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6)
최근 모든 권리를 되찾아 원로원에 재입성한 힐베르크는 떠오르는 샛별로 주목받고 있었다.
그 영지나 재산이 눈에 띌 정도는 아님에도 그에게 성녀의 아들이라는 상징성이 있어서, 그가 어느 정파에 속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작 힐베르크 후작 본인은 우선 원로원에 적응하겠다는 핑계로 중립파를 자처했지만.
마지막으로 원로원에서 활동한 힐베르크인 그의 아버지 역시 특정한 정파에 속하지 않아, 일리 있는 처신으로 보였다.
다만 그의 딸이 황실파의 수장인 아우렌바흐의 후계자와 열애 중이니, 조만간 황실파에 편입되리라는 추측이 우세했다.
한편으로는 귀족파에서 그를 회유하려는 기미도 있었다. 귀족파에서 힐베르크의 영지를 흡수하려던 시도는 음지에서 벌어진 일인지라, 귀족파에게 무슨 의도가 있는지 다들 의아해할 따름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모두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졌다.
한데, 렌틸 자작이 후계를 지명하는 데 그가 말을 보탤 것이 뭐가 있어서?
친분이 있었나?
자리에서 일어난 힐베르크 후작은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입을 열었다.
“저 또한 제 여식에게 가문을 물려주게 된 입장에서, 황실의 총애를 입은 신진 가문의 차기 가주로 레이디 스칼렛처럼 진취적인 여성이 추대되니 참 흐뭇합니다.”
그의 이야기가 일종의 덕담으로 시작하자, 긴장했던 의원들의 낯이 슬며시 풀어졌다.
하긴, 힐베르크 후작이 원로원에서 무슨 의견을 내기엔 아직 무리지.
이미지부터 좋게 쌓으면서 정치도 배워가는 거야.
의원들이 서로의 낯을 보며 씨익 웃었다.
“저보다 더 오래 살 제 딸을 생각하면 새로운 시대가 올 조짐 같아서 반갑기만 합니다. 제국이 건국된 지도 벌써 500년인데, 제 딸 세대에는 이 남성 우세의 원로원 풍경도 조금 달라지지 않겠나 싶습니다만….”
이어지는 힐베르크 후작의 말에 의원들이 기분 좋게 웃었다. 여성 의원 수가 늘어날 일은 없다는 교만에서 비롯된 거였다.
그 광경에 렌틸 자작이 차게 웃었다. 내가 스칼렛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걸 보고도 저리 한심하게들 구나.
한데, 이어지는 힐베르크 후작의 말소리가 조금 묘하게 변했다.
“저는 귀족파며 황실파는 잘 모르지만…. 그 구태의연한 갈래 역시 언젠가는 바뀌지 않겠습니까.”
바뀐다니? 조금 전까지 후계자 딸 타령을 하던 이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자 장내가 동요했다.
귀족 사회가 황실파와 귀족파로 나뉜 것은 제국의 500년 역사와 함께 유구히 내려온 전통이었다. 아우렌바흐를 제외한 공작가들과 몇몇 소수 가문만이 중립을 유지할 뿐 대부분의 가문이 황실파나 귀족파에 속해 있었다. 무당파들조차 내심으로는 어느 한 파벌을 지지했다.
“저는 그게 머지않아 가능할 거라 믿습니다. 저나 렌틸 자작이 여성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처럼 시대의 당연한 흐름일 겁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소리에 장내가 깊은 정적에 휩싸인 순간.
모든 이목이 빠짐없이 제게 집중한 걸 확인한 힐베르크 후작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발언을 맺었다.
“제 가문에 일어난 비극의 전말이 밝혀진다면 말이지요.”
그리 말하는 후작의 눈동자는 회의장 서편에 모여 있는 귀족파의 주류를 향해 있었다.
그 눈빛이 제법 서늘하여, 원로원의 새내기를 바라보던 흐뭇한 시선은 일시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윽고 폭탄을 던져놓은 힐베르크 후작이 전직 신관답게 고요한 몸가짐으로 자리에 앉았을 때.
힐베르크의 비극에… 전말이 따로 있다고?
그의 발언을 둘러싸고 추측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귀족파를 겨냥한 건가?
귀족파가 힐베르크의 비극에 지분이 있어…?
하지만 의원들이 아무리 흘끗대어도, 낯빛을 갈무리한 힐베르크 후작에게선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게이블스 후작을 중심으로 모여 앉은 귀족파의 주류는 태연한 척을 하였으나 저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하께서 힐베르크 후작에게 성녀 시해 건에 관해 언질 주셨나 보군.’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렌틸 자작만이 그의 발언 너머에 누구의 뜻이 있는지 정확히 짐작했다.
‘이걸로 당분간 귀족파 주류가 대놓고 무슨 공작을 벌이는 일은 자제하게 되겠어.’
이후 수확제를 비롯해 가을 시즌에 치러질 몇몇 사교계 행사에 관한 논의가 짤막하게 이어지고서 의회가 종료되었다.
오늘의 안건 중 의사당 밖으로 널리 널리 퍼질 이야기는 단연코, 렌틸 자작이 방대한 양의 서면 자료와 함께 제 동생인 게이블스 후작을 공격한 건이었다.
몇몇 의원은 폐회 직후 곧바로 독수리의 서고로 달려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힐베르크 후작의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그에 관해 대놓고 입에 올리는 이는 없었지만, 다들 쉬쉬하며 그의 말을 곱씹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말로 힐베르크의 비극을 귀족파가 사주한 걸까?
아까 귀족파 보는 눈빛 봤어? 아주 찢어 죽일 것 같던데.
그러니까, 이 일만 수면 위로 떠오르면 귀족파는 다 실각한다는 건가?
그런데 요즘 귀족파가 좀 심상찮지 않아?
게이블스랑 알비누스랑 묘하던데. 요 몇 년간 단짝처럼 붙어 다니더니.
저마다의 수군거림과 함께 모든 의원이 빠져나간 회의장 안.
알비누스 후작만이 눈을 감은 채 홀로 앉아 있었다.
‘…이게 다 뭔가.’
다른 의원들의 추측대로, 근래 후계자들 사이의 신경전 때문에 게이블스 후작과의 관계가 어긋난 참이었다.
그리고 귀족파의 앞잡이들은 저들의 음모에 밑천을 댄 졸부보다야 명분을 지닌 게이블스를 더 중시하는 자들이었다. 두 가문 간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알아채자마자 모두가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심한 버러지들 같으니. 속은 똑같이 천박하면서, 얼마나 고매한 피를 타고났다고.’
루시페우스, 그놈이 있을 때는 두려워하는 척이라도 하더니….
그들에게는 루시페우스가 정확히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가 몇 가지 간단한 마법을 구사하는 것만으로도 그를 부리는 후작을 모두들 두려워했는데 말이다.
절연하고 나갔을 땐 괘씸하기만 했는데, 이제 와서는 그 존재가 너무도 아쉬웠다.
“거래를 파기합니다.”
“선대 후작님의 친자가 아니신 것, 알고 있습니다. 신전에 발고하지 않겠습니다. 피차 갈 길 가시죠.”
‘도대체 그때 뭐 때문에 열을 내며 쳐들어온 건지…. 뭘 알아야 다시 구슬리기라도 할 텐데.’
그러면 저 가진 거라곤 혈통밖에 없는 버러지들을 어떻게든 찍어 누를 수 있을 텐데….
상단주 대리 대신 에스메르와의 면담에 다녀온 이후의 일이니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지만, 에스메르가 얌전히 지내는 걸 보면 그건 아닌 듯했다.
‘그 녀석이 차라리 내 아들이었다면….’
빠드득, 어금니 갈리는 소리와 함께 후작의 턱이 불거졌다.
‘도미닉 그 녀석은, 서대륙까지 보내놨으면 어떻게든 잘 배워 올 것이지. 4황녀랑은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4황녀에게 부마 자리를 확답받겠다며 황궁에 다녀와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벌써 며칠째였다.
얼마 전부터 4황녀만 연관되면 녀석이 감정적으로 굴어 꽤나 곤란하던 차에 말이다.
‘황태자와 협상하려고 판을 다 깔아뒀는데, 갑자기 녀석이 나서는 바람에 일도 그르치게 생겼고.’
그러면서 게이블스의 아들놈과 사이도 벌어지는 바람에 귀족파 안에서 제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었고.
4황녀의 시부 자리도, 귀족파의 권력도 모두 제 손에 다 들어왔다 싶었는데.
‘…다 왔는데, 이제 와서 게이블스 놈들에게서 불똥이 튀어 망하게 생겼으니…!’
의회가 진행되는 내내 티 내지 못했던 분노가 어느새 그의 낯에서 붉으락푸르락했다.
‘렌틸 자작 그년도 어디서 뭘 주워듣고 와서는! 힐베르크 놈도, 그때 함께 안 죽인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게다가 도미닉이 데려온 마검사 놈들도 어째선지 갑자기 비협조적으로 굴기 시작했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모든 분노를 담아 책상 위에 올려둔 후작의 볼품없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렇게 되면, 정말 그 수를 쓰는 수밖에 없나…!’
“아하하, 직접 못 봐서 아쉽네.”
“전하께서 배석하셨다면, 웃음을 못 참으셔서 들키지 않으셨을까요?”
원로원 의회는 귀족과 그 보좌관만 참석할 수 있는 곳. 따라서 오늘 의회에는 아쉽게도 내가 직접 가볼 수가 없었다.
대신 엘런의 2소대에서 렌틸 자작의 호위를 맡고 있기에, 자작의 보좌관으로 변장한 엘런이 내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
“가장 궁금한 건 윌로우 놈이 어떻게 신실한 소후작인 체했는지인데.”
“게이블스 영애님을 꽤나 의식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작님께서 후계 지명하시자마자 속내를 못 감춘 걸 보면요.”
“어려서부터 오죽 찍어 눌렀어야지. 거슬리지도 않았으면 그놈 성정에 그저 내버려 뒀을걸?”
나는 스칼렛을 처음 만난 열 살 때, 제 동생이 입바른 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험악한 낯을 짓던 윌로우 놈을 떠올렸다.
그때는 신체적으로 위압적이라 무서웠는데. 이젠 여러모로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녀석이 떵떵거릴 수 있는 것도 얼마 안 남았지.
나는 자못 흥미롭다는 낯으로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독수리의 서고에 비치해둔 자료가 널리 열람되기만 바라면 되겠네.”
“네. 황실파 몇몇은 폐회하자마자 바로 달려가는 눈치였어요. 다들 관심은 만만인데 서고 입장 인원도 제한돼 있고, 귀족파 눈치도 보느라 다른 날에 오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거기까지 말한 엘런이 굉장히 신중한 어조로 첨언했다.
“힐베르크 후작님께 너무 많은 시선이 쏠렸습니다.”
“음. 힐베르크 쪽이 위협받을 확률이야 분명히 높아질 상황이지.”
“그간 계속 후작님을 해치우려던 걸 생각하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 아닙니까.”
“응. 일이 터지면 다들 귀족파를 의심할 테니 몸을 사리는 게 맞지만, 증거를 안 남기고 성공하면 오히려 모든 게 묻힐 테니 도박을 할 수도 있을 거야.”
“후작저 쪽에도 기사를 몇 붙일까요?”
엘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의욕적인 엘런이라니…. 나는 엘런의 낯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경이 많이 컸어.”
“아니, 전부터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경이 아주 책임감 넘치는 2소대장 같아서 말이지? 어릴 때 같았으면 경이 이렇게 나서서 일을 했겠어?”
“…….”
엘런도 제가 초임 시절에 얼마나 심드렁하게 굴었는지를 알아, 낯만 불만스레 굳힐 뿐이었다.
나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걱정 마. 이미 누구를 불렀으니까.”
“혹시, 그분…요?”
“그분?”
“루시페우스 경요. 경비 결계 쳐주셨던 것도 그렇고, 사실 가장 믿음직하잖습니까.”
“경의 생각에 그가 믿음직해?”
“…예에, 뭐, 실력만은 확실하니까요. 그분의 동기가 전하에 대한 애정 단 하나인 것만이 문제죠. 전하 말씀 아니면 자의적으로는 절대 안 도와주실 테니까요.”
놀리는 기색 하나 없는 담백한 말소리였지만 그 내용이 수줍기 그지없어 콧잔등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이, 일단, 마검사들이 대충 협조하기로 했다며?”
“네. 사실 이 역시 저희한테 협조한다기보다 루시페우스 경에게 협조하는 거지만, 그건 결국 전하께 협조하는 셈이지 않겠습니까.”
내용이야 어찌 됐건, 여전히 담백한 엘런의 말소리….
그래, 다들 딱 이 정도로만 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엘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들이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꿨는지 경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