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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64화 (164/220)

164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11)

“마법사라던데.”

“…아, 네에.”

“그리고 그가 알비누스라던데….”

그레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알아서 이실직고하라는 눈빛이었다.

“어, 언니도 참. 별일을 다 신경 쓰세요.”

“우리 형제들의 최고 관심사인데?”

그레이스가 한쪽 눈썹을 크게 들썩이며 말했다. 능글맞은 표정인데도 그레이스의 위엄이 곁들여지니 멋있기만 했다.

“왜, 일전에 테오가 장갑을 던지니 마니 하기도 했고.”

“어, 언니께 그런 말씀을 다 하세요?”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공사다망하신데,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나는 속으로 테오도르와 글렌치아 공작의 장난기 가득한 낯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네가 치유해 달라고 데리고 온 자가 있다고 베키가 그러기도 했고….”

“베키 언니도 참, 시, 신관께서 비밀도 안 지켜 주시고오….”

나는 애먼 레몬 셔벗만 깨작거리면서 웅얼거렸다. 얼굴이 달아오른 게 다 느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레이스에게는 창피했다.

그레이스는 내 언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주군으로 섬기기로 한 이니까.

“네 일을, 다른 형제들보다 내가 늦게 알아야겠니?”

“황태자 전하께 제 사생활로 걱정을 끼칠 수가 있나요….”

“그래서, 내 아들은 벌써 그를 반대하고?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크윽,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진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사이 어찌나 헤집었던지, 내 접시의 셔벗은 다 녹고 말았다.

“그게, 이런저런 작전 때문에 자꾸 얽히다 보니…. 절대 일을 태만하게 한 건 아니고요!”

그레이스가 쿡쿡 웃었다.

“세실. 네가 누구와 교제를 하건, 그자와 미래를 약속하건, 우리가 입을 댈 구석은 없어.”

“그래도요….”

“네가 마침 막내겠다, 내가 너였다면 의무도 없이 권리만 누릴 텐데. 나를 돕겠다고 너무 어려서부터 애쓴 게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야. 내가 괜히 렌틸 자작을 일찍 붙이면서 널 괴롭힌 건 아닌가 싶어서.”

“아, 아니에요. 언니께서 절 그 어린 나이부터 믿어주신 게 얼마나 감사했는데요?”

“말했잖니. 네가 내게 뭘 보여주려 애쓰지 않아도, 내 동생인 것만으로도 나는 너를 믿는다고.”

그레이스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젊은 시절 그저 강직하기 그지없던 그레이스의 얼굴에는 헤르미아나와 유스티안을 키우면서 너그러움마저 가미된 지 오래였다.

이런 때 보이는 내 형제들의, 가족의 깊은 사랑이 나는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세실리아로 산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그러니까, 연애하겠다고 일 좀 등한시하면 좀 어떠냐는 말이야.”

그레이스는 제 몫의 레몬 셔벗 접시를 내 쪽으로 밀며 말을 이었다.

“하다못해 게이블스처럼 황실과 척진 가문에서 누굴 데려와도, 은사를 진 자라면 누구도 네게 반대할 수 없단다. 유시야 어쩔 수 없다만….”

“제가 그럴 리가요! 게다가 루시페우스 경은 이제 제 일에도 도움이….”

“세실.”

온화하던 그레이스의 미소에 단호함이 깃들었다.

“너는 어려서부터 네 언니들과 오빠를 믿어주지 않았지.”

“…….”

“공부도 안 하고 떼만 써도 우리는 이미 모두 네게 사로잡혀서 어찌할 수 없었는데.”

그게, 나는 신성력도 없었으니까….

그레이스가 아쉬워하는 소리가 내 잘못을 지적하는 걸로만 들려, 나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이 언니가 헤니와 유시를 키워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저는, 동생이잖아요. 좀 더 든든한 모습을 보여 드려야죠.”

나는 부러 헤벌쭉 웃으며 대꾸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황실이 내게 주는 과분한 사랑이 언제 가실지 몰라, 조금이라도 더 귀엽게 웃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걸 공부하려 애쓰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치세와 그레이스의 정권에 도움이 되겠답시고 동분서주하던 지난날들.

조금이라도 쓸모없어 보인다면, 내가 겪은 적 없던 이 애정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까 봐서….

‘…하지만 이젠 알아.’

마음으로는 자꾸만 주저하게 되어도, 머리로는 알았다.

루시페우스에게 서로의 마음을, 타인의 마음을 믿어보자고 한 건 기실 나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건… 나를 알기 전부터 날 그리워한, 내가 저지른 잘못조차 다 상관없다고 말해준 그 덕분이었다.

나는 자꾸만 변명하게 되는 마음을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라. 혹여 그 영식의 마음이 부족하여.”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레이스의 눈매가 좁아지는 것이, 자칫했다간 루시페우스의 점수가 팍팍 깎이게 생겼다.

‘점수야, 뭐, 기왕이면 잘 받아놓으면 좋은 거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깐.’

그래. 나는 성적 지상주의 사회에서 전생을 살다 왔다고.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을 부산스럽게 만들며 나는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그는 알비누스 후작의 이복누이, 그러니까 선대 후작이 결혼 전에 본 딸이 미혼으로 낳은 자식이에요.”

“음. 그가 제 이복누이가 죽은 뒤에 조카를 입양했다는 이야기야 들었지. 혹시 비정한 양부에게 복수한다는 그런 그림인 셈이니?”

질문이 사뭇 단호했다. 그레이스는 나름대로 루시페우스에 관한 뒷조사를 마쳐놓은 모양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왜 내 일을 돕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잘됐네.’

안 그래도 꺼내려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말이다.

우물쭈물하던 내 낯빛이 선명해지자 그레이스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사실, 알비누스 후작에게 정통성 문제가 있어요.”

“정통성?”

“그의 말로는… 알비누스 후작이 선대 후작의 자식이 아니라더군요.”

“뭐라?”

당황한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엄연히 제 자식이 따로 있는데 선대 후작이 남을 후계로 세웠다면….”

“선대 후작을 속였을 가능성도 있을 듯해요.”

“…대신전에 한번 알아봐야겠구나.”

“네. 출생 신고서가 어떻게 꾸려져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그리고, 베키 언니께 한번 여쭤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래. 베키라면 신성력의 기운을 보고서 혈연관계를 따질 수 있겠지. 한데 그가 선대 후작의 친자가 아님은 어찌 증명한다.”

잠시간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건 기실 루시페우스가 걱정하는 바였다. 루시페우스와 알비누스 후작은 서로 피가 통하지 않았지만, 선대 후작과 누가 혈연이 있는지를 증명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알비누스는 대대로 손이 귀한 가문이었지.”

“네. 그래서 현 후작 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명색이 후작가지만 귀족파 중에서도 그리 세가 크지 않았죠.”

방계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현 후작 대에 직계 이외의 알비누스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차였다.

높은 확률로, 후작이 제 혈통을 감추기 위해 방계를 제거했으리라.

‘실제로 케인이 에리나 경의 행적을 추적할 때, 교류했을 만한 방계가 다 죽고 없어서 고생했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며칠 전 루시페우스와 동행했던 수도원 후원의 정경을 떠올렸다.

“증언해줄 사람이… 없지는 않아요.”

그레이스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거기에 떠오른 건 명백한 반가움이었다.

열여섯 살의 내가 알비누스를 경계하겠다 선언했을 때만 해도 알비누스는 일개 귀족파에 불과했는데, 이후 알비누스가 득세하면서 그레이스의 일마다 어깃장을 놓은 세월도 수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미닉 놈과 내 혼사를 협상하기 위해 그레이스를 괴롭혔던 것도 같았다.

“실은, 후작과 형제라고 주장하는 평민…을 알게 되었어요.”

그레이스의 눈썹이 크게 들썩였다.

단순히 알비누스의 피가 흐르지 않는 걸 떠나서 귀족이 아니기까지 하다면 더더욱 문제였다. 후작이 가주로서 행한 일을 모두 뒤엎을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킬리온과 후작의 관계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니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였지만.

“우선은 루시페우스 경이 그자가 후작과 친분이 있는 것도 확인했어요.”

나는 최대한 킬리온의 정체를 에둘러 말했다.

그의 정신이 온전치 않은지라 그레이스에게 단언하기가 곤란했다.

‘…그의 증언이 절실하긴 하지만 말이야. 성녀의 시해를 사주받았다는 것도 그렇고.’

한편 내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는지, 그레이스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영식과의 관계를 모르겠다고 하는 거구나? 그의 신분이 유지될지가 불분명하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에요.”

순순히 답하면서도 콧잔등이 화끈거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빙글거리는 미소는 분명….

‘우리 관계가 궁금했던 건 맞나 보네….’

40대인 그레이스가 보기엔 내가 청춘일 거였다. 그래서 이러는 거겠지…?

“뭐, 정말로 후작의 피가 알비누스와 통하지 않음만 확인되고, 네 일을 도와 그 영식이 공이라도 세운다면 그에게 알비누스를 상속하게 할 수도 있지.”

“정말요?”

나는 깜짝 놀라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기실 그건 나도 생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루시페우스로부터 후작과 혈연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서부터 그를 유일한 알비누스로 남길 수 있을지 고민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행정적인 권한이 없는 내 마음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몇 가지 공을 돌려 다른 작위를 내릴 수는 있지만, 알비누스는 우선 이번 일로 멸문될 확률이 높으니까….’

내가 어떤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가 다 보이는지, 그레이스는 흐뭇한 낯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알아서 하겠다고 말할 타이밍이지만….’

지금까지 부모님과 언니 오빠를 걱정시키지 않은 의젓한 막둥이 세실은 그래야만 했지만….

나는 그레이스에게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때 가서요.”

예상외의 내 반응에, 그레이스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원한다면, 그러면 꼭 언니께 부탁드릴게요.”

“…그래. 그러렴.”

이내 그레이스의 낯에는 멋진 미소가 깃들었다.

“귀족파의 다양한 일을 도맡던 이라면, 글렌치아 쪽과 동업해서 기반을 갖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아, 나중에요. 일단은 올해를 잘 넘기고요.”

“그래. 네가 몇 년간 준비한 일이니, 그게 우선이겠지.”

언뜻 그레이스가 비친 청사진에, 나는 루시페우스와의 일이 내 형제들 사이에 짜하게 퍼져 있음을 확신하고 말았다.

‘도대체 글렌치아 공작하고 무슨 얘기까지 한 거야?’

황족 사생활이 문제가 아니라, 막둥이 사생활이 문제였다.

“참, 그리고 알비누스가 고용하여 황성에 들어와 있다는 서대륙 마검사들 말인데.”

“네. 정 안 되면 테오 오라버니께 서대륙 쪽 대상인들의 정보망을 이용하게 해달라 청하려고요.”

소년 시절에 만든 테오도르의 자선 재단은 글렌치아의 막강한 부와 유통망에 힘입어 다른 대륙에까지 힘을 뻗친 지 오래였다.

제국의 영향력을 타 대륙에 떨친다는 미명하에 다양한 길드나 단체들과 교섭하며 구축한 것은, 일종의 외교망.

‘별의별 길드와 친목 다질 때부터 알아봤지.’

여성으로서 황위에 오를 내 언니의 정권을 위해 노력하는 건, 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테오 말고.”

그레이스가 빙긋 웃었다.

“혹 무력이 필요할 것 같으면, 성기사단에 상의해 보라는 거였어. 네 기사들도 충분히 믿음직하겠지만, 성기사단이 지닌 명분도 충분히 쓸 만하단다.”

“아, 네에, 언니.”

하지만 내 기사들도 편제상 성기사단 소속인걸…? 그레이스의 말이 단순한 덕담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이려던 순간.

“…그게, 로지가 꽤 아쉬워하는 것도 같아서 말이야.”

“로지 언니가요?”

나는 무뚝뚝한 성미의 내 둘째 언니, 로젤리아를 떠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지만 너와 교제한다는 그 영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뭐니?”

“네? 교, 교제는 아니지만요….”

“아니야?”

정말, 막둥이 인권 다 어디 갔어?

나는 석류궁에조차 쥐구멍이 없음을 안타까워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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