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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72화 (172/220)

172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3)

“우선… 알비누스 소후작이 황실의 비밀을 구실로 내게 부마 자리를 요구했어. 일종의 협박이었지.”

협박이라는 말에 기사들이 술렁였다. 황실의 비밀과 얽힌 일인지라 도미닉과 관련된 일 자체를 극소수의 기사만이 알고 있던 차였다.

“알비누스가 그걸 어찌 알게 됐나 살피다가 입수한 사실이 몇 가지 있어. 우선, 알비누스 후작이 선대 후작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

“네에?”

케인이 제일 깜짝 놀랐다. 근 10년간 알비누스를 담당한 그였으니까.

“내 비밀을 신전에서 유출한 신관이 스스로를 후작의 형이라고 주장해서 알아본 내용이야. 그리고…. 그 신관에게 알비누스 후작이 성녀의 시해를 사주한 정황이 있어.”

“서, 성녀 시해라니….”

“성녀께서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군요?”

“어쩐지, 힐베르크의 비극이 꽤 이상하더라니….”

“그게 가능했던 건.”

기사들이 당황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내뱉는 말소리가 길어져, 내가 주의를 환기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순식간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 형이라는 신관이 빨간 눈이어서야. 후작이 그걸 빌미로 그 신관을 협박한 듯해.”

수도원에 같이 갔던 기사들을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빨간 눈은 사회에 드러나지 않은 존재였다.

리나가 빨간 눈의 마을을 발견하기야 했지만 딱 그 정도. 남대륙 어느 원주민 부족 정도의 거리감이었다.

“우선 알비누스 후작의 혈통을 공론화하기 위해 3황녀 전하께 의회에서 확인해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해. 후작의 정통성 문제를 걸고넘어지면 그가 가주로서 행한 일들을 무효화할 수 있으니까.”

황실 직계이자 고위 신관인 레베카의 참전이 말만으로도 든든한지, 고개를 주억이는 기사들이 낯이 밝았다.

“그리고 그 신관이 빨간 눈의 마을 출신인 것 같거든. 그의 양친이 사망했다지만, 증거가 될 만한 게 있을 수도 있으니 빨간 눈의 마을에 좀 다녀와야겠어. 학자의 탑에서 출장 다녀와 달라는 요청도 있었고.”

“아, 제게 맡기신다는 일이 그럼…?”

내내 잠자코 있던 리나가 반색했다.

“아무래도 한 번 가본 경이 낫겠지? 기사 한 명 골라서 둘이 가. 거기에 식량이 부족하다며.”

리나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가져간 식량이 자꾸만 마기에 오염되는 바람에 고생했다고 했으니,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이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을 거였다.

“크으, 역시 전하께서는 산촌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긍휼하십니다.”

“대신 빨리 가야 해. 이번 달 정무 회의에서 발의하고 한 달 안에는 재판이 열려야 하니까.”

“성심을 다해 재빨리 움직이겠습니다.”

나는 리나의 너스레에 생긋 웃어 보이고는, 다음으로 준비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덧붙여서 당부해둘 말이 있어.”

지금까지 말한 내용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여서, 심장이 콩닥거렸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루시페우스 경 말이지.”

내가 루시페우스의 이름자를 언급하자마자 기사들 모두가 광대를 올리고 눈매를 휘려던 순간.

“그 또한, 빨간 눈이야.”

회의실 여기저기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수도원에서 루시페우스의 눈을 목격한 딜런과 폴만이 태연한 낯일 뿐, 모두가 이 폭탄선언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신관이 빨간 눈인 걸 확인하는 과정에서 딜런과 폴이 알게 됐어.”

수도원에 함께 갔던 알렉스와 리키가 놀라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모두에게 공유하는 거야. 루시페우스 경 본인은 내 사람들에게는 알려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또, 당분간 같이 일하게 될 텐데, 최소한의 신뢰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고, 그리고….”

나는 입술 안쪽을 슬며시 깨물었다가, 내처 말을 뱉었다.

“앞으로 말조심, 행동 조심. 알지?”

얼어붙었던 기사들의 낯은, 조금의 시차를 두고서 장난스레 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루시페우스를 배려해서 덧붙인 걸 다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앞에서 빨간 눈에 관해 말실수하지 말라는 소리니까.

예에, 뭐.

전하께서 그리 당부하신다면야.

신경 써 드려야지요.

기사들의 너스레가 이어지며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이쯤은 놀리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잘 넘어갔어. 한참 놀릴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재빨리 엘런에게 말했다.

“그리고 구금해둔 마검사들 말이야. 루시페우스 경이 만나보기로 했어. 이따 온다고 했으니….”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 대답하는 엘런의 입가에도 헛헛한 웃음이 배었다.

그래, 다들 엘런처럼만 반응하면 더 좋을 텐데….

“혹시 얘기가 잘되면, 그가 마검사를 몇 풀어주자고 할 수도 있어.”

“네? 어째서요?”

“일종의 미끼로. 그가 마검사들이 체류 중인 건물을 감시 중이었잖아. 이동 마법을 쓰는 건 아니지만 황성을 드나드는 인상을 받았대.”

“네, 알겠습니다. 그분께서 마검사의 추적에 능하시니 옳은 판단이겠죠.”

그때, 잠자코 있던 막심이 끼어들었다.

“그럼 제가 통역으로 도우면 어떨까요?”

“그리해줄래? 그게, 경의 심문이 지지부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쓰는 마도 기계에 관해 같은 마법사로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고 해서…. 알지?”

“저야 전하의 판단을 따를 뿐이죠.”

제가 하던 일을 뺏은 걸로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스레 하는 말에 막심이 씨익 웃었다.

그래, 막심은 다른 기사들보다는 나와 그렇게까지 격의 없지 않고, 또 문관이라 점잖게 굴기도 하고.

“그가 저를 경계하여 쌀쌀맞게 굴긴 하지만, 전하에 대한 충성심으로 다 감내해 보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훌쩍이는 시늉.

아, 얘 알렉스한테 물들었었지….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때, 엘런이 물었다.

“그러면, 빨간 눈의 마을에 대해서 그분도 알고 계시나요?”

“…아니, 아직. 학자의 탑에서 가설 단계라 외부인에게 노출하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렇지만 학자의 탑에서 발표하기 전에 말은 꺼내놔야 할 것 같은데, 그 신관을 본 것만으로도 좀 혼란스러워해서 말이지….”

결국에는 루시페우스에 대한 걱정으로 들렸는지, 기사들의 낯이 흐물흐물해지고 말았다.

“그러면 말입니다.”

케인이 또, 암조 기사들을 대표하여 묻는다는 듯 다른 기사들을 한번 훑어보며 말했다.

“그래서, 겨울에 저희 다 휴가 주시고서 국혼을 준비하시는 겁니까?”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딴 길로 새기 금지! 나는 책상을 탕탕 치며 다시 업무 이야기로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그런다고 해서 빨개진 낯이 화나서 그런 걸로 보이진 않겠지만….

“경!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기나긴 회의를 마치고 수선화궁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문에서 바로 보이는 창가에 루시페우스가 서 있었다.

나는 반가운 낯을 숨기지 않은 채 잰걸음으로 걸어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나와 닿자마자 뻣뻣하게 굳은 루시페우스는, 이내 한숨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내 어깨를 마주 안았다. 타인과 접촉할 수 없는 이 남자는 번번이 스킨십에 어색하게 굴었다.

그게 안쓰러우면서도 뿌듯해,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그 단단한 가슴팍에 볼을 묻었다.

“하아, 좀 치유되는 것 같네.”

“치유…요?”

내 무방비한 중얼거림에 루시페우스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아, 아니.”

그가 내 낯을 살피려는 듯 어깨를 잡았을 때.

“마음 말이야.”

“마음…?”

썩 와닿지 않는 표현인지, 루시페우스는 내 말을 느릿하게 곱씹었다.

나는 투정 부리듯 말했다.

“오늘 암조 기사들한테 엄청 놀림받았거든.”

“기사들이, 전하를요?”

“예전부터 걔들이 얼마나 날 놀렸는 줄 알아?”

“…전하께서 아무리 그들과 격의 없이 지내신다지만….”

감히 누구를…. 루시페우스의 목소리가 싸늘하게도 울렸다.

내가 징징댄 소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쿡쿡 웃으며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리자, 잘은 주름이 진 그의 미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내가 예전부터 경이 레이디 아멜리 따라다니는 거니까 주의해야 한다고 했거든.”

크흡.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루시페우스는 사레들린 소리를 냈다.

“왜, 경이 알제니아 가든파티 때 그랬잖아. 레이디 아멜리 연모하는 것 맞다고. 그래서 내가 근거 있는 소리라고 했지.”

“…예. 제가 그랬었죠.”

“그러고도 번번이 연모하는 레이디라고도….”

“그렇군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웃음기 밴 사과가 이어졌다.

“그래서, 전하의 기사들이 예전부터 뭐라고 놀렸던가요?”

“뭐어, 걔들은 계속 경을 나랑 엮었으니까, 나 답답하다고….”

윽, 말하면서도 창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루시페우스의 태도는 늘 착각할 것 하나 없었는데….

나는 숫제 웅얼거리며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전하의 기사들이 꽤 눈이 밝군요. 레이디 작은 별께서는 잔인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셨는데 말입니다.”

“그, 그러니까 왜 그때….”

장단을 맞춰주고 그랬어…. 내가 생각해도 옹졸한 투정이라 나는 제대로 말을 맺을 수 없었다.

하릴없이 그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꾹 주며 얼굴을 더욱 깊이 파묻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그 가슴팍이 기분 좋게 울렸다.

루시페우스의 손끝이 달래듯 내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내리기 시작했을 무렵.

“저야, 제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잖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한숨처럼 울렸다.

“그땐 그냥, 죽기 전에 저번 삶보다는 나았다고 꺼내 볼 추억으로 묻어두려고 했지요.”

혹여 쓸쓸한 낯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낯을 살폈다. 다행히도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걸린 건 은은한 미소였다.

“하지만 이번 삶에는 추억할 것이 많으니, 주마등도 훨씬 길지 않을까요.”

“죽는 얘긴 하지 말라니깐.”

“…실언했습니다.”

내가 투덜거리자 루시페우스가 작게 웃으며 내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전하께서 아직 언제까지 살라고 명하신 바도 없는데, 제가 주제넘었군요.”

“그런 소리도 하지 말고.”

언제 죽으라고 명하라니, 날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나는 밉살스레 눈을 흘기며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내 머리칼을 그러쥐었던 손이 아쉽다는 듯 떨어졌다.

“마검사들 말인데. 엘런 경에게 얘기해 뒀으니 아무 때나 오면 된대. 그리고 막심 경이 통역을 돕겠다던데….”

말끝을 늘이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쉽게도 거절할 명분이 없군요.”

루시페우스의 낯이 떨떠름하게 굳어 있었다. 막심이 서대륙에서 유학하지만 않았더라도 대번에 거절했을 기세였다.

나는 기분 풀라는 듯 그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마검사 몇을 미끼로 풀어줄 거라면 엘런하고 상의하면 되고.”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란 소린 아닌 거 알지?”

그리 말하며 나는 다시 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이번에도 작게 놀란 남자는 이내 안심한 듯 웃으며 내 어깨를 안았다.

그가 창턱에 걸터앉자 겹쳐진 몸이 기울어져, 나는 그에게 온전히 기대게 되었다.

속절없이 심장이 간질거렸다. 단단한 품이 편안했고, 그가 등진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오후의 햇볕이 따사롭고….

“정말, 정말 꿈 같네요….”

루시페우스의 중얼거림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제가 전하와 감히 이렇게 맞닿을 때마다 느끼는 안도감을, 전하께서도 느끼신다는 게.”

그러니까, 아까 내가 치유 운운한 것을 돌이키는 모양이었다.

“행복하다는 거지?”

“…예.”

그의 대꾸가 한 박자 늦었지만, 그 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번번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낯설게 씹곤 했으니까.

믿을 것은 우리가 이렇게 연결돼 있다는 감각, 서로 마음이 통해 있다는 안도감.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노곤노곤해졌다. 나는 그에게 매달린 그대로 웅얼대듯 생각난 말을 꺼냈다.

“렌틸 자작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말이야. 혹시… 경의 신성력이 신전의 기록과 다른 바가 있냐고 묻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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