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70화 (170/220)

170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1)

본대륙의 기하학적 중심이 되는 위치에 자리한 학자의 탑.

자신의 두뇌 활동을 인류에 바치기로 서약한 대륙의 석학들이 모여 사는 곳.

어느 늦은 오후, 탑의 대회의실이 인사를 나누는 소리로 가득 찼다. 식사 때조차 연구실을 나서는 법이 없는 탑의 구성원들은 회의가 있을 때에야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오늘도 닥터 안네마리 건인가?”

“요즘 탑이 그야말로 변곡점 위에 서 있는 것 같아. 거대한 전환점을 목도하는 기분이라고.”

“오백 년간 견지한 정치 중립성을 저버리는 걸로 보일까 봐 걱정은 되네만….”

“탑의 지식이 대륙을 위해 쓰이는 것에는 변함이 없잖나. 본대륙의 패자(霸者)가 황실이니 당연한 귀결이지.”

다분히 현학적인 웅성거림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오늘의 자리를 청한 정치사회학 분과 간부 안네마리는 근래 학자의 탑이 보이는 이례적인 행보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속세명 안네마리 게이블스. 탑에서의 업적으로 하사받은 작위명 렌틸 자작.

그녀는 탑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명문가 출신의 학자가 그녀만은 아니니 태생 때문은 아니었다. 하물며 그녀는 탑에 들어오기 위해 형식적으로 출가한 게 아니라 정말로 가문과 절연한 터라, 게이블스의 위세가 탑에 조금의 보탬도 될 수 없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지금의 입지를 선사한 건 탑에 들어온 이후의 행보.

30년 전 작위를 받으며 황실 직계의 교육을 담당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황태자가 육성하는 4황녀가 다 장성하도록 사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귀족파의 거두인 게이블스에서 현실 정치의 감각을 익힌 데다 현재는 황실과의 연결 고리가 되니, 학자의 탑은 대외 활동을 안네마리에게 모두 맡긴 차였다.

그래서 탑에 전례가 없던, 그녀가 원가문의 권리를 회복하는 일을 탑 차원에서 지지하기까지 하는 참이었다. 법리 해석이 필요하다며 판단을 유보하는 척할지언정.

한데 오늘 그녀가 제안한 안건은 탑의 식구들을 당황케 했다.

“그러니까 지금… 473년의 가설 4호를, 원로원에서 공개하자는 말씀이신가요?”

473년의 가설 4호. 성녀가 일찍 환속한 탓에 지난번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의 규모가 평소보다 컸으며, 성녀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대륙의 균형이 깨졌다는 가설이었다.

“그렇습니다.”

“준입증 단계가 아니라 미입증 단계인 가설을 말하는 게 맞지요?”

회의를 주관하는 간부, 켄투스의 물음에 안네마리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에 회의장이 크게 술렁였다.

또 관례를 깨자는 건가?

닥터 안네마리가 탑에 해가 될 제안을 하진 않겠지만….

켄투스의 당황한 시선이 탑주에게로 향했다. 상석에 앉은 탑주는 눈만 내리깐 채 미동도 없었다. 안건에 관해 미리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학자의 탑은 지식으로써 인류에 이바지하는 곳. 불확실한 것이 탑의 담장을 넘어가는 일은 엄금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 전에 논하다가 증명을 미룬 가설을 공개하자니.

그것도 제국의 원로원 의회에서.

“미입증 단계의 가설을 외부에 발표하는 건 탑의 위신에 해가 될 수 있소.”

한 학자의 조심스러운 말에, 안네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 가설이 미입증에 머무른 건 몇백 년 뒤에나 완벽히 검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녀의 탄생 주기가 거의 한 세기에 달하니까요.”

“연구가 오래 걸리는 것이 미입증 가설을 외부에 노출해도 된다는 핑계가 되지 않소.”

“하지만 우리가 우선순위에 둬야 할 것은 탑의 지고한 가치입니다. 인류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 말이죠.”

안네마리의 호박색 눈동자가 원형으로 된 회의장에 자리한 동료들을 훑었다.

“주지하다시피 6대 성녀에겐 인위적으로 살해된 정황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설은 성녀의 부재 탓에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불안정해져 인류가 위협받는다는 거고요. 그 흉수가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요.”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안네마리는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다음 격랑이 도래하려면 수십 년이 남았지만, 우리는 현재 할 수 있는 대비를 해야 합니다. 매해 마기를 정화하러 파견 가는 성기사단처럼 말이지요.”

강경한 발언에 학자들이 모두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들도 논리적으로 안네마리의 의견이 옳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500년간 이어진 관행을 번번이 깨는 것에는 저항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저….”

그때, 내내 침묵을 지키던 중년 남성이 손을 들었다. 사회과학 분과의 간부, 필리프였다.

백몇십 개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실은 그와 관련해서 제게 공유하지 않은 추측이 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몇 가지 정황을 끼워 맞춘 거지만요.”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한단 말이오?”

켄투스의 타박에 필리프가 난처한 듯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그저 흘러갈 일이라 생각해 공유의 원칙을 잊었습니다.”

공유의 원칙. 탑의 구성원은 자신의 연구 내용을 모두와 투명하게 공유한다. 혼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영역에 다른 전공 학자들의 관점이 더해지면 정교한 추론이 되니까.

세실리아가 암조 기사들 사이에 비밀이 없게 한 것이 여기서 영감을 받은 거였다.

손바닥에 밴 땀을 닦듯 제 허벅지를 쓸며 필리프가 말을 이었다.

“저는 6대 성녀께서 이전의 성녀들보다 신성력을 적게 타고나신 데 주목했습니다. 성녀께는 동생이 있으셨거든요.”

그랬나? 학자들이 각자의 기억을 돌이키며 수군거렸다.

성녀가 살아 있다면 거의 일흔에 가까운 나이일 터. 그런 만큼 그녀가 교단에서 활동하던 때를 기억하는 이는 모두 탑에서 은퇴한 지 오래였다.

신전에서 자란 성녀의 유년 시절을 아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성녀의 신상에 관한 것은 심지어 교단의 비밀로 관리되기까지 했다.

그러니 성녀의 형제 관계 역시, 알려진 바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쌍둥이 동생으로, 신탁이 예비한 때 태어나신 두 분 중 신성력 보유량으로 성녀가 가려졌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신성력이 떨어졌대도, 성녀의 동생이라면….”

“네. 교황급은 거뜬하지요. 그래서 성녀의 부재에도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아주 불안정해지지 않은 것이 동생분의 신성력 덕분일까 생각했거든요.”

“닥터는 그분의 존재를 어찌 아시오?”

한 학자가 재빨리 물었다. 기실 장내의 모두가 궁금해하던 내용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마을에 성녀님 대신 동생분이 오셨기에 알고 있습니다.”

“성녀의 순례 때 동생분이 대신? 닥터가….”

“제가 아로카트령 출신이죠. 도움이 더 필요한 곳에 성녀께서 가셔야 한다며 동생분이 대신 오셨던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빨간 눈의 마을에 가셨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학자들 사이에 다시금 탄식이 이어졌다.

올봄, 돌아올 수 없는 바다로부터 사흘 거리에 민가가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학자의 탑이 발칵 뒤집힌 참이었다. 500년 전 아수라마수라의 시조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닫은 이래, 그 근방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으로는 최초의 발견이었으니까.

게다가 빨간 눈의 돌연변이 형질이 그곳에 많이 나타난다니. 그들을 두고 악마의 자식 운운하는 미신을 타파할 수도 있어 그 발표가 기대되는 참이었다.

“그렇다면 교단에서도 빨간 눈의 마을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거겠군.”

한 학자의 읊조림에 장내가 숙연해졌다.

학자의 탑에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공개하지 않듯, 교단에서도 교단의 신비를 숨기는 법이었다.

하지만 빨간 눈을 지닌 자들이 비논리적인 이유로 배척당하는 걸 생각하면 교단의 처사가 아쉬울 따름이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질 무렵. 필리프가 발언을 이었다.

“그런데, 그 동생분 역시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더군요. 그래서 제 추측이 틀렸다고 생각해 공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그분께 후손이라도 있으시다면…. 신성력은 유전되는 거니까요.”

“자식을 보시긴 했습니다만, 제가 알아봤을 때는 이미 그 따님 역시 돌아가신 뒤여서….”

거기까지 말한 필리프의 눈동자가 안네마리를 향했다.

“그분의 따님은 알비누스 선대 후작의 혼외자로 입적되었습니다. 성녀의 동생분께서 산고로 돌아가신 바람에 혼인하지 못하셔서 말이죠.”

알비누스라? 안네마리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선대 후작의 혼외자, 즉 현 후작의 이복누이라면 필시 그 영식의….

그때, 다른 학자가 물었다.

“그 동생분께서 성녀가 타고날 신성력을 나눠 가진 탓에 성녀의 부재에도 대륙의 균형이 이만큼이나마 유지됐다는 추측이었습니까?”

“네. 성녀님의 아드님들께는 신성력이 제대로 유전되지 않았으니 그쪽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기존 성녀들의 신성력을 100으로 쳤을 때, 6대 성녀께서 타고나신 60의 신성력이 사라졌지만, 동생분 쪽에 남은 나머지 40 덕에 대륙의 균형이 유지되지 않았나…. 뭐, 그런 논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성녀의 부재가 불러오는 피해는 지금의 불안정보다 훨씬 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녀의 시해를 사주한 귀족파의 죄가 실제보다 더 무겁다는 거였다.

“한데 그 따님께서 자식을 남기긴 했습니다만 그 영식의 신성력이 주목할 만한 수준이 아니더군요.”

안네마리는 그 영식이, 제 고귀하신 제자를 전심으로 돕는 눈먼 청년임을 알았다.

“하여 제 추측이 아예 틀렸겠거니 했습니다. 성녀가 타고나야 할 신성력이 둘로 나뉜 게 아니라, 애초부터 이번 세대를 위해 예비된 신성력이 적었던 것으로요.”

“하지만 성녀의 아드님들도 신성력을 그리 많이 타고나지는 않았잖소. 그 영식의 신성력으로 동생분의 신성력을 판단할 수 없소.”

“…예,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때, 켄투스가 상황을 정리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를 울렸다.

“그럼 우선, 교단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군요. 성녀의 동생분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는지, 그 핏줄의 세례 결과가 정확히 어찌 기록돼 있는지.”

그 내용을 확인할 때까지 결정을 미루자는 거였다.

‘하지만 그는 마법을 쓰는데. 마력이 발달했다면 정말로 신성력에 재능이 없을지도….’

그리 생각하던 안네마리의 뇌리에, 이따금 학자의 탑 서고를 이용하러 오는 4황녀의 보좌관 막심 블라우베르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신성력과 마력 모두를 강하게 발현한 경우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십니다.”

청년은 이따금 자료를 어떤 방향으로 찾아봐야 할지 조언을 구하곤 했다. 제가 4황녀의 은사이며 공모 중인 일이 있으니 임무의 내용을 노출해도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저 제자님께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구나 하고 지나갔건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영식이 신성력마저 많이 타고나서 그런 걸 알아보셨던 건가.’

대신전으로부터 요청한 자료가 올 때까지 회의는 미뤄지겠으나, 안네마리는 제가 승기를 잡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좋습니다. 대신전에서 회신이 오는 대로 회의를 속행하지요. 그 영식이 크나큰 신성력을 타고났다면, 어쩌면 성녀의 이른 죽음에도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간신히 안정돼 있는 이유라 할 수 있겠군요.”

그리고, 이걸 빌미로 남자는 황실로부터 어떤 특혜를 받을 수 있겠지.

안네마리는 제자께 작은 선물을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저만 아는 웃음을 지었다.

“자, 이렇게 모두가 모인 건 오랜만이지?”

10월의 첫날 열린 암조 정례 회의.

나는 수선화궁의 회의실에 모인 내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올해를 위해, 또 쓸모 있는 세실이 되기 위해 십여 년 전부터 키운 내 사람들.

‘처음에는 케인을 포섭하고 나 대신 궁 밖을 오갈 이들을 섭외하려고 한 건데 말이야.’

오늘 할 이야기에 대한 긴장감을 다독이기 위해, 나는 기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한결같이 듬직한 케인, 늘 그렇듯 심드렁한 표정의 엘런, 그리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벌컥, 문이 열리며 알렉스와 마르탱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어휴, 에스메르에서 오는데 갑자기 말들이 또 난리여서요.”

“말들이?”

“예, 일전에 마차 보관소에서 말들이 날뛴 적이 있잖아요? 그게 또 그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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