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5)
“예?”
이해할 수 없는 막심의 말소리에 루시페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긴 했다.
한편으로는 마검사들의 표정 또한….
‘왜 반가워하는 거지?’
루시페우스가 보기에도 그들의 낯에 걸린 감정이 반가움, 그 외의 것으로는 보기 어려웠다.
당황한 두 신사가 구금실 바깥을 쳐다보았으나, 엘런을 비롯해 그곳을 지키던 기사들 모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낯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루시페우스의 나직한 대꾸에 일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라고 전해 주십시오.”
“───?”
“────────.”
막심이 유창한 서대륙 공통어로 질문하자, 그들 중 최연장자로 보이는 이가 대꾸했다.
두 사람은 이따금 루시페우스 쪽을 흘끗거리며 대화를 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으니 집중할 필요도 없었다. 루시페우스는 그들의 대화 소리를 흘려들으며 마검사들의 낯을 하나하나 살폈다.
‘다들 나와 구면인데….’
하나같이 렌틸 자작저에서나 생장크트 산에서 루시페우스가 손수 체포한 이들이었다. 결박 마법을 걸거나 풀고, 구금실 전역에 경비 결계를 치면서 가까이서 마주한 적 또한 많았다.
그때마다 그들은 늘 저를 적대했지, 반긴 적은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루시페우스가 팔짱을 끼며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살필 때였다.
“자네, 혹시 최근에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갔었어?”
“예…?”
“이제야 이들이 본대륙에 온 목적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막심이 마검사들의 낯에 눈을 흘기며 허탈하다는 듯 실소했다. 마검사들은 하나같이 멋쩍은 표정이었다.
하아, 한 달간 그 고생을 시켜놓고…. 막심이 입에서 진하디진한 한숨이 떨려 나왔다.
“이들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마력의 근원으로 본다더군. 그래서 그 내부를 탐사하고 마력석을 채취하기 위해 본대륙에 온 모양이야.”
“그렇다면….”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릴 것을 알고 온 거지.”
루시페우스의 콧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쳤다.
“안타깝게 됐군요. 그건 이제 없을 일이니.”
그의 눈동자가 냉랭함을 담아 마검사들에게 붙박였다.
마검사들은 하나같이 그에게서 어떤 진언이 내렸는지 설명해 달라는 듯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막심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입 다문 게 창피하지도 않나…. 막심은 짜증 어린 낯으로 루시페우스의 말을 전달해 주었다.
“───────.”
“───!”
“──────!”
한데, 막심의 말을 듣자마자 마검사들은 손을 내저으며 무언가를 해명하듯 들뜬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표로 막심과 대화하던 자가 루시페우스와 눈을 마주친 순간.
“봤다!”
막심의 낯에 황당함마저 깃들었다. 제국어를 할 줄도 알았단 말이지?
“봤다, 당신! 거기에 있다!”
“나를?”
고개를 갸웃하는 루시페우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거기에 있는 날…. 봤다고?”
마검사들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0월의 첫 원로원 의회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렌틸 자작이 그간 수집한 게이블스의 허물을 고발한 것이었다.
그 사례로 렌틸 자작이 진술한 것 중에는 올해 사교 시즌에 벌어진 일도 있어서 좌중을 경악게 했다.
어쩐지, 사냥 대회에서 부상자가 많은 게 이상하긴 하더라니.
세뇌 마법을 걸었다고? 그럼 마탑에서 마법사를 섭외한 건가?
세르니타의 별채가 다 무너졌던 게, 귀족파가 사주한 괴한의 소행이었단 말이오?
황실파나 무당파가 분노한 것은 당연했고, 귀족파 중에서도 주류와 거리가 먼 가문들 또한 크게 놀랐다.
렌틸 자작이 게이블스 후작을 고발한 내용은 귀족파 주류 전체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의원들의 분노한 시선이 사냥 대회를 주관한 세르니타와, 마기에 잠식시킨 베라초를 유통하려 한 알비누스를 스쳤다.
세르니타 후작과 알비누스 후작은 빳빳이 굳은 눈매로 렌틸 자작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렇대도, 제 누이를 향해 형형히 눈을 홉뜨고 있는 게이블스 후작의 낯에 서린 노기(怒氣)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충분히 수런거릴 시간을 준 뒤, 렌틸 자작은 기세 좋게 발언을 마무리했다.
“…하여, 저는 게이블스의 현 가주 로버트 게이블스에게 가문을 방만하게 운영한 책임을 묻고자 합니다.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누이로서 말이지요.”
“경쟁이라니…!”
“예. 그 과정은 기울어진 저울 위에서 치러졌으니 경쟁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만요.”
렌틸 자작의 싸늘한 시선이 게이블스 후작과 그 곁의 후계자, 윌로우 게이블스에게 닿았다.
모자람은 없으나 저보다 만사에 뒤떨어졌던 동생. 그리고 제 조카딸에 비할 것도 없이 객관적으로 형편없는 그의 아들.
렌틸 자작의 콧가에 깊은 한숨이 스쳤다. 근 30년 전 울음소리를 꾹꾹 눌러 참으며 후작저를 떠나던 안네마리의 설움이 마모되고 또 마모된 표출이었다.
“이에, 그 근거가 될 자료를 제출합니다. 시간 관계상 발의하지 못한 건도 모두 기록돼 있습니다.”
렌틸 자작은 그대로 단상 앞으로 나아가 서기에게 서류철 하나를 제출했다. 웬만한 학술서 뺨칠 정도의 두께의 종이 뭉치였다.
서기에게서 서류철을 넘겨받은 의회의 임원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종잇장을 뒤적였다.
뭐가 저리 많아?
저게 다 증거 자료라고?
아까 말한 게 다가 아니야?
멀리서 봐도 압도적인 위용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암조의 자료에 루시페우스의 증언을 보태고, 렌틸 자작의 손으로 새로이 작성한 것이었다. 암조 기사들의 투박한 문장에 렌틸 자작의 유려한 학술적 문체를 덧씌우자 분량이 늘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자, 자료라니…! 소설이라도 한 편 쓰신 것 아니오?”
게이블스 후작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제 누이의 것보다 조금 더 갈색이 도는 금갈색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그에 맞서는 렌틸 자작의 눈빛 또한 매서웠다.
‘형질 하나 다르게 태어나 남성으로 발생한 게 뭐 그리 대단한 능력이라고….’
저야 도망쳐서 다른 형태의 삶을 일구었으나, 제 조카딸의 시대는 조금 달라야 한다.
자기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원하는 모양의 삶을 쟁취할 수 있는 시대.
렌틸 자작, 아니, 안네마리 게이블스는 의장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이 자료를 독수리의 서고에 비치할 것을 요청합니다.”
독수리의 서고. 원로원 의회의 자료실로, 회의와 관련된 자료들을 비치하여 원로원의 구성원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하는 곳이었다.
“그 말인즉슨….”
“예, 시월 정무 회의 때 폐하 앞에서 가주로서의 그의 자질에 관해 논하기를 청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의 파장이 의회장 전체를 뒤집었다.
두 달에 한 번, 황제와 황태자가 배석한 자리에서 진행되는 정무 회의.
평소 어전 회의가 각료들만 참석하여 치러지는 것과 달리, 원로원에 입성한 모든 가문의 대표가 참석한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컸다.
평소 중앙에 올라오지 않는 지방의 대귀족들도 이따금 참석하곤 하는, 본대륙의 모든 귀족에게 열린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가주의 자질에 관해 논하자는 것은 단순히 상벌을 내려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게이블스처럼 거대한 가문을 이끌기에 흠결이 있다면, 심지어는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황실과 원로원이 합의하여 가주직을 박탈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렌틸 자작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생각보다 장대하여 의회에 참석한 모두가 눈동자만 굴렸다.
“이, 이… 이보시오, 누님!”
“게이블스 가주. 아까부터 자꾸…. 정식으로 발언권을 신청할 게 아니면 자중하시오.”
의장의 일갈에 게이블스 후작은 씩씩대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윌로우 게이블스가 평온한 낯으로 제 아비의 손을 토닥였다.
“아버지, 괜찮습니다. 게이블스는 이런 걸로 무너지지 않지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했으나… 망나니 같은 그의 품성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게 얼마나 급박한 사안인지 모르니까 저러겠지?
다른 때였다면 믿음직하다고 착각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누가 저자를 믿음직하다고 생각하겠소.
회의에 참석한 의원들이 윌로우에게 눈을 흘기며 수군거렸다.
윌로우 게이블스는 지난주부터 후작과 함께 의회에 참석하며 꽤나 정신 차린 듯한 면모를 보이는 차였다.
문제는 남들 눈에 그게 척에 불과함이 선연했다는 것이었다.
와중에 아리따운 미혼의 딸을 가진 가주들에게만 살갑게 인사했으니 그 목적마저 명백했다.
하지만 든든한 체를 해야 할 때가 있고 아닌 때가 있는데….
제 조카 아들의 한심함에 안쓰러움마저 느끼며, 렌틸 자작은 뒤돌아 회의실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의사당이 원형으로 지어진 탓에, 그녀가 선 의장석 앞의 단상에서는 회의에 참석한 모두의 낯이 다 보였다.
학자의 탑과 동일한 구조. 렌틸 자작에겐 익숙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었다.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강의하듯 또랑또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더불어, 이 자리에서 중대한 발표를 하나 하고자 합니다.”
“발언하시오.”
의장의 단정한 대꾸에 렌틸 자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저는 제 후계자로 제 조카딸, 스칼렛 게이블스를 지명하는 바입니다.”
부스럭. 그녀의 말이 맺기가 무섭게 정적을 뚫고 종잇장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 진원지를 찾자… 조금 전까지 우직한 체하고 있던 윌로우 게이블스가 낯을 와락 구기고 있었다.
‘그 귀신 놈이 하던 말이 진짜였다고? 스칼렛, 그것이 도대체 뭐라고…!’
그의 이글이글한 눈빛이 렌틸 자작의 너머에서 제 누이의 환영을 보고 있는 듯했다.
기실 귀족가의 후계 지명을 이리도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렌틸 자작은 납득하기 어려운 사유로 후계 다툼에서 떨려난 제가 공정한 방식으로 후계를 지명한다면 누구를 지목할 수 있는지 온 귀족 사회에 보이길 바랐다.
한편으로 스칼렛 게이블스가 단순히 ‘사교계의 꽃’이 아니라 한 가문의 가주감으로 손색이 없음 또한 시사하고자 했다.
윌로우의 반응이 여론에 보탬이 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호재였다.
렌틸 자작의 시선이 회의장 곳곳에 자리한 몇몇 귀족의 낯을 향했다.
게이블스의 가신이거나, 게이블스 소유의 앤더슨령, 에버렛령 등지에 투자한 가문의 가주들로, 게이블스의 차기 가주가 누가 될지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때 게이블스 후작에게 입 안의 혀처럼 구는 가신, 트렘포드 남작이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게이블스 후작 자리를 넘보시는 겁니까? 한번 가문을 버리신 주제에요?”
기다린 질문이었다. 렌틸 자작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차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렇게 죄 많은 가문의 가주직을 넘봐 무엇 하겠습니까? 이제 저는 일개 학자에 불과할 뿐. 그저 책이나 읽으며 여생을 마감하면 소원이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후계는 렌틸 자작 위에 대한 겁니다.”
“하지만 그 작위는 분명…!”
“예. 렌틸 자작 위가 단승 작위긴 하지만, 조만간 제가 공표할 연구가 하나 있어서 말이지요. 폐하께서 1급 훈장은 거뜬히 내려주실 건이니, 포상으로 제 작위도 계승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쯤 무리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숫제 허장성세요 너스레였다.
‘조만간 발표할 거라고 해봤자, 성녀의 생존과 격랑의 연관 관계에 관한 가설과 빨간 눈의 마을에 관한 것뿐…. 사회적으로 파급력이야 크겠지만 1급 훈장까지는 언감생심이지.’
하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확실히 바뀌었다.
게이블스의 후계 선정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도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던 이들이 새로운 상상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때, 의원 하나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청했다.
“힐베르크의 가주, 에이든 힐베르크입니다.”
모든 의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