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12)
“도대체 사냥 대회 때 유시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날도 반대하네 어쩌네 하길래 혼내고 말았는데, 오늘 그레이스 언니가 그 얘기를 하는 거 있지?”
그레이스와의 기나긴 오찬을 마치고, 오후 업무에 들어가기 전.
잠시간의 휴식을 위해 침실에 들어선 나는 곧바로 손거울을 꺼내 들어 오늘의 일을 쫑알쫑알 읊었다.
실시간으로 대화하기는 어려웠지만, 생각날 때 목소리를 보내둘 수 있다는 점에서 꽤나 유용했다.
“전하께서 제게 말을 거시는 게 그 어떤 순간에도 방해될 일은 없으니까요.”
루시페우스가 그리 말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아무리 그래도 멋쩍었던 건데… 한두 번 연락하기 시작하고 나니 맛 들여서 말이지.
‘전생에서 음성 메시지 남기던 것 같고 말이야.’
이렇게 말을 보내두면, 그가 시간이 날 때 짤막한 답신을 보내왔다.
“아참, 그게, 부담 가지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고. 혹시 미안해할 것도 없고. 그냥 유시가 괘씸해서….”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갑작스레 울린 노크 소리에, 나는 손거울을 황급히 닫으며 답했다.
“으응, 들어와!”
“저어, 전하. 쉬시는 데 죄송합니다만.”
들어온 건 헨리에테였다.
“갑자기 손님이 오셔서요.”
그리 말하며 헨리에테는 은쟁반에 가져온 것을 내게 보였다. 프리지어궁이 자리한 내궁 영역을 지키는 보초병들이 출입자의 인적 사항 대신 올린 듯했다.
곱게 개어진 손수건이었다.
“아하, 이건.”
손수건을 알아본 나는 씨익 웃었다.
“로즈버리… 아, 아니. 힐베르크 영애네.”
“어머. 그래요?”
그러니까, 그 손수건은 내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몇 달 전에 아멜리에게 선물해준 내 손수건.
내 문장이 수놓여 있어, 따로 약속을 잡지 않고도 나를 만날 수 있는 거였다.
오늘 약속을 잡지 않고 급히 오는 바람에 그걸 사용한 모양인데…. 무슨 일일까?
“응접실에 모셔 두었다고 합니다.”
“좋아. 정리하고 나갈게.”
헨리에테가 고개를 꾸벅여 보이고는 조용히 내 방에서 나갔다.
장난기가 동한 나는, 그대로 다시 손거울을 열었다.
“있지, 경이 전생에 따라다녔던 그 레이디가 왔다네? 안부 전해줄게.”
그러고서 손거울을 탁, 닫으며 나는 키득거렸다. 주머니에 바로 집어넣은 손거울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했지만, 나는 확인하지 않았다.
“영애, 언제 황성에 돌아온 거야? 또 웬 깜짝 방문이고.”
응접실로 들어서며 내가 쏟아낸 물음표에, 아멜리는 특유의 야무진 미소로 화답했다.
“어제 밤차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당분간 전하 뵈러 갈 땐 비공식적으로 방문하라고 하시기에….”
“그래?”
나는 눈썹을 까딱이며 자리에 앉았다.
“요즘 시기가 묘하다고, 제가 전하와 자주 만나는 것이 보이면 전하께 누가 될 수 있다고 하셔서요. 레오랑 가면 눈에 더 띌 거라고도 하시고.”
“…역시 후작이 보는 눈이 좋네.”
나는 원작, 아니, 아무튼 그 얼렁뚱땅인 ‘공제눈’에 그려진 힐베르크 후작의 성미를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작은 판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났으니까. 아니, 다른 건 다 제대로 나와 있으면서 루시페우스에 관련된 것만 다 엉터리로 적어 놨을 게 뭐야?’
빨간 눈 설정도 생략하고, 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랑 연관해서 엄청 중요한 세계관 설정인데?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을 두고서, 나는 지구에 있을 ‘공제눈’의 작가를 마음속으로 원망했다.
‘누군지 몰라도, 볼 일이 생기면 따져 물어야지.’
…볼 일이 없을 테니까 이런 소리도 하는 거였지만.
“케인이 전하께서 편찮으셨다고 해서요. 황성 돌아왔다고 인사드릴 겸 왔는데….”
“으응, 진작 다 나았지. 걱정 고마워.”
아멜리가 다행이라는 듯 해사하게 웃어 보여, 나는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아멜리를 볼 때마다 세르니타에서 못나게 군 것이 생각나고 말아서….
“여기, 로즈버리 영지의 특산물이에요. 전하께서야 더 진귀한 것도 많이 접하셨겠지만, 로즈버리에선 이게 가장 귀한 거랍니다.”
그러고 보니 응접탁자 위에는 투박한 나무 상자가 하나 올라와 있었다. 거기서 나온 건 장밋빛으로 보이리만치 새빨간 사과였다.
“어머. 색깔이 곱네.”
“네, 동북쪽 영지에서 최고로 치는 로자펠 사과예요.”
“응응, 수도까지 멀어서 유통이 어렵다뿐이지, 로자펠 품종이 아주 고급이라고 나도 들었는걸. 무거울 텐데, 뭐 하러 이런 걸 다 가져왔어?”
“저도 이젠 호위 기사가 생겼거든요.”
아멜리가 에헴, 하는 듯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어쩌다가? 믿을 만한 인물이야?”
“레오가 아우렌바흐 기사단에서 몇 분 추천해 줬어요.”
“그럼, 저번처럼 임대하는 게 아니라….”
“네, 아예 힐베르크에서 고용하기로 했고요.”
그리 말하는 아멜리의 낯에는 뿌듯함이 깃들어 있었다. 황성에 와서 물질적으로 많은 이의 배려를 받았던 만큼, 이제 제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겨 흡족한 듯했다.
예정된 고난 없이 행복을 쟁취한 내 여주의 미소에 나 또한 뿌듯해졌다.
“레오폴트 경이 로즈버리에도 함께 갔던 거지?”
“네에, 전하께는 비밀이라고 아주 신신당부를 했는데 역시 이야기가 들어가는군요?”
“케인이 우리의 연락책이잖아.”
내 장난스러운 말소리에 아멜리가 까르르 웃었다.
기실 ‘공제눈’에서도 레오폴트가 아멜리를 따라서 로즈버리에 다녀온 일이 있었으니, 케인에게 듣지 못했어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그때는 납치 사건을 비롯해 황성 생활에 지친 아멜리가 낙향하겠다며 로즈버리로 떠났기에, 레오폴트가 허겁지겁 따라간 것만이 다를 뿐.
납치 사건의 트라우마로 레오폴트를 계속 밀어냈던 아멜리가, 그 먼 곳까지 따라온 것에 감동받아 마침내 마음을 열었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진작에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이미 황성에서 공식 연인으로 통하고 있었다.
다 내 덕이지, 칭찬해.
나는 간만에 마음속으로 세실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우렌바흐에 철도 특등실 우선권이 있는데, 레오폴트 경이 그걸 영애를 위해 안 쓸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걸 빌미로 로즈버리에 가서 남작한테 인사드린다고 난리 부렸을 것 같기도 하고.”
“…역시 레오가 전하 속이려면 몇 번은 다시 태어나야 할 것 같아요.”
“그만큼 겉과 속이 올곧게 같은 사람이잖아. 선하고.”
내가 생긋 웃으며 하는 말에 아멜리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본 적 없는 레오폴트의 남주 미소를 떠올리고 있을 게 빤했다.
‘그리고, 그 선함을 지켜 주겠다고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벌였고 말이야.’
거기다가 괜히 질투하는 멋진 공자님 모습을 아멜리에게 보이랍시고….
루시페우스는 번번이 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와 떨어져 있을 때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가라앉고 마는 것이었다.
“사과는 주방에 보내둘게요.”
때마침 헨리에테가 다과를 내왔다. 오늘의 차는 그레이스와의 오랜 오찬을 마치고 나온 나를 위한, 소화가 잘 되는 페퍼민트차였다.
“고마워요, 레이디 헨리에테.”
“천만에요.”
헨리에테가 입꼬리만 빠르게 들어 웃어 보이고는 사과 상자를 들고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아멜리는 신기함을 감추지 못한 눈초리로 헨리에테가 사라진 방향을 흘끗거렸다.
“헨리에테 경이 나랑 같이 있는 건 처음 보지?”
“네에, 전하의 시녀란 이야기는 들었지만요….”
황성에 오자마자 사교계에서 시달린 아멜리를 위해, 아멜리가 올 때면 사교계를 연상케 할 만한 인물들은 모두 물리곤 했었으니까.
“인상도 꽤 다르고?”
“연회에서 보던 것과는요, 네….”
“우리 라마르 영애가 황실파, 귀족파 안 가리고 인기가 참 많아서 말이야.”
“맞아요, 그렇더라고요.”
“철모르는 막내 전하 모시느라 골치 아픈 거, 하사품 빼돌리는 재미로 참고 있다고 유명하고.”
“그, 그게….”
내 거침없는 말에 아멜리가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쿡쿡 웃으며 아멜리에게 차를 따라 권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내 방식이야. 사교계 활동은 직접 하지 않지만, 어딘가 허술한 이미지를 보여서 귀족들에게 조금 얕보이는 거.”
“어찌 감히, 은사를 진 자를….”
“말이야 그렇게 하겠지만.”
나는 아멜리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덕분에 헨리에테 경이 사교계에서 귀족 사회의 동향도 세밀하게 청취할 수 있고. 그리고 후작이 우려하는 것처럼 내가 게이블스의 후계 싸움에 깊이 관여해 있어도… 아무도 짐작조차 못 하지.”
“정말요?”
아멜리의 푸른 눈동자가 땡그랗게 빛났다.
아마 힐베르크 후작은 이러한 짐작까지는 아멜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 또한, 지금까지 아멜리에게 내가 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으니까.
‘레오도 마찬가지지.’
레오폴트 또한 내가 군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가 성기사단에 속해 있으니 같은 제국군 소속인데도 말이다.
‘마침 오늘 아멜리가 와서 잘됐어. 안 그래도 힐베르크 후작의 의중을 살피려고 했는데.’
깜짝 방문이라는 귀여운 짓을 벌여준 아멜리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전하며,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 진지한 기색에 아멜리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제국군 전략실의 실장으로서, 힐베르크 후작가의 후계자에게 하는 이야기야.”
아멜리의 낯이 긴장감으로 굳었다.
“그래, 맞아. 조만간 게이블스 후작가의 후계 싸움이 벌어질 거고, 그건 내가 레이디 스칼렛과 몇 년간 준비한 일이야. 그 배후에 내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원로원에 극히 드물지만 말이야.”
“그럼 아버지께선….”
“응. 후작이 참 감이 좋네.”
내가 생긋 웃어 보였다. 아멜리는 머릿속으로 후작에게서 들은 것들을 이것저것 떠올리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후작이 슬슬 방향을 정해야 할 때가 왔어.”
“방향요….”
“제 딸이 아우렌바흐의 소공작과 연인 관계여서가 아니라, 누가 봐도 정당한 사유로 그리될 거야.”
나는 후작이 취할 노선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황실파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에 관해 후작과 이야기하곤 했었는지, 아멜리는 놀란 표정을 간신히 감추었다.
“일전에 내가 후작에게 준 성상에 관해서는, 이야기 들었어?”
“네, 어느 정도는요.”
“그럼 힐베르크의 비극에 관해서도 들었겠고.”
“…아버지를 처음 뵙기 전에 수소문하여 알게 된 내용도 있었지만, 전하께서 성상을 되찾아 주시고서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기도 했어요.”
역시 눈치 빠른 내 여주. 상황이 퍽 진지함을 인지하자마자 상호 신뢰를 위해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또박또박 읊었다.
“가문의 내력…이라시면서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이 내용을 후작에게 전해줘.”
아멜리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의 조부모 되시는 분들의 죽음을 귀족파에서 사주했어. 힐베르크의 비극 역시 모두가 인위적인 거였고.”
“…맙소사.”
“그 허물을 들춰서 연관된 귀족파 가문들을 솎을 거고, 거기에는 게이블스도 낄 거야.”
“…아하, 그렇게 게이블스를요.”
아멜리야 본 적도 없는 조부모님의 일이라 와닿지 않을 거였지만, 이 파장은 상당할 거였다.
나는 아멜리 너머에 있을 힐베르크 후작이 올바르게 행동해주길 바랐다.
[있지, 경이 전생에 따라다녔던 그 레이디가 왔다네? 안부 전해줄게.]
그러고서 바로 쌩하니 끊어져버린 세실리아의 목소리.
루시페우스는 순간 제가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것도 모르고 큽, 웃음을 목구멍으로 눌러 참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흐물거렸다. 입꼬리가 이토록 다양한 모양을 취할 수 있음을 두 생에 걸쳐 처음으로 겪는 요즘이었다.
「도무지무슨소리인지 저는잘.」
그리 긴박한 답을 보냈건만, 세실리아는 이미 손거울을 닫아버린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