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2)
“또? 인명 피해는 없었고?”
“네, 마침 저희가 근처를 지나던 중이라 다행이었죠. 경비대에서 출동했기에 인계하고 온 참입니다.”
“그땐 태양제 기간이라 사람이 많았는데, 그래도 오늘은.”
“예. 평일이라 유동 인구가 적어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이번엔 또 어디서 마기가 풍긴 건지….”
알렉스가 3소대들이 모인 쪽의 자리에 앉으며 주절대었다.
일전에 내가 날뛰는 말에 다칠 뻔했을 때는 알비누스 상단 건물에 마기에 잠식된 베라초가 보관된 탓에, 인간보다 마기에 더 예민한 말들이 날뛴 거라고 짐작했으니까.
이번에도 마기에 잠식된 무언가가 근처에 있었던 걸까?
혹시 또 알비누스 상단 건물에…?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알렉스가 의미심장한 낯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알아보겠다는 의미였다.
‘역시 십여 년 발닦개. 척하면 착이지.’
이제 정말로 모두가 다 모였겠다. 나는 다시금 기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말을 꺼냈다.
“이번 달, 정말 중요한 거 알지?”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저마다 목소리를 내거나 끄덕임으로써 답하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그간 경들이 수고해준 덕분에 게이블스 문제는 올가을 안에 아름답게 마무리될 거야. 하지만 무슨 변수가 터질지 모르니, 조금만 더 신경 써줘. 연말에 포상 휴가 길게들 줄게.”
세르니타에 다녀온 이후로 내가 종종 언급하는 포상 휴가에, 기사들의 낯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십여 년 전 내 호위 소대의 수련생으로 들어오고부터 쉬지 않고 내 곁을 지킨 이들이었다. 간단한 휴가야 종종 다녀왔지만, 기사로 서임받은 이후 근 10년간 각자 맡은 가문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못해 다들 피로할 거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잘 끝내고 나면, 앞으로 암조를 어떻게 굴릴지 그레이스랑 새로 상의해 봐야겠지. 내 직책도 달라질 수 있으니, 나도 신년 정무 회의 때까지 쉬고….’
그러면 정말로, 루시페우스랑 어디로든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동대륙도 좋고, 하사받아 놓고 한 번도 다녀오지 못한 내 영지, 메르제령도 좋을 거였다.
‘어디든 루시페우스랑 같이 가면 다 괜찮을 테니까.’
세실리아의 유리 몸으로 태어나고서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
막간의 망상에 빠져 있는데, 문득 시야에 걸린 기사들의 낯이 이상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던 그들은 내 낯에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다 알아차린 듯했다.
보기 좋습니다요.
결국 이러실 거였으면서….
그땐 진짜 답답했는데.
우리 전하, 이제 행복만 하시면 되고….
그러니까, 다들 놀려먹을 생각 만만인 표정이었다.
“뭐, 뭐야? 집중하자, 집중.”
흠흠! 집중하지 못한 건 나였으면서, 나는 기사들을 타박하듯 헛기침을 했다.
민망함을 수습하기 위해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로니 경, 리나 경. 프렘린은 어땠어?”
“프렘린 따위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정례 회의니까 어쩔 수 없지.”
문제는 그게 예전부터 나를 답답해한 리나와 그림자로서 나를 놀리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로니라는 거지만….
두 기사가 느물대는 말소리에 회의장 곳곳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났다.
너네, 내가 전생 현대인인 걸 정말 감사히 여기렴….
“그래서, 프렘린에선 아무런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하려는 건 아니겠지, 우리 유능한 리나 경, 로니 경?”
리나는 로니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제가 십여 년 만에 고향과도 같은 곳에 다녀온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감회가 새로웠어?”
“예. 임무만 아니었으면 변장 안 하고 가서 예전에 저 예뻐해주시던 분들께 인사드리고 오는 건데 말입니다.”
리나는 그간 신문 배달부인 척하며 프렘린 사용인들과 친분을 쌓은 로니의 소개로, 하녀로 위장 취업하여 잠입했다고 했다. 급료에 홀려서 왔다가 귀족들 등쌀에 도망치는 이가 종종 있는지라 빠져나오기도 쉬웠다.
“이번 일들 잘 해결되면 그때 예쁨받은 만큼 되돌려줄 수 있을 거야.”
“제가 그 맛에 전하께 충성합니다.”
프렘린 기사단에서 지낼 때 평민이라서, 또 여자라서 구박받았던 리나는 계속하여 반어법으로 빙글거렸다.
“그래서, 알아본 건?”
“음…. 집사장이 바뀌었더라고요.”
“집사장이라.”
“원래 집사장이 젊을 때 상단 거리 이곳저곳에서 일해서 잔뼈가 굵은 아재거든요. 예전에 프렘린에서 상단을 만들겠다고 데려와놓고 상단을 못 여는 바람에 집사가 된 자입니다.”
“제가 프렘린을 맡게 됐을 땐 이미 집사 일을 하고 있어서, 저는 그런 내력을 몰랐으니까요. 그가 지난달부터 후임에게 집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한직으로 물러난 참이었습니다. 퇴직한 게 아니라 의아했더랬죠.”
리나의 말에 로니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난달이면 루시페우스가 알비누스를 떠나면서 귀족파의 양상이 변모하기 시작한 때였다.
표면적으로 수정 투자를 대대적으로 유치하면서, 상단 거리의 생리에 밝은 인물을 움직인다라….
“높은 확률로 그자가 유통책을 맡아, 상단 거리의 인맥을 활용하는 거겠군.”
내 정리에 리나와 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상단 쪽이 걸리네. 로니 경이 3소대랑 공조해서 그자의 근황을 한번 알아봐 줘.”
“저는 괜찮습니까?”
리나가 당황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프렘린을 물먹일 기회라 생각하여 후속 업무를 기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응, 리나 경은 따로 맡길 일이 있을 것 같아. 알비누스 상단 쪽은, 상단주 대리에게 휴가를 줬댔지?”
에스메르를 담당하는 마르탱이 즉각 답했다.
“네. 루시페우스 경께서 알비누스를 나오신 이후로 보이지 않는 게, 해고된 거나 매한가지인 모양입니다.”
“알비누스 부자가 직접 상단 일을 돌본다더니….”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간 뜸을 들였다.
루시페우스가 내게 귀족파의 일에 관해 이야기해준 건 정말 많았다.
조만간 렌틸 자작이 고발할 내용에 관해서도 구체적인 사항을 보충해 주기까지 했다.
말인즉슨, 암조의 기사들이 근 10년간 수집해도 부족했던 부분을, 루시페우스를 통해 손쉽게 채운 셈이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 이 자리를 빌려 경들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어.”
나는 양손을 책상 위로 차분하게 모으며 고쳐 앉았다.
“올해 정말 다들 바빴지? 오월제 준비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월이네.”
내 어조가 의미심장했는지, 기사들 모두가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올해… 아니, 서임받고 나서 지금까지, 모두 낯선 일 한다고 수고 많았어.”
거기까지 말한 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이 모든 건 오늘 내 기사들에게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를 위한 서론이었다. 생각으로도 창피하여 머릿속으로조차 빚지 못한 말을 꺼내기 위해서.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내 부하들이니까.
나는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재빨리 내뱉었다.
“그, 내 사생활 때문에 경들이 고생 많았지….”
크흡, 곳곳에서 웃음 삼키는 소리가 났다.
데릭이나 리나 같은 까불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케인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깃들었다. 심지어는 엘런마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앙다무는 게 다 보였다.
나는 용기가 사그라들세라,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올해 최고로 경계해야 할 인물이라고 해놓고 이렇게 돼서 나도 참 멋쩍은데. 아무튼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어.”
내 말에 주어는 없었지만 그게 누굴 지칭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을 거였다.
얘들이 오죽 나를 많이 놀렸고, 한편으로는 오죽 본 게 많았어야지….
“덕분에 경들이 접근하지 못한 정보를 얻었지만… 경들이 그간 애써주지 않았으면 그 마지막 퍼즐을 끼워 맞출 바탕은 없었던 것 알지? 혹여 경들이 김샐까 봐서 노파심에….”
“에이, 뭡니까?”
갑자기 케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다른 기사들과 눈빛을 주고받는 게, 암조 기사의 대표로 이야기한다는 투인 듯했다.
“저희는 전하께서 열애 사실 인정, 뭐 그런 거 하실 줄 알았는데.”
“엥?”
내가 눈은 동그랗게 뜨고서 사위를 둘러보자, 기사들 모두가 케인의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가 말을 받았다.
“예에, 서운합니다. 저희를 뭐, 밥그릇 다툼할 놈들로 보셨나요?”
“저희야 뭐든 시키시는 대로 따르기로 한 자들 아닙니까. 저희 기사 서임받을 때마다 불러서 충성심 시험하셨잖아요. 그때 확인하신 거 아니었어요?”
심지어 엘런이 저답잖게 길게 대꾸했고.
“전하께서 새침한 미모에 이런 당연한 일에 마음 쓰시는 인덕마저 갖추셨으니 제가 충성하는 거지만요.”
리나의 너스레에 다른 기사들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예상외로 호의적인 기사들의 반응에 안심하고 만 나는….
“어라?”
“전하, 우세요?”
“야, 쉿!”
…눈시울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멋쩍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꺼내느라 긴장했던 게 풀린 탓이었다.
얘들이 쓸데없이 감동 주네….
“아, 아니거든!”
“조심해. 잘못하면 우리 그분께.”
로니가 제 단짝인 페터를 향해 목 긋는 시늉을 했다.
그걸 보며 기사들이 왁자하게 웃는 사이, 나는 재빨리 눈을 깜빡여 시큰거리는 눈시울을 진정했다.
십몇 년 주군 위엄 다 사라지겠네….
“아무튼, 저희 따돌렸다고 서운해하지 않으니까요. 별걱정을 다하셔.”
“그분이 저희 타깃이었던 만큼 더 많은 정보를 쥐신 게 당연하잖습니까.”
“사적으로 더 가까운 사이시잖아요. 필요한 내용이면 저희한테 다 공유해주실 거면서요.”
“그, 그래….”
세 소대장이 한마디씩 안심시킨답시고 보태는 말에 나는 얼굴이 홧홧해지고 말았다.
내가 이들을 믿는 만큼, 이들도 나를 믿은 세월이 깊디깊은 거였는데….
‘내가 또 못 믿었나? 그래도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긴 했으니까….’
나는 쑥스러운 마음을 다독이면서 찻잔을 홀짝였다. 내 마음을 북돋기 위함인지 헨리에테가 어느새 초콜릿 조각과 작은 손수건을 옆에 올려두었다.
나도, 기사들도, 분위기도 적당히 잠잠해졌을 때.
“그것도 그렇고, 요 얼마간 안팎에서 일이 많았어. 경들하고 너무 늦게 공유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주군께서 저희를 쓰시는 거지, 저희의 허락을 구하실 일이 아니잖습니까.”
최연장자인 엘런이 마무리하듯 힘주어 말했다. 더는 양해 구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나는 그녀에게 생긋 웃어 보인 뒤,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선, 수정의 용도야. 단순히 인위적인 격랑에 대비해 수정을 쟁여두거나 수정 값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정을 마기에 잠식시켜서 그걸 활용해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려던 거래.”
“수정을 마기에 잠식시켜서요?”
“그게 가능한가요?”
“그러게 말이야. 지금도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서 수정이 숙성되고 있다고 하네.”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에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그것만 있다면 그분이 아니라도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영향을 끼치는 건가요?”
“아니, 그만큼 마력을 크게 지닌 사람이 없으니까. 마탑의 마법사 여럿 정도가 합심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다면 오늘 말들이 날뛴 건, 마기에 오염된 수정 때문일까요?”
“글쎄….”
알렉스의 물음에 나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서 숙성 중인 것들은 아직 불안정해서 아무도 움직일 수 없다고 했으니, 뭔가를 한다면 이번에 새로 사들인 수정을 갖고 하는 걸 텐데. 한번 물어볼게.”
누구에게 물으려는 건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들 같은 이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눈매들이 묘하게 휘어지는 게 말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할까 해.”
그리 말하며 나는 알렉스의 뒤편에 앉은 딜런과 폴에게 시선을 던졌다. 두 기사는 올 것이 왔다는 듯 긴장한 낯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