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7)
“그분이 전하께도 말씀 안 드렸나요?”
“글쎄. 그냥 얘기가 잘 통했다고만 하던데.”
며칠 전, 구금 중이던 마검사들을 만나고서 내게 다시 들른 루시페우스는, 그들이 저들의 사정을 자백했다고 알려주었다.
다만 그 정황만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던 것인데….
“쑥스러우셨나…?”
“엥?”
“저도 구금실 바깥에서 새어 나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다지만요.”
“뭐, 그래도 제대로 들었을 거 아냐?”
중요한 이야기인 만큼 신성력을 써서 들었을 테니 말이다.
“예에, 뭐, 저희 소대 애들도 감독하느라 고생했으니 그 영문이 궁금했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무슨 마법사끼리의 교감 같은 거야?”
“그런 거면 그분이 처음 체포하셨을 때부터 술술 불었겠죠. 전하께서 그분을 피하실 때라 잘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
기실 엘런의 놀림은, 다른 기사들의 것과 조금 다른 속성을 지녔을 뿐이었다.
‘사실 적시 놀림이랄까….’
나는 내 오랜 수하를 째릿, 노려봄으로써 다음 말을 재촉했다.
“얼마 전에 루시페우스 경께서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다녀오신 걸 알았나 봐요.”
“어떻게?”
“글쎄요, 그것까지는….”
엘런의 대꾸를 들으며 나는 자못 심각한 낯이 되었다.
‘분명 거기까지 갈 수 있는 자가 없을 거라고 했는데.’
루시페우스의 추측과 달리 마검사들이 이동 마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수정이 숙성 중인 위치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마검사들은 모두 체포된 지 한 달은 돼가는 자들인데? 루시페우스가 거기 다녀온 건 지난주고.’
내가 머리를 팽팽 굴리며 상황을 추측할 때였다.
“그들의 목표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탐사하는 거라고 하던데요.”
“응, 그건 들었어.”
“루시페우스 경의 마력을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것과 동일시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흐음…. 나는 팔짱을 끼며 엘런의 말을 곱씹었다.
에리나 경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서 루시페우스를 잉태한 탓에 그에게 마력이 깃들었으니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마검사들이 그리도 급격히 태세 전환할 정도의 일인가?
루시페우스는 그걸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작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서 고민을 읽었는지, 엘런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게, 그분께서 굳이 말씀 안 하셨다면 아마 부끄러워서…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부끄러워? 그게 왜?”
“…완전 숭배자 같았어요, 그 마검사들.”
“숭배자라고?”
“마법의 주인이라나, 근원에 가장 가까우신 분이라나….”
엘런이 작게 어깨를 떨며 하는 말에, 한쪽에서 대화를 듣던 헨리에테가 헛웃음 짓는 소리가 났다.
“막심 경이 심문할 때면 딴청만 부리던 작자들이 주인 만난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쳐다보는데, 저도 간수 애들도 다 기가 막히더라고요.”
뒤에 꼬리 흔들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엘런이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진저리 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다녀온 걸 알고서 그를 따르게 되었다는 건데….
“그들이 태도를 바꾼 정확한 연유를 알게 되면, 전하께 바로 고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겠지.”
루시페우스가 내게 뭘 끝까지 숨길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러는 꼴을 보니, 저희도 안심하고 그들 몇을 풀어줄 수 있었고요.”
“그랬겠네. 그에게 그리도 살갑게 군다면 뒤통수치지는 않을 거고.”
그럴 겁니다, 엘런의 대꾸를 들으며 나는 그날 마검사를 만나고서 내게 들른 루시페우스의 말을 떠올렸다.
“마검사들이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그들 중 몇을 풀어서, 바깥에 있는 마검사들도 알비누스를 돕지 않게끔 단속해 두려고 합니다.”
거기서 구태여 더 캐묻지는 않았던 건데, 그들이 협조하게 된 정황을 들으니 생각이 좀 더 간명해졌다.
‘정신계 마법이라도 썼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라니까 다행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 일에 대단히 조심스러워하는 루시페우스가 그들을 풀어주면서 보험을 들어뒀을 수도 있을 거였다.
“그래. 그들이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준다면 힐베르크 후작가 쪽에 접근할 살수 중에 마검사는 없게 되는 거겠지.”
“예. 그들이 말을 바꾸지 않는다면요.”
“그렇다면 더더욱 루시페우스 경에게 부탁할 필욘 없을 것 같아. 애초에 그가 경비 결계를 친 게 우리 쪽에서는 마검사들의 은신 마법을 감지하지 못해서였잖아.”
“그럼 역시, 저희 쪽에서 차출을…?”
“아니, 사람 불렀다니까?”
오늘따라 엘런의 의욕적인 모습이 흐뭇해 내가 빙긋 웃을 때였다.
똑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울렸다.
벌컥, 헨리에테가 채 맞이하러 나가기도 전에 방문객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전하, 오랜만에 뵈어요! 엇, 엘런 선배님도 계셨군?”
그러니까, 근 한 달 만에 보는 레오폴트였다.
“응, 레오 오랜만. 와서 앉아.”
“아하, 부르셨다는 분이 아우렌바흐 공자님이셨어요?”
“으응. 레이디 아멜리 일인데, 레오한테 시켜야지.”
“밀리 일요? 무슨 일인가요?”
레오폴트가 자리에 앉으며 대번에 심각한 낯이 되었다.
‘…우리 레오, 여전하네.’
오랜만에 보는데도 내 안부보다 아멜리가 어떤 맥락에서 언급된 건지가 더 궁금하구나?
참 보기 좋고 별로네, 내 친구?
간만에 레오폴트에 대한 양가적인 마음이 들자 한껏 이기죽대고 싶어졌지만 꾹 참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레오. 좀 중요한 일이 생겼어.”
“얼마나 중요한데요…?”
레오폴트의 진지한 낯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멜리의 일이라고 하니 이 건이 정치적인 알력 문제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듯했다.
이는 레오폴트가 내 업무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 거였다.
“이번에 힐베르크 후작가에 기사 몇을 추천했다며?”
“얼마 전에 밀리가 전하께 인사 올리러 간다더니, 그때 들으셨나 보죠? 맞아요, 저희 기사단에서 기사 몇을 보내 드렸어요.”
“하지만 그게 사병이라고 할 만한 규모는 못 되지?”
“예에…. 저택도 넓지 않고 힐베르크 공께서도 불편하시다고, 두 분 호위로 일할 정도로 다섯 명 추천해 드렸죠.”
“흐음, 역시 부족해….”
그러네요, 내 말에 엘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오늘 원로원에서 힐베르크 후작이 귀족파의 눈 밖에 단단히 나버렸어.”
“예에?”
내 이야기가 제 예상과 현격히 다른 종류여서 레오폴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혹시 레이디 아멜리에게서 힐베르크의 비극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
“아뇨, 저야 그저 흔히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 말고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가문의 내력인 만큼, 아멜리는 레오폴트에게도 굳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는 사안이 생각보다 엄중해졌으니 조심하느라 말하지 못했겠고.’
다행이었다. ‘공제눈’에서보다 훨씬 해맑고 정의감에 넘치는 레오폴트라면, 그 사실을 알고서 귀족파를 볼 때마다 감정적으로 처신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고지가 코앞이었다.
쓸 수 있는 패, 없는 패 다 써야 할 시간.
“레오, 이건 어쩌면 아우렌바흐 공작도 모르는 이야기야.”
내 진지한 기색에 레오폴트가 사뭇 긴장한 낯빛을 지었다. 엘런의 눈치를 살피는 게, 이것이 내 업무와 관련된 일인지 가늠하는 기색이었다.
“힐베르크 후작가의 비극은 사실 귀족파에서 꾸민 일이야. 힐베르크령을 노리고 그 일원을 차례로 제거해 나간 거지.”
레오폴트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후작이 살아남았고, 심지어 후계자까지 생겼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게 귀족파의 술수였음을 후작이 알았지.”
“어쩌다 보니, 라면….”
레오폴트의 눈동자가 슬며시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개입한 일인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나는 입꼬리만 살포시 들어 올려 보였을 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답이 됐을 거였다.
“오늘 후작이 원로원 의회에서 경고 비슷한 걸 했어. 그래서 귀족파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을까 걱정이야.”
“…일리 있네요.”
레오폴트의 낯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내 의도를 모두 제대로 파악한 기색이었다.
내가 꽃밭이네, 해맑네, 속으로 잔뜩 놀려도, 어쨌건 이 세계의 남주인공이며 성기사단의 엘리트 부소대장인 것이었다.
물론 그 ‘공제눈’이 엉터리인 걸 생각하면 남주 버프라는 것도 이제는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친구 레오폴트를 믿으니까.
나는 신뢰감 가득한 눈빛으로 생각에 빠진 레오폴트를 바라보았다.
“…이거야말로 아버지와 상의를 해 봐야겠어요.”
얼마간 고심하던 레오폴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밀리와 힐베르크 공을 돕는 건 제게 큰 기쁨이지만, 황실파 차원에서 지원하는 편이 훨씬 모양새가 좋을 테니까요. 힐베르크 공께서 귀족파를 이미 적으로 돌리셨다면 말이죠….”
“응. 공작도 오늘 의회에 참석했으니, 나름대로 생각해둔 그림이 있을 거야.”
“언질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저, 먼저 일어나도….”
역시 근 20년 지기. 내가 가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간다고 하는 거 봐.
‘아멜리가 어지간히도 걱정되나 보지.’
하지만 그의 마음이 급할 걸 내가 더 잘 알았다.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축객했다.
“그래, 서둘러. 오늘 밤 정도는 내가 시간 벌어볼 테니까.”
“감사해요. 아버지랑 상의하고서, 전하께도 말씀드릴게요.”
레오폴트는 고개를 꾸벅여 보이고는, 그 길로 내 집무실을 나섰다.
“아 참!”
…아니, 뭔가가 생각났는지 고개만 빠꼼이 안으로 내밀더니….
“왜?”
“전하, 오늘 좀 전략실장 같으셨는데요?”
“에엥?”
“역시 황태자 전하께서 전하를 허투루 쓰실 리가 없었네요.”
“뭐래? 빠, 빨리 가.”
내가 황당하다는 듯이 쏘아붙이자 레오폴트가 씨익 웃으며 정말로 문을 닫았다.
쿵,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레오가, 내가 무슨 일 하는지 알고 있었나?”
“아우렌바흐 공자님이 전하를 곁에서 지켜본 게 몇 년인데, 그 정도 눈치도 없으시겠어요?”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런은 황당하다는 낯으로 피식 웃었다.
“전하께선 정말, 다른 사람들이 전하께 얼마나 관심 있는지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레오랑은 워낙에 그런 얘기를 안 했으니까….”
“아우렌바흐 공자님이 전하를 쫓아다닌 세월이 십몇 년인데, 그 정도도 모르시겠어요?”
“쫓아다니다니? 말조심해.”
어려서부터 나랑 레오폴트를 엮어대더니, 아직도 이러나? 조만간 제 연인이랑 꽉 찬 해피 엔딩까지 따낼 이에 대해 허튼소리는 금물이었다.
“전하께서 말씀 안 해주셨다고 아우렌바흐 공자님께서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있으셨겠어요? 전하께선 은근히 주변 분들께 무심하세요. 가끔 보면 제가 다 서운할 정도로요.”
“경한테 무심하단 소리를 들으려니 내가 자존심이 상하는데….”
“저희야 아랫사람이니 아무래도 괜찮지만, 친우분들께는 곁도 내주시고 그러세요.”
“곁이라니, 새삼스럽게 무슨…?”
“이번 일 끝나면 무슨 목적 없어도, 그냥 평범한 티타임도 좀 가지시고요.”
입이 트인 엘런은 내 대꾸에도 아랑곳없이 길디긴 잔소리를 이어갔다.
나 왜 갑자기, 내 수하한테 혼나고 있는 거지…?
나와 레베카가 오랜만에 함께 만찬을 든다니 간만에 프리지어궁 주방이 신났다.
거기에 손님까지 초대했으니, 3인 만찬.
근사하게 장식된 프리지어궁 만찬장에 나와 루시페우스가 들어서자, 먼저 도착해 있던 레베카가 우리를 반겼다.
“어서들 오렴.”
“그간 평안하셨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편히 앉게.”
루시페우스는 레베카에게 정중히 묵례해 보이고는, 레베카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도 칼같이 차려입는 그였지만 오늘따라 머리를 묶은 양도, 크라바트를 맨 양도 평소보다 훨씬 각이 잡혀 있었다.
레베카를 대하는 태도 또한 묘하게 더 정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