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68화 (168/220)

168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15)

도미닉을 내려다보는 루시페우스의 낯은 차갑게 빛났다.

아이고, 누구 남잔지 잘생기기도 잘….

‘벼, 별생각을 다 해.’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에 주책맞은 생각이 날뛰었다.

“네, 네, 네, 네놈이 여기 어떻게…!”

“형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을 들으니 형제의 정으로 달려와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새끼가…!”

제 등 뒤를 올려다보는 도미닉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 분명히 모르신다고…!”

“내가? 난 그런 적 없는데?”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나는 진실만을 말했다. 제가 듣고 싶은 대로 들었을 뿐이지.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미닉이 앉은 소파 옆의 협탁에 걸터앉자 그의 낯짝이 내 시선 아래에 놓였다.

도미닉은 등 뒤의 루시페우스와 옆의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온 얼굴로 씨근덕거렸다.

“내가 한 말은, 들어주겠다는 말밖에 없었어.”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를 바라보자, 그가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끔 결계를 쳤다는 의미였다.

“널 부마로 들이지 않으면, 내가 신성력이 없다고 귀족 사회에 소문이라도 내겠다는 거였지?”

내가 여상한 목소리로 읊은 말에 도미닉이 눈을 부릅떴다.

“네가 하려던 그 협박. 어디 한번 네 입으로 지껄여 보라고.”

나는 최대한 차가운 낯으로, 내 목소리가 선득하게 울리길 바라며 말했다. 내리깐 시선 아래서 도미닉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익…! 그러니까, 연놈들이 붙어먹어서는…!”

“연놈?”

그의 저렴한 단어 선택에 나는 피식 웃었다. 화조차 나지 않았다.

“수준하고는.”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풍경이 그려지고 있을지 안 봐도 선했다.

하지만.

“…컥!”

도미닉은 그대로 목이 쳐들려 강제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목을 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글렌치아 연회 때 윌로우 놈도 이렇게 당했었지.’

루시페우스가 마법으로 그의 목을 틀어쥔 거였다.

그땐 그저 무섭기만 했는데, 저 비현실적인 힘이 내 편이라는 사실이 이젠 믿음직했다.

“말이 참, 번번이 심하십니다.”

루시페우스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흘끗 본 그의 낯에 이렇다 할 미동은 없었지만, 그의 눈빛에 들어찬 건 순전한 분노였다.

“윽, 끄윽…!”

어느새 도미닉은 까치발로 간신히 바닥을 디디게 되었다. 그 팔은 상체에 붙어 옴짝달싹 못 했다.

루시페우스가 짧은 순간 이동으로 도미닉의 앞에 바싹 다가서자, 마치 그의 멱살을 잡은 듯한 간격이 되었다.

“끅, 너, 이, 악마, 의… 새끼…!”

목이 졸린 지 오래인 도미닉은 간신히 토막 난 말만을 내뱉을 따름이었다. 핏발 선 눈이 희번덕 돌아 내게로 향하더니.

“이, 저주, 받은… 것이…!”

“그것도 협박인가? 내게 루시페우스 경이 빨간 눈인 걸 알리겠다는 협박?”

“…흐억!”

괴성과 함께 도미닉의 동공이 크게 수축했다. 내가 루시페우스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기색이었다.

“협박은 알비누스의 내력인가 봐. 경의 아비는 무고한 이복형을 협박했다 하고.”

“그, 그…!”

“아, 알비누스의 내력은 아닌가? 후작의 아버지는 알비누스가 아니니 말이야.”

나는 숫제 생글거리기 시작했다. 도미닉의 눈동자가 루시페우스와 내 사이를 바쁘게도 움직였다.

불쌍하기도 하지.

목이 잔뜩 졸린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협은 눈을 부라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는 내내 루시페우스는 서늘한 분노를 담은 눈동자를 그저 도미닉에게만 붙박아 두었다. 험한 눈빛은 내 근처를 스치지도 않으려는 다정함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 신뢰에 심장이 간질거린다고 느꼈을 때.

“경, 난 이 정도면 됐어.”

나는 걸음을 옮겨 두 남자로부터 조금 멀어졌다.

“이제 경이 하고 싶은 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전하께 험한 꼴을 보일 겁니다.”

나는 그가 후작가의 멸절마저 상상하는 사람임을 떠올리며 난처하게 웃었다.

“경의 방식대로 처리하고 싶어 했잖아. 여기가 프리지어궁인 건 경이 감안할 테고.”

“…분부대로요.”

나를 흘끗 바라보는 루시페우스의 낯에는 굉장히 많은 감정을 억누른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금 코앞의 도미닉에게로 향한 그의 얼굴엔 내게 간신히 보였던 미소 비스름한 것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루시페우스의 장갑을 낀 손이 도미닉의 얼굴 바로 위에 놓였을 때.

“으, 흐, 흐어어…!”

어느새 벌어진 도미닉의 입 사이로 그의 혀가 삐죽 튀어나왔다. 잔뜩 목 졸린 상태에서 혀가 내밀리자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 같았다.

도미닉은 안간힘을 다해 루시페우스의 손을 노려보았다.

“지금부터 너에게 금제를 건다.”

“커어억!”

루시페우스가 마력을 썼는지, 한껏 흔들리던 도미닉의 눈동자가 루시페우스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고정되었다.

“4황녀 전하의 신상에 관해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

“허, 커억…!”

목구멍이 막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헤벌려진 도미닉의 입가에서 침이 흘렀다.

“그리고 나와 신관 킬리온의 혈통과 연관된 모든 것.”

“허, 허억….”

헐떡임이 심해졌다.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이, 루시페우스의 마력 때문인지 그의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4황녀 전하와 내가 너희 부자에 대해 어떤 걸 알고 있는지, 그리고 네가 이 금제에 걸렸다는 사실까지.”

“어헉…!”

“지금부터 음성으로든 글자로든 손짓으로든, 그 어떤 방식으로도 누설할 수 없다.”

도미닉의 눈동자가 마침내 빛을 잃고 말았다.

“이 순간에 대한 기억은 지금부터 반나절 동안 잊는다. 이대로 돌아가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은 채 곧바로 잠들고, 내일 아침 깨어나면 모든 걸 기억해낸다.”

진득한 졸음을 눈꺼풀에서 떨치려는 듯 도미닉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끔벅였다.

“그리고 오늘 네놈이 반의반 쪽짜리 악마의 자식한테 받은 수모는….”

루시페우스가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풀썩, 끈이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도미닉이 소파 위로 나가떨어졌다.

구겨지듯 소파에 묻힌 그의 신형을 보며 루시페우스가 중얼거렸다.

“평생 잊지 말길.”

그 목소리는 조금 서글픈 듯이 울렸다.

이윽고 루시페우스의 손이 몇 번의 움직임을 더 이뤘다. 도미닉은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눈을 반짝 뜨고 벌떡 일어나서는, 내게 주려고 가져왔던 선물 상자를 챙겨서 그대로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이 안에 있는 그 무엇도 보지 못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안색이며 모든 것이 멀쩡했으나 그 눈에는 초점이 나간 채였다.

그 모든 광경을 보는 내내 나는 목뒤가 오싹거렸다. 한편으로는….

‘반의반 쪽이라거나, 악마의 자식이라거나…. 루시페우스가 평생 들어온 말이겠지.’

거기에 생각이 닿자 욱신거리는 마음….

달칵, 응접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가 작게 내려앉았다.

긴장이 풀린 듯, 그를 둘러싼 공기가 조금 느슨해졌을 때.

“…고생했어.”

나는 루시페우스에게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안으며 그의 위팔에 얼굴을 묻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그에게 기대는 것이겠으나, 그가 스스로 파헤친 오랜 고통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픈 마음이었다.

해묵은 증오를 최소한으로나마 앙갚음한 그를 보듬고픈 마음.

갑작스러운 포옹에 멈칫했던 그는, 이내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쓸었다.

“상 주시는 건가요?”

“그런가?”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와 눈을 마주하기만을 기다린 듯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엷은 피로가 묻어나는 그 낯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뒤통수를 쓸던 손이 그대로 내 목뒤를 지그시 당겼다. 그 손길에 절로 고개가 들리자, 내 입술에 짤막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고서 내 얼굴을 눈에 담기 위함인지, 그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낯에는 조금 전 살벌하게 분노하던 사람이 누구였나 싶게, 그저 온화함만이 가득했다.

아, 좋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나는 다시 그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으응, 나도….”

“뵙고 싶었다니까요.”

“알았다고….”

웃음기 가득한 말소리에 귓가가 간질거렸다.

“얼굴 보여주세요.”

쑥스러운 마음에,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리 중얼거리며 루시페우스가 양팔을 둘러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울렸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두근거렸다.

위로하려고 한 거였지, 좋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얼마간 우리가 그렇게 한 덩이로 있었을 때.

그제야 두근거림이 진정된 나는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저녁 먹고 가.”

“영광입니다.”

루시페우스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빛났다.

“온실에서 먹자.”

“저는 여기도 괜찮은데….”

“여긴 좀 그래.”

여기는 명백히 박대의 공간이니까. 그에게 이런 곳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생긋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새우 좋아해?”

“글쎄요, 전 딱히 음식에 호불호가 없어서….”

“어제저녁에 전채로 나온 새우 카르파초가 너무 맛있어서 말이지. 오늘 경이 오면 같이 먹으려고, 준비해 놓으라고 말해두긴 했거든.”

“오늘부터 좋아하는 걸로 하지요, 새우.”

그의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울렸다. 한번 분위기가 풀어지고 나자 나 또한 장난기가 돌고 말았다.

“그리고 디저트는 말이야. 며칠 전에 사과가 선물로 들어왔거든?”

“제가 사과도 좋아하면 될까요?”

“그게, 로즈버리령 특산품이야.”

손을 잡혀서 순순히 따라오던 루시페우스가 침음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속으로 쿡쿡 웃으며 응접실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경이 전생에 따라다녔던 그 영애가 말이지….”

그리 말하며 내가 문을 열려던 순간.

머리 위가 어둑해지더니 문이 쾅 닫혔다. 루시페우스가 내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박력에 나는 찔끔 놀랐다.

너, 너무 놀렸나…?

그러고서 슬그머니 그의 낯을 올려다봤더니….

“전하께서는 참, 번번이 짓궂으십니다.”

그리 말하는 그의 낯에 깃든 건 난처함 반 즐거움 반이었다.

그래. 루시페우스가 내게 화를 낼 리가 없지.

그런 믿음이 있다는 사실에 또 목구멍이 간질거려서 나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루시페우스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모시고 싶지만, 등록되지 않은 방문객이 프리지어궁 안을 돌아다니면 꽤 실례가 될 테지요.”

“아, 그게 또 그런가?”

내 집이라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루시페우스가 온 걸 다들 알 텐데….’

나는 사생활이 없는 황족에 막둥이였으니까. 그래도 대놓고 행동하는 건 다른 문제인 거겠지…?

루시페우스는 제 손을 잡아끌던 내 손을 한참을 만지작거리며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내 손끝에 오래간 입을 맞췄다.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조심스레 내 손을 내려놓은 남자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순간 이동으로 먼저 도착한 루시페우스는 우리가 번번이 시간을 보내곤 했던, 정원이 내다보이는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정원에 내려앉은 노을이 그의 기다란 신형을 비췄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정원을 바라보는 남자의 낯에는 짙은 음영이 져 있었다.

나는 그 근처의 울타리에 걸터앉았다.

“식사 곧 올 거야. 온실에서 먹겠다니까 먹기 편한 거 주겠다고, 메인 요리로 피자 준비하겠다던데.”

“제가 오늘부터 좋아해야 할 음식이 많군요.”

루시페우스는 내 발치에 앉아, 그대로 내 무릎을 베듯 고개를 묻었다.

“…뭐가 됐든 천천히 오면 좋겠지만요.”

그의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났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거지…? 그의 여상한 말소리에조차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중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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