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73화 (173/220)

173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4)

내 물음에, 루시페우스는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긴장한 기색이었다.

“사실 우리도, 세르니타에서 경이 쓰러진 거 보고 놀라서 신전에서 확인해보긴 했거든…?”

나는 그의 낯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게 내 업무기야 했으나, 여하간 뒷조사한 셈이니 기분이 상할까 봐서.

“…기록과 다르긴 할 겁니다.”

루시페우스의 낯에 깃든 건 씁쓸함이었다.

“제게 신성력이 이토록 많은 건 타고난 게 아니거든요. 물론 타고난 것도 번거로운 수준이긴 했지만….”

“타고난 게 아니라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어머니께서 지니신 신성력이 모두 제게 왔습니다.”

“그게… 가능해?”

“이런저런 방법을 찾고 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군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내 목 언저리에 닿아 있었다. 레베카의 신성력이 담긴 초커가 걸린 곳이었다.

아, 그러니까….

‘저번에 〈신성력의 비밀〉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지….’

루시페우스는 제 신성력을 내게 건넬 방법을 찾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 남자는, 자꾸 뭘 이렇게 주려고 하지…?

그게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멋쩍기도 해서, 나는 부러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난 지금까지 신성력 없이도 잘 살았는데?”

“그렇지만, 제가 없을 때 무슨 일을 당하시면 어떡합니까.”

“…없으려고?”

내가 은근하게 말하며 허리 근처를 손끝으로 간질이자, 흠칫 놀란 그의 셔츠 너머가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곁에 있겠다면서.”

“…그야, 그렇지만요.”

“역시 남자 말은 다 믿을 게 못 되는 건가아…?”

그리 말하며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그의 낯을 올려다보니, 루시페우스의 낯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나였다면 얼굴이 새빨개질 만큼의 당혹감이 여실했다.

루시페우스는 제 허리 근처를 지분거리던 내 손을 쥐어 들었다.

“전하께서 이따금 말씀하시는 남자라는 게 어떤 부류인진 모르겠지만요….”

조금 전까지 그를 간지럽히던 손끝이 그의 입가에 가닿았다. 나와 마주할 때면 그 입매는 대체로 야트막한 호선을 그리곤 했다.

“거기에 속하진 않는다고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전하께서도 이렇게 오기가 생기셨던 걸지….”

결국 얼굴이 빨개지고 만 건 나였다.

아니, 그게…. 짤막한 침묵이 너무도 간질간질해, 내가 꺼낼 말을 찾고 있을 때.

“전하께서 제게 곁을 허하신 바에야 제가 한순간이라도 어찌 떠나고 싶겠습니까. 다만 제 신분 문제도 문제고, 저의 이 미천한 혈통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내 손끝에 깊이 입 맞췄던 그 입매는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아픈 듯한 기색이 배어났다.

내가 신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쉽게 안심할 수는 없겠지.

내가 황실의 직계고, 이 세계는 신분제로 굴러가니까.

‘작위야 그레이스가 어떻게든 해주겠지만. 빨간 눈은….’

그건 애초부터 문제 될 것이 없는데.

그가 내비친 쓸쓸함에 지레 내 마음이 저릿해졌다.

‘…그래. 조만간 빨간 눈의 마을 이야기도 해줘야겠어. 학자의 탑의 규칙 따위….’

그런 것보다야, 눈앞의 이 남자가 내게는 훨씬 소중하니까.

그가 스스로의 상처를 헤집는 생각을 하게 놔두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는 이미 너무도 오래 아팠으니, 나는 그걸 내버려뒀다는 죄책감에 허우적대는 대신 그를 아주, 아주 행복하게 해주면 될 거였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그가 어색하지 않게 입에 올릴 수 있도록.

그러자면….

‘또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말해야 하는데….’

적절한 시기가 언제일까,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있지, 조만간 레베카 언니를 포섭할 거야.”

“3황녀 전하를요.”

“레베카는 은사를 졌으면서 고위급 신관이니, 의회에서 발언하기에 신뢰도가 아주 높지.”

“그 신관과 후작의 관계에 대해 여쭈시려는 거군요.”

“응. 황실의 개입이라고 딴지 걸 자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관련된 기능이 있는 마도구도 다 제출할 거고.”

나는 아멜리에게 선물해준 인연 팔찌를 떠올렸다.

“그럼, 제가 가진 것도.”

“있으면 좋지. 다른 대륙의 물건이라 낯설어들 하겠지만, 그 효과를 보여주면 신뢰할 수 있을 테니까.”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 전에, 레베카 언니랑 같이 만나자. 전에 만났었으니 괜찮지?”

“…저야 전하께서 명하신다면 어딘들 괜찮지 않을 리가요.”

그다운 대꾸에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내가 웃을 때면 늘 그렇듯, 그의 낯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왜 저를…?”

“신성력이 닮았는지 눈으로 보는 거, 나는 잘 모르잖아. 경이랑 이야기가 더 잘 통할 것 같아서.”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레베카와 나눴던 대화를 돌이키는지 루시페우스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또, 킬리온을 대신전으로 옮겨오면 좋을 것 같아. 그걸 부탁하려고.”

“그에게 증언을 시키시려고요?”

“일부러 미친 척을 하는 것 같기도 해서. 확인해 봐야겠지만 말이야.”

“…그때 그가 한 이야기 중 이치에 닿는 것들이 꽤 많긴 했습니다.”

정신을 놓은 사람이라기엔, 킬리온은 꽤 제대로 된 말들을 내뱉었다.

제가 후작의 형이라거나, 성녀의 죽음에 일조했다거나, 루시페우스가 빨간 눈인 걸 알고서는 측은해하는 듯 퍼붓던 저주의 말들….

“저야 전하를 한 번이라도 더 뵐 기회인데, 제가 보탬까지 된다면 더없는 기쁨이지요.”

루시페우스는 내내 쥐고 있던 내 손을 고쳐 쥐더니, 내 손등에 입을 묻었다. 손마디마다 입술의 감촉이 새겨졌다.

그런 사소한 접촉에도 그는 늘상 경건한 기색이어서 나는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낯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오후의 햇볕보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기쁨이 더 찬란하게 보였을 때.

“혹시, 3황녀 전하께서 좋아하는 게 있으실까요.”

문득, 루시페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왜?”

“…제가 번번이 경황없이 찾아뵌 것 같아서요. 전하께 누가 되지 말아야 하니….”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을 희한하게도 하는 남자였다. 그게 또 귀엽게 느껴져, 나는 그에게 쥐인 손을 당겨 그의 손을 내게로 가깝게 했다.

소맷부리 밑, 평소에 꼼꼼히 장갑을 끼는 덕에 노출될 일 없는 손목 안쪽은 유독 희었다.

나와 있을 때만 장갑을 벗으니, 나만 볼 수 있는 곳.

나는 고개를 숙여 거기에 입술을 꾹 눌렀다. 희고 단단한 손목 한가운데, 푸르게 불거진 핏줄 위로 입술연지 자국이 남았다.

나는 만족스러운 낯으로 그 풍경을 쳐다보다가 장난스레 말했다.

“단정한… 태도?”

“네?”

“예의 바름?”

“3황녀 전하께서 그런 걸 좋아하신다고요…?”

수수께끼를 접한 듯 루시페우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레베카 언니가 요즘 들어 이따금, 요즘 애들은…. 그런 소리를 하길래 말이야.”

“…그렇군요.”

루시페우스는 영 모르겠다는 낯을 지었다.

나도 레베카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모른단 말이지.

“에리나의 신성력이 폭발하길래 데려와 봤어. 에리나는 우리의 힘을 크게 타고났거든.”

“에리나의 어미도 그 누이만큼 우리의 축복을 받았고.”

“성녀께 동생이 있으셨다더니….”

달의 신의 이야기도 그렇고, 3황녀의 이야기도 그렇고.

루시페우스는 제가 가진 신성력의 정체가 사뭇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학자의 탑에서 내 신성력에 대해 묻는 걸 보니, 어머니 쪽 혈연에 관해 알아보고 있나 보군. 정말로 내 외조모님이 성녀님과 자매셨던 걸까….’

그래서 레이디 아멜리에게 신성력의 끌림을 느낀 걸까.

한편으론 그리도 성스럽다는 피와, 온 대륙에서 멸시받는 비천한 피가 제 한 몸에 흐른다는 것이 공교롭게 느껴졌다.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은 운명…. 자조감에 마음이 괴로워지려 했다.

평온한 생각, 평온한 생각.

루시페우스는 슬며시 손목을 들어, 장갑과 소맷부리의 틈을 슬며시 비집어 보았다. 제 정인께서 하사하신 그 입술 자국을 눈에 담자 많은 번민이 사그라들었다.

그녀와 함께 찾아온 두 번째 삶.

그러니 제 모든 건, 작은 빛을 위해.

제가 겪은 모든 비참함은, 그 온기를 품에 안기 위해 치른 대가에 불과할 뿐.

평온한 생각, 평온한 생각….

그 자국이 제 소매에 지워지는 것이 싫어 작은 마법을 걸기까지 한 참이었다.

‘평생 지우지 않겠다고 한다면, 소름 끼친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럴 마음이야 만만이었으나 역시 그건 좀 이상할 거였다.

…뭐, 괜찮다.

오늘의 입술 자국이 지워지는 게 아쉽다면, 내일 또 새로운 입술 자국을 하사해달라 조르면 되니까.

제게 그 정도의 권리가 생겼음을 떠올리자, 루시페우스는 심장이 작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행복을 줄게. 한순간이라도 행복하고 싶다며?”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되지 않을까?”

제 기쁨과 슬픔… 아니, 기쁨과 행복에, 그 비루하고 시시한 감정에 당신의 기쁨과 행복을 걸겠다고 하셨다.

그것이 실은 당신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감정임은 평생 모르셔야겠지.

루시페우스는 짧게 자조하며 소맷부리를 정돈했다.

오직 저 하나를 위해 달의 신이 세실리아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숨기듯, 제 작은 행복의 낙인이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그의 맥박 뛰는 곳에 새겨진 행복이 천 조각 아래 은닉되었다.

“루시페우스 경!”

그가 은밀한 기쁨을 숨기며 계단참에서 내려섰을 때.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성가신 목소리가 달려들었다.

“오랜만일세. 이렇게 같이 일을 하게 되고, 참.”

“…오랜만입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암록색 머리칼 아래서 열의에 차 반짝이는 군청색 눈동자. 거기에 비치는 마음이 제 것과 다름을 빤히 알면서도 경계하게 되는 바로 그 인사였다.

“전하께 이야기는 들었지? 내가 비루하지만 재주가 있어서 경을 돕게 되었어.”

“예. 잘 부탁드립니다.”

“혹여 내가 방해되는 것 같으면 나가라고 해도 좋네. 나도 저자들이 무서워서 말이지. 아닌 체해도 우리말을 알아는 듣는 모양이야.”

막심은 부러 어깨 떠는 척을 했다. 그게 제 경계심을 사지 않으려는, 막심 나름의 배려인 듯했다.

그걸 안대서 루시페우스의 경계심이 누그러들 일은 없었지만.

“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예,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늘 태연한 낯으로 저를 바라보는 회색 포니테일의 여기사.

세실리아가 저를 피하는 내내 일로 몇 번 부딪혔기 때문일까. 엘런은 루시페우스가 내심 믿음직하게 여기는 이였다.

“경께서 일전에 경비 결계를 걸어두신 덕에 저희가 꽤나 안심했습니다.”

“제 미천한 재주라도 전하께 쓰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재빨리 엘런과 그녀 뒤의 다른 기사들의 낯을 스쳤다.

‘오늘 회의 때 내 눈 이야기를 했다고 하셨는데….’

그 어디에도, 어린 루시페우스를 겁먹게 했던 멸시의 눈빛 비스름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와 적대할 때조차도 제 비밀을 지켜준 그녀였다. 그런 세실리아가 제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거였다.

그렇게 믿는 것과, 진짜로 그러함을 확인하는 건 별개의 일이었지만….

‘분명 입단속도 시키셨을 테지.’

무감하게 저를 대하는 세실리아의 수하들을 보며, 루시페우스는 심장의 떨림이 조금 더 짙어지는 것만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뵈러 갈까.’

방금 보고 왔음에도 다시 보고 싶다는 감정이 낯선 심장의 운동을 빚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제 삶의 유일한 가치가 된 그녀를 위해 할 일을 해야 했다.

루시페우스는 엘런이 열어주는 문을 통해 특별 구금실로 들어갔다.

적대적인 마력이 넘실거리는 것을 느끼며, 몇 주 전 제가 잡아넣은 마검사들이 갇힌 유치장에 다가섰을 때.

“───!”

“──!”

“────!”

어째서인지, 철창 너머 그들의 낯이 꽤 밝았다.

이게 무슨 조화지? 루시페우스가 이맛살을 찌푸린 순간.

“원류…라고? 마력의 주인…?”

뒤따라 들어온 막심이 영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읊조렸다.

“경이 왔다고 반가워하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