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14)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원로원 개회연 때 내게 인사 온 건 경이 아니었나?”
“지난 보름 동안 애타는 마음이 커져서 말이지요.”
오늘도 도미닉은 느끼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검은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경애조차 비치지 않았다.
며칠 전, 스텐실로 봉투를 장식한 편지는 예상한 대로 도미닉이 보낸 것이었다.
리히트 백작가의 자선 파티에서 헨리에테가 조성한 여론이 꽤 위협적이었는지, 조급한 기색이 선명하게 배어나는 내용이었다.
‘우리 사이의 비밀 운운하며 오붓한 시간을 청한다느니 어쩌느니.’
웃기지도 않아, 진짜.
나는 그가 내게 적어 보낸 겉멋 가득 든 글줄과 필체를 떠올리며 속으로 진저리쳤다.
도미닉을 불러들인 곳은 프리지어궁의 1층에 자리한 공용 응접실이었다.
온실은 최측근을 위한 불가침 영역이었고, 집무실에 딸린 응접실은 나와 공적으로 얽힌 이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공 공간이었다.
그리고 1층 응접실은, 내 영역에서 철저히 분리된 곳.
이곳에서 맞이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를 박대한다는 명백한 표현이었다.
그 차이가 궁인들에게도 인지되어서, 호위하는 그림자들과 하녀들 빼고는 근처에 아무도 얼씬하지 않았다.
‘도미닉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그 비웃음을 삼킨 채 그가 응접탁자 위에 올려둔 상자를 눈짓했다. 흑단에 금으로 상감한 상자는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였다.
“서대륙의 기법이군.”
“역시 은사를 진 분이신지라 타 대륙의 예술에도 조예가 깊으시군요.”
…이 정도는 상식인데.
헨리에테가 사교계에서 만든 내 이미지 중에 ‘사치품에 대한 안목이 전혀 없는 검소함’이 있다더니. 도미닉 또한 그 이미지대로 나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심하기는.’
그 앞에서 체면 차릴 것도 없겠다, 어차피 오늘이면 더 이상 따로 볼 일 없을 거겠다.
나는 꾸밈없이 냉소하며 대꾸했다.
“경이 유학하면서야 알비누스의 상단에서 서대륙에 진출한 탓에 아직 유통망이 넓지 않은가 보지? 포발트 백작님께서 내게 보내오시는 걸 보면 이건 요즘 유행이 아니던데.”
도미닉의 눈매가 굳었다. 포발트 백작, 내 오빠인 테오도르를 이르는 거였다.
귀족 사회에서 그는 제국 최고의 거부 글렌치아 공작의 부군으로 통하나, 황실에서 하사한 포발트 백작 위를 언급함으로써 신분으로 찍어 누를 필요가 있었다.
‘내가 만만하다고 생각해 나한테 달려온 걸 테니까.’
지금 귀족파 내에서 고립된 도미닉 놈으로서는 매달릴 게 나뿐이었다.
제가 내 약점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그 약점을 인정하지 않으며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아닌 척까지는 허세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딱히 내 약점은 아니란 말이지.’
나는 턱짓하여 알아서 그 상자를 열라고 지시했다.
내 고압적인 태도에 도미닉은 기분이 상한 것 같았지만,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오닉스로 된 펜던트 하나와….
“…마도 기계인가?”
“역시, 전하께서 영명하심이 대륙 전역에 유명하더라니. 참이십니다.”
도미닉이 예의 그 느릿하게 끄는 듯한 목소리로 느끼하게 지껄였다. 나는 표정이 썩어가는 걸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일전에 제가 서대륙의 마도 공학에 관해 소개해 드리길 바란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일전에, 내게 서대륙에서 유학하고 온 보좌관이 있다고 했지. 그리고 내게는 철마다 서대륙에 구호 활동을 하러 가시는 오라버니도 있는데.”
“마도 공학은 제가 유학한 죽국이 가장 발달해 있고, 저 말고 죽국까지 유학하는 귀족은 없을 테지요.”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그가 유학했다는 죽국은 서대륙에서도 극서에 자리해 지리적으로 먼 데다, 마도 공학이 발달했기에 신성력을 타고난 귀족들이 유학할 곳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막심이 서대륙에서 전공한 것 또한 철학과 정치학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이 맞고 틀리고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잠시 뒤면 도미닉은 곧….
‘조금 늦네.’
나는 괘종시계를 흘끗하며 찻잔에 입을 묻었다. 헨리에테는 오늘도 고혈압에 좋다는 히비스커스차를 준비해 두었다.
“이, 이 마도 기계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내가 영 관심 없다는 기색을 풀풀 풍겼지만, 도미닉은 어색하게 웃으며 상자에 든 마도 기계를 꺼냈다.
금속으로 된 키 낮은 원통은 화장할 때 쓰는 진주 가루를 담는 것처럼 보였다.
“마도 기계이긴 합니다만, 신성력을 마력으로 변환해주는 장치가 있어서 제국인도 쓸 수 있습니다.”
준비해온 말을 읊듯 설명을 마친 도미닉이 신성력을 불어넣는지, 작은 빛이 일었을 때.
뚜껑이 퉁기듯 열리더니, 그 안에서 정교하게 장식된 작은 회전목마가 나왔다.
그 회전목마가 돌아가면서 금속성의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세레나데의 멜로디였다.
그러니까, 그 마도 기계의 정체는 오르골.
마법 때문인지 금속으로 만들어진 회전목마의 말 하나하나가 진짜 말 같은 움직임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갔고, 빛 가루가 반짝반짝 흩날렸다.
예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기대 이하였다.
‘거창하게 마도 공학 운운해 놓고서는 김새게….’
이 기계가 좀 더 흥미로운 거였다면 말이나 더 섞어줬을 건데, 끝까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녀석이었다.
내 떨떠름한 낯이 제가 기대한 반응이 아니어서 도미닉은 당황한 눈치였다.
“…네, 이건 뭐, 이런 거고요.”
멜로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뚜껑을 닫아 상자에 넣은 도미닉은 그 옆에 있던 펜던트를 꺼냈다.
오닉스를 다이아몬드처럼 정밀하게 세공한 그 펜던트는 엄지손가락 두 개를 붙인 크기였다.
레베카의 신성력을 담은 내 펜던트와 같은 크기라는 것은….
“전하께서 늘 같은 걸 하고 다니시는 걸 보면 그 디자인을 퍽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길래. 수정이 아닌 다른 보석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수정’을 강조하는 게, 내 초커가 신성력이 없는 체질을 보완해주는 무언가임을 알아차렸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액세서리를 선물하며 구애하는 한편으로 내 비밀을 알고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거였다.
‘…투명하기도 하지.’
뭐, 그것도 곧 그만둘 일이었다.
나는 찻잔을 들어 잔에 남은 것을 다 마셨다.
“난 이런 것보다, 경이 쓰는 게 더 궁금한데.”
“…아아, 그것… 말씀이십니까.”
네가 나를 공격했던 그 장치 말이야. 그런 의미를 담아 그를 빤히 바라보자 도미닉이 시선을 피했다.
“그건 조잡한 물건이라, 도무지 전하께 소개해드릴 수 없습니다.”
“글쎄. 꽤 위력이 좋아 보이던데 말이지.”
“…….”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나 같은 사람도 그게 있다면….”
나는 찻잔의 손잡이를 쥐고서 팔을 옆으로 뻗었다. 찻잔이 내 손끝에서 대롱거렸다.
“누군가로부터 무례를 당할 때 은사를 진 자로서 권력을 행사할 것도 없이 이렇게….”
챙강.
엄지와 검지를 아주 조금 벌린 것만으로 찻잔은 손쉽게도 낙하했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얇디얇은 찻잔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안 그래?”
“아, 하하….”
도미닉은 간신히 입꼬리만 움직여 웃었다.
“신성력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기계입니다만. 역시, 전하께서 마도 기계에 관심이 있으실 줄은 알았습니다.”
대꾸는 그럴듯했으나 식은땀이 나는 것만은 숨길 수 없어 보였다.
저 장난감 같은 걸로 신기한 걸 보여주면 내가 좋다고 꺄악거리고, 뭐 그런 망상을 펼쳤으려나?
‘적어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파악하고 덤비렴. 그런대서 받아줄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예의잖니.’
그런 마음을 담아 나는 물끄러미 도미닉의 낯을 노려보았다.
당황한 놈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내가 제게 쌀쌀맞게 군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정말 조금의 가식도 차리지 않았으니까.
때마침 하녀들이 재빨리 들어와 찻잔의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고요한 몸짓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해가 서편으로 적잖이 기울어 늦은 오후의 노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녁 먹고 가라고 해야겠다.’
나는 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며, 하녀들이 움직이는 내내 도미닉 근처에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도미닉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지 않아도 다 느껴졌다.
“마, 마침 그날의 일이 얘기 나와서 말입니다만.”
그의 말소리에 그쪽을 쳐다보자, 어느새 하녀들이 물러간 응접 공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상 복구되어 있었다. 찻잔 받침 위에도 새로운 찻잔이 놓여 있었다.
다만 도미닉만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며 애써 내게 친근한 척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열심이네. 제가 지금 잡으러 온 동아줄이 곧 끊어질 것도 모르고.’
나는 그가 말하게 내버려 두고서 태연하게 찻물을 따랐다.
“저희 사고뭉치 동생이 그간 전하께 무슨 실례를 저지른 건 아닌지.”
“그가 내게 실례를 저지를 일은 없지.”
나는 티팟을 내려놓으며 깔끔하게 단언했다.
‘사실이지. 루시페우스가 무슨 짓을 해도 나한테는 실례가 되지 않고, 한편으로는 그가 무례한 짓을 할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도미닉은 내 말에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다시금 머리를 굴리는 모양새였다.
내가 새로이 따른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
“…그렇죠. 실례도 뵈어야 저지르는 것일 테니….”
말꼬리를 늘이며 도미닉은 내 안색을 살폈다.
루시페우스가 알비누스와 절연하기로 선언한 것이 보름도 더 전의 일. 그의 행적이 묘연하니 나를 떠보는 거였다.
나와 루시페우스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듯 보였으니까.
나는 내내 얼굴에 아무런 기색도 띠지 않았다. 그리고 도미닉은 이를 제가 원하는 대로 판단한 듯했다.
“그런 일이 없었던 듯하니, 다행입니다. 귀족도 못 되는 게 뭐라고, 감히 프리지어궁에 오겠느냐마는….”
자기소개인가?
나는 작게 코웃음 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 일전에 알비누스의 우애에 대해 내게 상담을 청하더니, 그게 뜻대로 안 풀린 모양이지?”
“…말씀하신 대로, 저희 불민한 가족사는 역시 전하께 여쭐 일이 아니었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게 여쭤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 그건….”
“그 여쭘이라는 것이, 혹시 경의 망상을 대가로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망상, 말씀이십니까.”
도미닉은 와중에도 코웃음을 쳤다.
“왜, 말장난 같아?”
“…….”
“나를 독대하러 오면서, 이런 말 들을 각오도 못 했어?”
내가 자꾸 제 말꼬리를 잡자 도미닉의 낯이 기묘하게 굳어갔다.
기실 이 모든 건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왜, 마침 아무도 없는데. 빙빙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얘기해봐.”
생각보다 강경한 내 태도에, 도미닉이 입술을 짓씹으며 눈동자만 굴렸다.
처음 내게 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하며 내 비밀을 언급할 때 손을 벌벌 떨던 걸 생각하면, 역시 담이 작은 놈이었다.
“협박할 테면 협박해 보라고.”
내가 거기에 조소하며 차게 내뱉었을 때.
“감히 그럴 깜냥이 되기야 하겠습니까.”
홀연히 남자의 신형이 나타났다.
“뭐, 뭐야…!”
제 등 뒤에서 울린 말소리에 화들짝 놀란 도미닉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도미닉이 앉은 소파 뒤편에 나타난 루시페우스가, 팔을 넓게 벌려 그 등받이를 짚었다.
“…아니, 소가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