”
나는 헤헤 웃어 보이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언니, 그러니까 부탁드릴 게 있어요.”
“응, 말해보렴.”
“그레이스 언니께도 미리 말씀드린 건데요….”
그레이스의 이름이 나오자, 레베카의 낯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우선은, 다음 달 정무 회의나 다다음 달 후속 회의에 한번 참석해 주시면 해요.”
“우선이라면, 뭐가 또 있단 소리니?”
나는 그저 생긋 웃었다. 헛헛한 웃음을 지은 레베카가 대꾸를 이었다.
“그래. 무슨 연유인지부터 들어보자.”
“…알비누스 후작에게 정통성 문제가 있어요.”
“정통성?”
“그가 선대 후작의 친자가 아니라는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레베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작고한 후작 부인이 호위 기사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로 추측하고 있어요. 그리고 높은 확률로 선대 후작은 이를 모른 채 제 아들로 키운 모양이고요.”
“…그래. 선대 후작에겐 확실히 제 피를 이은 자식이 하나 더 있으니까.”
그리 말하며 레베카가 루시페우스를 눈짓했다.
둘이 만났다더니, 루시페우스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그대는 그걸.”
“일전에 말씀드렸던, 제 지난 생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그가 자인한 바니 확실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지난번에 레베카랑 만났다더니, 전생 이야기까지 했어?’
두 사람 모두 내가 볼 수 없는 것에 관해 보는 만큼 무언가 신비한 대화가 이뤄진 모양이지…?
내가 차마 내색하지 못하는 작은 소외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레베카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거기에 어떻게 참여하길 바라는 거니?”
“언니께서 루시페우스 경의 신성력을 보시고서 힐베르크 후작가와의 혈연을 짐작해 주셨다면서요?”
“아, 그건….”
레베카는 당혹스러운 낯으로 머뭇거리더니,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 에이든 님의 신성력과도 닮아 있기야 했지.”
“에이든 님의 신성력과도…라면, 또 뭐가 있나요?”
“…아니야. 내가 교단 밖의 인물 중에서 이 영식처럼 신성력이 강대한 이를 볼 일이 없으니 신기해서 말이지.”
레베카의 말이 어딘가 변명처럼 울렸으나, 나는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서 말을 이었다.
“음, 그게… 후작과 혈연이 있는 이를 찾아서요.”
“그러면, 내가 이 영식과 후작의 신성력이 닮지 않았고, 그자와 후작의 신성력이 닮았다고 증언해주길 바라는 거구나.”
“…네. 언니께서 그런 걸 알아보실 수 있으시니까요.”
그리 말하며 나는 루시페우스에게 눈짓했다.
“예. 그…의 신성력이 꽤나 선명하니 판별하시기에 쉬우실 겁니다.”
내가 킬리온의 정체를 아직 드러내지 않았으니 루시페우스가 거기에 장단을 맞추며 말했다.
“실은 제가 어린 시절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본 적은 있지만, 그때는 제가 제 능력을 다루지 못하여 그런 걸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대가 가진 걸 생각하면 쉬웠을 리가 없지.”
레베카의 목소리가 진중하게 울렸다.
“신성력이 이렇게 많은데, 그만큼 마력도 많다면… 고달픈 운명이구나, 이자도.”
세르니타에서 의식을 잃은 루시페우스를 레베카에게 보였을 때, 레베카가 안타깝다는 듯 읊조리던 말소리가 떠올랐다.
새삼 명치 끝이 저릿해질 것 같아 나는 부러 화제를 돌리듯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혈연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마도구 같은 게 몇 가지 있어서, 오로지 언니의 능력에만 의존하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은사를 졌고, 교단의 신관이기까지 하니 퍽 쓸모 있겠지.”
거기까지 말한 레베카는 잠시간 생각에 빠졌다가 루시페우스에게 물었다.
“그대 외에 생존한 다른 알비누스가 없으니 이런 연극을 제안하는 거겠지?”
“예. 제가 가문의 일을 돌보기 시작했을 땐, 방계는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꽤나 음험하고 잔학한 자군.”
레베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치를 살피던 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게요, 언니. 얼마 전에 루시페우스 경에게 신관 킬리온에 관해서 확인해 주셨다면서요?”
“그래. 네 비밀을 그분께서 알비누스에 흘리셨다길래.”
“…후작과 혈연이 있다는 게 그예요. 후작의 이복형인 모양이더라고요.”
“킬리온 님께서?”
레베카는 굉장히 놀란 낯이 되었다.
“저번에 만나봤더니, 정신이 온전치 않아서인지 꽤 솔직한 말을 내뱉으면서 본인이 후작의 형이라기에 알아본 거거든요. 과연 그의 호적상 부친이 알비누스 후작의 친부더군요.”
“정신이 온전치 않으시다고?”
“네. 마음의 문을 닫은 모양이었어요.”
“주신이시여, 맙소사….”
“그간 후작에게서 겁박을 많이 당했는지, 루시페우스 경을 보자마자 놀라서는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고요.”
놀란 레베카는 킬리온을 위해 짤막하게 기도를 올리더니, 내 말을 잠시간 곱씹은 뒤에야 대꾸했다.
“그런데 킬리온 님을 만났다고? 네가? 수도원에 다녀왔다는 거니? 그 먼 곳을?”
아니나 다를까,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헤헤, 그렇게 됐어요.”
“…주신이시여….”
배시시 웃는 내 낯에 레베카가 이마를 짚었다. 누구보다 내 건강에 관해 걱정이 많은 내 언니다웠다.
“그, 제가 멀미도 심하고 마법에도 내성이 없지만…. 루시페우스 경이 마법을 써주면 괜찮더라고요.”
“…아하. 그렇게.”
레베카가 이마를 짚었던 손을 슬며시 들어 루시페우스를 흘끗 보았다.
“예. 미천한 재주나마 전하께 쓰이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래. 그대가 능력을 꽤나 정교히 제어하니 세실에게 퍽 도움이 되었겠군….”
“그렇습니다.”
루시페우스의 낯에는 은은한 뿌듯함이 깃들었다.
“그런데 킬리온 님께서 마음이 편찮으시다면, 증인으로 참석하실 수 있을까?”
“그게, 그것도 언니께 좀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그가 진짜로 마음의 문을 닫은 게 아니라, 그런 척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오늘따라 세실이 이 언니에게 부탁이 많구나.”
그 말에 나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요즘 내가 너무 해이해졌나? 루시페우스와 서로를 믿어보자고 약속하고, 내가 제게 기대기를 그레이스가 바랐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하긴, 레베카는 계속 나를 보살펴 줬으니까. 교단에 들어가고서도 나 때문에 계속 프리지어궁을 오가며 지내고 있고. 이미 충분히 번거로울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죄송해요, 언니. 하지만 사안이 급하다 보니….”
“아니, 세실. 널 타박하자고 한 말이 아니야.”
레베카가 푸스스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네가 언니를 믿고 이것저것 의지해주니 좋아서 말이지.”
“하, 하지만 언니는 예전부터 늘 저를 보살펴 주셨는데, 제가 또 많은 걸….”
내가 점점 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레베카가 피식 웃었다.
“세실. 넌 이 언니의 마음을 어쩜 그리도 과소평가하니.”
레베카의 말에 나는 작게 움찔했다.
요즘 들어 이런 소리를 자주 듣네….
‘그레이스도 그렇고, 엘런도 그렇고.’
한편으로 나는 루시페우스 앞에서 언니한테 혼난 셈이 되어 창피해지고 말았다.
번번이 잘난 척하는 모습만 보이다가 말이지….
마침 레베카 또한 테이블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루시페우스에게 말했다.
“세실이 내게 이리도 많은 부탁을 하니 재밌군. 어려서부터 제 몸 고쳐달라는 것 말고는 내게 바라는 게 없던 애라 말이야.”
“어, 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나는 화들짝 놀라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조숙한 환생자에 불과했을 뿐인데…? 회복력이 극악이라 레베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내 당황스러운 낯을 들여다보던 레베카가 루시페우스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대에게도 앞으로 각오하라고 하는 소리야.”
아, 앞으로라니?
갑작스럽게 전환되는 이야기에 나는 눈동자를 떠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 몸 다치는 일에 너무도 무심한 아이라서 말이지. 지켜보는 사람 마음도 좀 헤아려 주면 좋을 텐데….”
그리 말하며 나를 쳐다보는 레베카의 눈빛에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이게 내 언니의 사랑이기야 하였으나, 그게 루시페우스의 앞이어서 쑥스럽기만 했다.
“…모르지 않습니다.”
한데, 그리 대꾸하는 루시페우스의 낯이 씁쓸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표정은, 세르니타의 별채에서 마주쳤을 때의 것과 닮아 있었다. 아멜리 대신 함정에 빠진 내가 위험할 뻔했다며 동요하던….
결국 둘 다 나를 걱정덩어리 취급하는 거였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애꿎은 고기만 깨작거렸다.
그렇게 잠시간 만찬장에 정적이 내려앉았을 때.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내듯, 레베카가 한층 높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나는 세실이 연인을 소개하는 자리인 줄 알고 왔는데, 속은 기분이구나.”
레베카의 군청색 눈동자가 장난스레 빛났다.
“여, 여, 연인이라뇨, 언니….”
“프리지어궁에 출몰하는 그 근사한 신사가 누구냐고 내 시종들이 오두방정이었는데 내가 뭐라고 답해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오늘 드디어 제대로 알게 되나 싶었는데, 아직 아닌가?”
“아, 아니에요, 언니.”
아직은, 뭐 그렇게까지 이름을 붙인 건 아니라서….
내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루시페우스를 바라보자, 레베카의 시선도 그쪽으로 따라갔다.
“그대가 생각하기에도 그래?”
“저야, 지금 제 처지로서는….”
그 또한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곤란해서, 나는 레베카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언니, 그런 건 나중에요….”
“아직도 그런단 말이지?”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요즘 애들은 도통,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래. 그대가 신분을 잃을 것을 걱정하여 주저하는 기색이기야 했지.”
그리 말하는 레베카의 말소리는 조금 연극적으로 울리는 것 같았다.
마치, 오늘을 위해 준비한 대사인 것처럼….
“실례일진 모르겠지만.”
“신관님… 아니. 전하께서 제게 실례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루시페우스가 신관과 3황녀, 레베카의 두 가지 위치를 놓고서 머뭇거리자 레베카가 작게 웃었다.
“뭐, 편한 대로 부르게.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할 테니.”
“그래도 어찌 될지 모르니까요.”
“이름도 나쁘지 않겠고.”
두 사람의 내적 친근감이 상당했다. 내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대거리를 눈빛으로만 지켜볼 무렵.
“아무튼, 그래서 내가 그대의 어머니에 대해서 좀 알아봤어.”
“에리나 경에 대해서요?”
내가 깜짝 놀라서 레베카를 쳐다보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에리나 경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루시페우스 또한 놀란 듯했다.
“아무래도 성녀의 조카셨다면, 교단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어도 꽤 귀한 분이셨을 테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