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61화 (161/220)

161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8)

“올해 일이 다 끝나면 내 기사들 모두 장기 휴가 주고서, 나도 겨우내 쉬려고 했거든.”

“그 말씀은….”

“경의 지난 생에 일어났던 비극이 확실히 없게 된 걸 확인하고 나면. 게이블스의 후계 문제가 마무리되고 나면 말이야.”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몸을 그쪽으로 바싹 기울였다.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루시페우스의 고개가 조금 더 젖혀졌다.

“그때 같이 동대륙에 가보면 어때?”

“하지만, 저는 그때면.”

“말했잖아. 황실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간다니까?”

“…예에?”

루시페우스는 웃음기 가득한 낯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건 그때 가서 생각해. 가장 중요한 건 경이 나를 얼마나 믿고, 내가 경을 얼마나 믿는지… 그런 것 아니야?”

“하지만, 전하께서는 늘 황실에 남으시겠다고….”

“난 동대륙 가서 산다고 한 거 아닌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신분에 관한 생각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내내 심각한 그를 위한 농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당황한 낯을 지었던 루시페우스는 이내 눈을 내리깔며 피식 웃었다.

이런 그를 두고 무표정한 석고상 같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언제의 일인지….

그런 그의 사소한 움직임들을 아는 이가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새삼 또 배꼽이 간질거렸다.

“예. 여행이죠. 제가 완벽히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래. 내 경만 믿겠네.”

나는 장난스레 그의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한쪽 입꼬리가 벅찬 기쁨을 담아 근사하게 올라갔다.

“경에게 그 나침반을 줬다는 샤먼 말이야. 나도 만나보고 싶어.”

“그 노파를요? 굳이 왜….”

“그냥. 경이 두 번째 생을 사는 중인 걸 알아봤다며. 날 보면 뭐라고 할까 궁금해서.”

“…겉으로 보기엔 한낱 시골 촌부입니다. 그 집이랄 곳도 꽤 누추한 곳이라….”

“에이, 동대륙 사람들 보기에 나도 그냥 돈 좀 많은 넓은 대륙 출신 여행자일 텐데.”

나는 동대륙 사람들이 위아래로 긴 자신들의 대륙과 구분하여 본대륙을 부르는 명칭을 언급하며 너스레 떨었다.

“그래도, 전하처럼 고귀하신 분께서 굳이 왕림하여 만나 보시기에는….”

“같은 사람인데 뭐 어때?”

내 여상한 대꾸에, 루시페우스는 제가 무언가 잘못 들은 건가 싶은 듯 얼어붙은 낯이 되었다.

‘아, 역시 이런 건 다를 수밖에 없나.’

아무리 내가 세실리아로서 22년을 살았대도, 이 세계를 익혀나간 이성은 전생의 감각에 기반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럴 때 참 신기합니다.”

루시페우스는 내 낯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이따금, 신분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씀하실 때가 많더군요. 사람들과 어울리심에도 그렇고….”

수도원에서도 그렇고, 태양제 장터 때도 그렇고…. 루시페우스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나는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내 전생에는 신분제가 없었어.”

“신분제가… 없다고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루시페우스의 낯은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응. 법적으론 모두가 다 평등한 거야.”

“모두가, 평등이라…?”

루시페우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세계에선 신분제가 없었던 적이 없으니 그에겐 너무도 낯선 이야기일 거였다.

신분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모두가 신분에 구애받는 이 세상에선 말이다.

“뭐, 돈이 많다거나 인기가 많다거나… 누군가가 뭔가를 더 가져서 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듯이 보일 수야 있지만, 법적으론 그랬어.”

“법적으로는….”

“부모가 누구이건, 어디 출신이건, 어떤 외양을 가졌건.”

루시페우스는 영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야 평생 후작 부자에게 차별을 당했고, 지금도 신분을 잃게 될 미래를 자연스레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평생 쌓아온 사고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야기여서일까.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내 말을 한참 곱씹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곳에선, 전하께서도….”

“응, 뭐…. 생활 수준만 따지면 여기 평민들이나 다름없었지?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서, 평범한 직장에 취직해서, 남들 버는 정도만 벌면서 살았으니까.”

“취직…을요?”

이치에 안 닿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그의 대꾸에 나는 숨죽여 웃었다.

이곳에서 취직이란 어디까지나 평민들의 일이었다. 귀족으로서 다른 가문의 가신이 되거나 보좌관이 되거나 하다못해 황궁 시녀 또는 시종으로 들어가는 것 모두, 전생의 취직과는 개념이 달랐다.

‘돈보다 명예를 더 생각하는 일이니까.’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루시페우스의 얼굴을 만지며 장난스레 말했다.

“게다가 내가 살던 나라에선 무조건 나이 많은 사람이 우선이었다고.”

“아하, 그래서 그, 상인이나 신관들에게….”

그제야 무슨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듯, 진지한 낯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의 낯이 더없이 귀엽게 느껴졌다.

‘이상하지, 진짜.’

처음부터 루시페우스는 내게만 사뭇 다르게 굴었었는데. 이따금 웃기도, 이따금 손을 잡길 청하기도, 이따금 말을 걸기도 하면서.

그땐 그저 그가 무섭기만 했는데.

지금이라고 해서, 그가 날 대하는 게 달라진 건 없는데.

‘아니, 더 가까워지기야 했지만….’

그리 생각하는 순간 대번에 또 쑥스러워져, 시선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전하께서 심복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에도, 그런 연유가 있겠지 싶군요.”

“으응, 그렇겠지? 뭐, 그만큼 오래된 사이기도 하고.”

“…하긴, 전하께서 그들을 발탁하신 게 저희가 저잣거리에서 처음 마주쳤을 무렵이던가요? 그때 황성이 떠들썩했다던데, 저는 바깥일은 잘 몰라서….”

아….

그러니까 그건, 루시페우스 어린이가 후작저에서 사람 취급 못 받던 시절의 일이었다.

아무리 그가 괜찮다고 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떨구고 난간을 짚은 손끝만 꼼지락거렸다.

“하지만요.”

그가 난간을 짚고 있던 손을 움직여 내 손에 하나씩 포개었다. 꼼지락거리던 손이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그 영식은.”

“그 영식?”

“그… 막심 블라우베르 경 말입니다.”

제 낯을 숨기려는 듯, 루시페우스는 나와 한쪽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바싹 다가섰다.

“그와는, 그래도…. 그리 격의 없는 사이는 아니시지요?”

“뭐?”

나는 말소리에 묻어나는 웃음기를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되물었다.

루시페우스가 하도 바싹 다가선 탓에 내 시야에는 작게 달아오른 그의 귀만 간신히 들어왔다.

진짜, 왜 계속 더 귀엽냐….

“제가 어렸을 때 처음으로 간 수확제의 연회에서 전하께서 그의 곤란을 구해주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다 기억해?”

“어찌 잊겠습니까. 그 덕에 전하께서 제 근처에 잠시 머무르셨으니, 그때까진 고마웠지만요….”

나는 웃음기에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전하께 몇 년째 연서를 보냈다질 않나.”

“연서라니, 그냥 내 밑에 자리 하나 얻겠다고.”

“전하께 반해서 청한 일 아닙니까.”

그제야 루시페우스가 한 걸음 물러나, 제 얼굴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의 반질반질한 미간에는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전하의 인품에 반했든, 업적에 반했든, 미모에 반했든. 반한 건 다 매한가지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아까 막심이 보고하러 온다고 할 때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더라니….

나는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쓰며, 그의 입매를 손끝으로 간지럽혔다.

“그가 내게 보이는 건 정말 충성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과 별개로 말이지?”

달래는 손길에도 그의 입꼬리는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내 휘하의 기사 그 누구도 내 침실 발코니에까지 온 자는 없어. 아무리 호위 업무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의 낯에 미세한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중 누가 쓰러진대도 내가 침상을 지킬 일도 없고.”

“일 초도 떠나지 않으셨다고요.”

딜런과 폴이 킬킬대던 소리를 기억해낸 듯 그가 읊조렸다.

어휴, 그것들.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감히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맞댄 적도 없고.”

그 말에 뒤이어, 그의 윗입술의 근사한 능선을 머금는 짧은 입맞춤. 그제야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늘어졌다.

남들 앞에서야 늘 단단하게 굳혀 둔다지만, 내 앞에선 늘 따뜻하고 다정하게 빛나는 이 아름다운 얼굴.

내가 만든 풍경에 벅차오르는 마음을 어쩔 수 없어, 나는 깊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그 경계심, 다른 쪽으로 돌려보자.”

“다른 쪽이라 하심은….”

“알비누스 소후작을 일단 단속해 놔야겠어.”

내가 도미닉을 언급하자, 루시페우스의 낯이 대번에 살벌하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 온화하게 풀어졌던 낯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또한 나로 인한 것이어서, 그의 볼에 대어둔 손끝이 두근거렸다.

“오늘 그 신관을 만난 덕에 알비누스를 공격할 수가 너무도 많아졌네.”

“신관을 겁박하여 성녀의 시해를 사주한 건 확실히 죄가 큽니다. 그 신관이 피해의 규모를 예측하지 못하게 한 것도 음흉하고요.”

“상자를 줬다는 걸 보니, 일종의 시한폭탄 같은 거였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또는 특정한 온도나 공간에 이르면 터지게 하는 걸 수도, 일정량 이상의 충격에 반응하게 하는 걸 수도 있고요. 마탑에 관련된 기술이 있으니까요.”

아까 킬리온의 두서없는 말소리에서 우리 두 사람이 같은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자작이 학자의 탑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서, 성녀의 생존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까지 공론화하면… 정말로 알비누스는 궁지에 몰릴 거야.”

“어떤 판결이 나기도 전에 귀족 사회에서 매장될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궁지에 몰린 자들은 어떤 비이성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까. 적어도 내 체질에 대해서는 입막음해 두는 편이 좋겠어.”

내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남자의 눈빛이 더없이 선득했다.

“그 일만은, 부디 제 방식으로….”

“마음대로 해.”

나는 작게 웃으며 그의 안경을 벗겨냈다. 쏟아지는 햇볕 아래서 그의 붉은 눈동자는 최고급 루비처럼 맑게 빛났다.

하지만 맨눈을 보인 것이 어지간히도 당혹스러운지, 루시페우스는 잠시도 나를 쳐다보지 못한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그걸 보는 내 낯에 떠오른 건, 내가 그에게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그가 짓는 표정과 흡사했을 거였다.

“경에게 일종의 복수가 될 수 있다면야.”

나는 그의 얼굴을 작게 당겨, 그의 눈꺼풀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레이디 헨리에테! 4황녀 전하께서 어지간히도 부려 먹으시나 봐?”

“정말 오랜만일세! 올 시즌엔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라마르 백작가의 여식 헨리에테 라마르.

7년 전 4황녀의 시녀로 발탁되며 황궁 생활을 시작한 레이디 헨리에테는 황성 사교계의 유명 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4황녀의 측근이라는 것부터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헨리에테의 매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식하고, 황실마저 아슬아슬한 농담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입담이 뛰어났으며, 시종장의 먼 친척이지만 딱히 어느 정파에 속하지도 않은 데다, 무엇보다 용모가 세련되었다.

“그러게요. 막내 전하께서 관료 놀음에 빠지시니, 저 같은 아랫사람만 죽어나는 거죠.”

헨리에테가 낭랑한 목소리로 재잘대는 너스레에 그녀를 둘러싼 귀족파의 신사들이 신나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제 주군마저도 희화화하는 그녀의 말재간에 귀족파의 인사들마저 그녀를 저들과 동류로 인식한 지 오래였다.

‘전하, 오늘도 죄송해요.’

신사들에게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헨리에테는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오늘의 목표물을 찾았다.

‘어디 보자. 수정 유통에 참여한 가문들이…. 아, 저기 있네.’

헨리에테의 시야에 들어온 건 윌로우 게이블스와 낄낄대고 있는 프렘린 백작의 둘째 아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