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63화 (163/220)

163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10)

“완벽해. 수고했어.”

나는 흡족한 낯으로 헨리에테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헨리에테가 도미닉 놈을 충동질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놈 성정에 여기저기서 무시당하면 분노가 엉뚱한 데로 튀겠지.’

예를 들면, 제 아내가 될 거라고 마음속으로 이미 깔보고 있는 황녀 말이다.

‘신분으로 놓고 보면 그러면 안 되는데, 수세에 몰린 자는 본능에 충실한 행동을 저지르곤 하니까.’

그 사고방식이 굉장히 불쾌했지만, 그리 투명한 덕분에 이런 작전도 세울 수 있었다.

내게는 과하리만치 많은 호위가 늘 따라붙어 있고, 또 든든한 믿을 구석도 있었으니까.

‘믿을 구석, 그러니까….’

내 시선이 스르륵 미끄러져 필기구 통 바로 옆,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둔 손거울로 향했다.

뚜껑에 덧댄 실크 위에 장미 덩굴이 조잘조잘하게 수놓인, 소박하리만치 평범한 손거울.

루시페우스가 며칠간 황성을 비워야 하니, 대신 늘 갖고 다니라고 신신당부한 차였다.

“그사이 무슨 일이 생기시면 꼭 제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실직고하자면, 마법을 하나 더 걸었습니다. 신성력이든 마력이든 기준치 이상의 발현이 감지되면 제가 알 수 있도록요.”

“마법이라면…?”

“제가 없는 사이에 제 의형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요.”

대륙 어디에 있건 바로 올 수 있으니, 위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는 거였다.

수도원에 다녀올 때는 여럿을 데리고 움직인 데다 나 때문에 조심하느라 두어 번 나눠서 움직였지만, 혼자라면 한두 번의 마법만으로도 대륙을 횡단할 수 있다고 했다.

‘…처음 이걸 받을 땐 그저 꺼림칙했는데.’

지금은 든든하기 그지없으니, 사람 마음 참.

나는 괜스레 그 뚜껑을 톡톡, 두들기고는 헨리에테에게 말했다.

“그럼, 수정 쪽 미끼는 프렘린 둘째가 문 거고? 하여간, 중요한 일일 거면서 꼭 망나니들을 시키네….”

“제 아들이 망나니인 줄 아는 도덕관념이면 이런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테니까요.”

헨리에테의 대꾸가 냉소적으로 울렸다.

그것이 사교계에서의 모습과 꽤 다른지, 스칼렛은 헨리에테가 나와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번번이 놀라곤 했다.

“투자 방식이 좀 묘했습니다. 보석이든 금괴든 현물에 투자한다면, 현물과 돈을 맞교환해야 하잖아요? 한데 가치 투자 운운하면서 투자 증서만으로 소유권을 인정해 주겠다고 하네요. 어차피 되팔 거 아니냐면서요.”

“수정을 직접 무언가에 쓰고 있는 게 확실하네. 그래서 수정을 줄 수 없는 거지.”

“네. 와중에도 값을 올려서 시세 차익도 내겠답시고 투자자를 마다하지 않는 거겠고요. 벌써 그 값이 수정 1카그람당 금화 스무 개에 이르러 있더군요.”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루시페우스가 절연하겠다고 선언한 직후에 알비누스 상단이 몬타즈 상단으로부터 사들인 것이 수정 30카그람이었다. 그만큼의 거래를 몇십 번은 했을 테니, 그들이 쥐고 있는 수정의 가치가 금화 몇천, 몇만 개가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수익금을 배당해 준다는 걸 보니….”

“수정을 활용해서 벌인 일로 저들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할 거고, 그 돈을 나눈다는 거겠네. 계약서에는 구체적인 금액이 적혀 있지 않지?”

“예상하신 대로예요. 전체 수익의 1퍼센트라고만 적혀 있어요.”

헨리에테가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를 꺼냈다. 그 투자 증서에는 프렘린 백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수익이 없으면 주지 않겠다는 거지. 애초에 수익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을 확률이 높고.”

톡톡톡, 생각에 빠진 내 손끝이 책상 위에 펼쳐둔 계약서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프렘린 백작가의 인장에 그려진 뱀의 머리가 몇 번이고 내 손끝에 닿았다.

“우선, 투자 증서는 나중에 알렉스가 오면 공유하고. 프렘린이면, 로니가 담당인데….”

“로니 경을 호출할까요?”

“…리나도 함께 불러줘.”

내 말에 헨리에테의 사무적인 낯에 잠시간 놀라움이 스쳤다.

프렘린 기사단에서 종자 생활을 시작한 리나는 그 시절을 돌이키기 싫은 추억으로 여겼다.

6소대 수련생 선발 시험 때 리나가 과격한 면모를 보인 것도 어떻게든 프렘린 기사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였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프렘린 백작가에 대해 잘 알고 있음에도 프렘린의 담당을 맡기지 않은 거였다.

‘리나의 트라우마를 걱정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다혈질인 리나가 업무에 사감을 담을 수도 있어서였지….’

하지만 지금부터 일어날 일들은, 그 모든 기간 내내 준비해온 일의 피날레였다.

쓸 수 있는 패, 없는 패 모두 다 써야 했다.

“리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헨리에테는 시선을 돌려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전하, 벌써 시간이.”

“응. 그럼 다녀올게.”

“네,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경도.”

오늘의 오찬은 내 언니이자 주군, 그레이스와의 정기 면담 시간.

내가 짜놓은 판이 본격적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보고할 예정이었다.

‘그레이스는 나를 무조건 신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지.

‘쓸모 있는 세실이 되려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내 숙원이 된걸.’

나는 이번 무대를 통해 평생의 야망을 실현할 내 친우와 해묵은 꿈을 이룰 나의 스승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랜 세월의 복수를 하게 될 나의 여, 여, 연…. 으악. 쑥스러워.

‘…연인이 될 남자.’

머릿속으로나마 말을 맺고 나니 괜스레 낯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바라는 건, 내가 이번 일을 제대로 마치는 거니까. 그리고 그다음에….’

그다음에,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함께할지 이야기할 테니까.

나는 결의에 찬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레이스가 머무르는 석류궁의 주방에서는 오늘도 콜드 파스타와 샌드위치 등 식어도 괜찮은 음식들을 메인 메뉴로 내놓았다. 그레이스와 나의 대화가 번번이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게이블스 영애도, 마음의 준비가 다 됐다 하고?”

40대 초반의 그레이스를 보면 누구라도 그녀가 지고한 군주임을 부인할 수 없을 거였다. 실제로 슬슬 선위하시려는 아버지의 실무를 반 이상 넘겨받은 그레이스는 차기 황제로서의 권력을 다지는 중이었다.

한쪽으로 가르마를 탄 긴 앞머리 너머 청금안은 상대의 영혼을 꿰뚫듯이 빛났고, 아버지의 골격을 빼닮아 시원시원하게 구획된 얼굴에는 원숙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나는 내 큰언니의 근사한 외관에 충성심을 한껏 돋우며 싹싹하게 답했다.

“네. 이전에는 후작의 눈을 피해 다과회나 살롱 같은 사교 모임만 다녔지만, 요즘에는 게이블스에 투자한 가문이나 그 가신들을 회유하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렌틸 자작이 의회에서 꽤나 주목받고 있으니, 오히려 몸을 사리는 게 의뭉스러워 보일 때도 됐지. 그 영애도 너랑 교류한 게 벌써….”

“6년요. 그간 레이디 스칼렛도 번민이 컸죠. 렌틸 자작이 이렇다 할 용단을 못 내렸으니까요.”

“용단을 못 내렸던 건 맞니?”

그레이스가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에 나는 헤헤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그레이스만은 속일 수 없었다. 아기였던 내가 직언 같은 걸 했다는 이유만으로 근 20년을 투자해준 내 언니니까.

나는 막냇동생의 이점을 살려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귀족파에서 이렇게 알아서 허물을 만들 때까지 기다려본 것뿐이죠. 정말로 이렇게 좋은 무대가 꾸려질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래. 네가 그 가문들을 주시한 세월도 벌써 그만큼이니 말이다.”

스칼렛에게야 렌틸 자작이 마음을 늦게 먹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자작은 애초부터 이 판에 뛰어들 생각이 만만이었다.

다만 내가 더 좋은 무대를 만들고 싶어 하니 기다렸던 것뿐이다.

실은, ‘공제눈’의 무대가 무사히 열리기를 기다려서였지만….

‘진짜 바보 같았지.’

내가 원작이라고 믿던 건 사실 루시페우스의 지난 생 비슷한 것에 불과하지 않던가.

‘어른의 이성을 가졌다고 잘난 체는 있는 대로 하면서, 실은 나 좋을 대로 생각하고 말았던 거야….’

그런 생각에 이르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나는 심신의 평화를 위해 그의 낯을 떠올리려 애썼다.

다 괜찮다고 말하던 그의 얼굴을….

‘내가 신경 쓰지 않기를 원하니까, 최대한 그러지 말아야지.’

해묵은 죄책감이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상념을 털어내듯 경쾌한 리듬으로 샌드위치를 칼질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 원로원 의회 때 렌틸 자작이 제 자료들을 토대로 공세할 거고, 다음 달 정무 회의 때는 결정타를 먹일 거예요.”

“결정타라면?”

“가장 확실한 건, 최근 귀족파에서 수정을 독과점하고 있어요.”

“수정을?”

“봄부터 수정 원석과 광산 등을 매입하던 차인데, 최근에는 값을 올리기 위함인지 외부의 투자자를 유치하더라고요.”

“…그러고서 저들이 가진 걸 다 팔아버리면 투자자들만 손해겠구나. 한편으로 수정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원정에 쓰이니 성기사단에도 부담이겠고.”

그레이스의 낯이 적잖이 심각해졌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와 관련된 일은 모두 본대륙의 안보와 직결되는 사항이었다.

“그리고, 사실 한 가지가 더 있어요.”

그레이스가 말하라는 듯 턱짓했다.

“학자의 탑에서 가설로 나온 이야기이긴 한데….”

나는 신중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그레이스와 독대할 때면 늘 그렇듯 시종들을 모두 물려 두었으나,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학자의 탑에서는 성녀가 일찍 죽은 바람에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불안정해졌다고 추측하고 있어요. 그리고 전대 성녀가 사망한 사고에 귀족파가 개입한 정황이 있고요.”

그레이스의 청금색 눈동자가 단단히 얼어붙었다. 격랑의 끔찍함을 몸소 체험한 그레이스에겐 사안이 더욱 엄중하게 다가올 거였다.

“다음 성녀가 출현할 때까지 검증할 수 없으니 우선 가설 단계인데…. 학자의 탑에서 인가해주면, 범대륙급 범죄 행위로 고발할 수 있을 거예요.”

“귀족파가 개입했다는 것은 어떻게…?”

“그들이 사제 하나를 회유했어요. 그가 뭔지도 모르고 성녀께 선물한 것이 있는데, 일종의 마도구나 폭탄이었던 것 같아요.”

“…….”

그레이스의 시선이 테이블 한가운데의 센터피스에 매섭게 내려앉았다.

‘꽤나 충격적이겠지.’

나만 해도 렌틸 자작에게서, 킬리온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놀랐는데, 그레이스에게는 한 번에 폭탄이 터지는 기분일 거였다.

“…학자의 탑까지 끌어들이게 될 줄은 몰랐는걸. 처음 렌틸 자작을 네게 붙일 때만 해도, 그녀가 직접 움직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언니께서 무의식중에 최고의 인선을 하신 셈이죠.”

나는 그레이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부러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울렸다.

“렌틸 자작이야 아버지께서 베키와 테오에게부터 붙이셨지 않니.”

“그래도, 두 살배기를 20년간이나 가르칠 인재로 점지하신 건 언니시잖아요?”

“그건 세실 네가 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제자여서 그런 것 아닐까?”

다소간 긴장이 풀린 그레이스와 나는 서로 금칠해주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렌틸 자작도, 언니도 저를 과분히도 믿어 주셨는걸요.”

“세실, 나는 요람 속의 너를 본 순간부터 너를 믿을 수밖에 없었단다.”

그레이스의 멋있는 얼굴이 온화하게 빛났다.

내 언니의 과분한 사랑과 신뢰….

‘올해 일, 잘 마무리해서 보답해야 해.’

잠시간의 훈훈한 분위기와 함께 그레이스와 나는 접시에 든 나머지 음식을 다 비웠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들을 불러 빈 접시를 치우고 후식을 받았을 때.

“그나저나, 사냥 대회 때 유시 때문에 고생했다고? 따로 고맙다고도 못 했네.”

“…아, 네에. 아니에요, 언니.”

맞네. 그런 일이 있었네.

그땐 정말 혼이 나갈 정도로 무서웠었는데, 그 후로 너무 많은 사건이 터져서 벌써 옛날 일 같았다.

유스티안이 잘못되면 그레이스에게, 또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을 거여서 끔찍히도 괴롭고 불안했는데.

‘유시가 결국 무사하기도 했고….’

그러고 보면 그때, 루시페우스는 도미닉에게 협박당하는 와중에도 어찌 알고 나를 도우러 온 거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니 기분이 조금 몽글몽글해졌을 때였다.

그레이스가 코앞에 낀 손깍지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시가 네 짝으로 반대한다는 영식이 있던데….”

크흡, 나는 레몬 셔벗에 사레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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