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7)
“…딱히 그렇지는.”
“경.”
나는 난간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갈 곳을 잃은 그의 손이 어색하게 허공을 맴돈 것도 잠시.
나는 대번에 그의 목을 답답하게 죄고 있는 크라바트를 쥐었다. 별 힘을 준 것도 아닌데 그는 순순히 내 손을 따라 고개를 내려주었다.
코가 맞닿을 거리에 그의 단정한 낯이 다가왔다.
“그럼, 내가 경을 위한답시고 황실이고 나발이고, 지금 하던 일 다 포기하고 같이 동대륙으로든 서대륙으로든 도피하자고 했다 쳐. 그럼 좋겠어?”
“그건….”
“그런 걸 원했으면 경이 흠결이 있네, 없네, 그런 걸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거잖아.”
“…….”
그의 낯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생각에 잠긴 그의 눈동자가 살포시 내리깔린 채 속눈썹 너머에서 고요히 움직였다.
“저는….”
그가 입을 연 건, 고개를 내게 내린 그대로 등을 빼 엉거주춤한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였다.
“저는, 전하께서 지금 누리시는 그 무엇도 저로 인해 잃지 않으시길 빕니다.”
그의 양손이 제 크라바트를 쥐고 있는 내 손을 모아 쥐었다.
“물론 그만큼 제가 전하께 영향을 끼칠 수야 없….”
“경.”
나는 다시금 그의 말을 끊으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수도원 앞 오솔길의 흙이 아직 묻어 있는 로퍼의 끄트머리가 그의 구두코를 지르밟았다. 밑창 아래로 내 발끝이 구두 너머 그의 발끝 위에 걸쳐 있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의 크라바트를 바싹 당기며 고개를 쳐들자, 코앞에 당황스레 경직된 그의 입매가 자리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아 그 입가를 코끝으로 살피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경은 참 희한한 재주가 있어.”
“…네?”
“난 원래 남자의 마음은 안 믿어.”
원래…요. 내 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그의 입매가 떨떠름하게 굳었다.
“하지만 경의 마음은 믿을 거야. 그 대가로 어떤 상처를 받는대도… 기꺼이 감내하기로 했고.”
“상처…라뇨, 제가 어찌 감히… 읍.”
늘상 그렇듯 그가 또 방어적인 말을 하려던 순간.
나는 그대로 턱을 치켜들어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붙였다.
당황으로 슬며시 벌어진 그의 아랫입술이 내 입술 사이에 담겼다.
그대로 그의 목뒤로 팔을 얽어 매달리자, 갈 곳을 잃었던 그의 팔이 천천히 내 등을 감싸 안았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제 품에 나를 묻는 깊은 포옹.
제 가슴팍에 내 몸을 본뜨려는 듯 깊디깊고, 한편으로 주체할 수 없는 감흥을 간신히 억누르듯 긴박한 몸짓이었다. 있는 힘껏 발끝으로 선 내 위태로움이 온전히 그에게 기대었다.
몇 번이고 베어 물어 오는 내 성마름에 제 입술을 내맡긴 채, 그는 그저 온순히 고개를 내게로 더 가까이 숙일 뿐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서로의 입매가 몇 번이고 맞물리며 가쁜 숨결이 얽혔다.
여유로운 듯 응하는 그를 당황케 하고픈 마음에, 나는 그의 목을 감은 팔을 더욱 바투 끌어안았다. 몇 번이고 집어삼키는 내 갈급한 충돌과 그걸 달래는 듯한 그의 느긋함이 점차 서로의 속도에 섞여들었다.
숨이 모자라, 잠시 그에게서 떨어졌을 때.
“근데 말이지.”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하던 말을 이었다.
낯이 발갛게 달떴을 테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경이 내 마음을 못 믿으니 오기가 생기네.”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그 입가에 헛헛한 웃음이 어리더니, 단단하고 큰 손이 내 볼을 낙낙히 감쌌다.
“그야 전하께서도 저를 계속….”
무슨 생각으로 이어졌는지, 거기서 그의 대꾸가 멎었다. 따스하게 휘어져 있던 그의 눈매가 천천히 굳었다.
어느새 그의 낯에 들어찬 건, 기울어진 햇볕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함.
루시페우스는 한동안 그렇게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너머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눈동자를 관찰하는 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오후의 태양을 등져 어둑한 그의 낯 한가운데서 안경 너머의 눈동자만이 희미한 열기를 띠었다.
벅찬 애정일까, 깊은 회한일까.
그 눈빛이 너무도 진득하여, 나도 덩달아 눈을 조심히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열기 띤 한숨과 함께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제가 어찌 믿겠습니까.”
“으응?”
예상치 못한 그의 말소리에 내가 멈칫한 순간. 그간 제대로 깜빡인 적 없던 그의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
“전하께선 제게… 꿈 그 자체셨는걸요.”
내 볼을 감쌌던 그의 손이 내 귓바퀴를 쓸었다. 초가을의 산들바람에 흐드러지던 머리칼이 그의 손에 가라앉았다.
“저는 사실 지금도 매일이 믿기지 않고. 전하와 다음을 기약하는 일도, 제가 불쑥 찾아뵈어도 전하께서 피하지 않으시고 반겨주시는 이 하루하루가… 너무도 꿈결 같은데.”
내 머리칼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을까. 루시페우스의 시선은 어느새 내 머리칼과 얽힌 제 섬세하고 기다란 손끝에 붙박여 있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늘 그러하듯 장갑을 벗은 그의 손은 단단한 상아처럼 희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면 혹시 그 모든 게 하룻밤 꿈은 아니었을지, 제가 애타게 바란 나머지 너무도 생생한 망상을 만들어낸 건 아닌지 한참을 고민하게 되는데.”
드문드문 이어지던 읊조림 끝에 그의 손이 천천히 말려들었다. 그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내 머리칼이 올올이 걸린 채.
그때, 그가 내 등을 받치고 있던 팔을 당겼다. 어엇, 하는 사이, 나는 불꽃놀이를 보러 가던 그때처럼 그의 발 위에 온전히 올라서게 되었다.
더는 가까워지기 어려운 간격이었다.
“이 순간 역시, 주마등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황홀하기 그지없군요.”
말을 마친 그의 입맞춤이 내 눈꺼풀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황실의 보석이 저를 담고 있는 것도. 전하께서 저를 동정하시는 게 아니라 기꺼이 마음의 일부를 내주셨다는 것도. 제 모든 외로움을… 기억하신다는 것도.”
“아니, 그건….”
루시페우스가 어린 시절을 읊을 때면 해묵은 죄책감이 목구멍에 치받히곤 했다. 순식간에 내 낯이 울상이 되고 말았을까.
그의 입매가 엷은 미소를 그렸다.
“저는 절대로, 다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치만….”
그가 손을 털어 내 머리칼을 떨구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다시금 머리칼이 흐늘흐늘 나부끼자, 루시페우스는 내 뒤통수를 쓰다듬듯 머리칼을 가다듬어 주었다.
규칙적인 손놀림이 마치 어르고 달래는 다정함으로 느껴졌다.
“전하께서는 그리도 배움이 빠르시면서. 어째서 제가 괜찮다는 건 그리고 못 믿어주시는지….”
“경도 못 믿겠다며?”
“…그거야.”
그의 눈썹이 야트막한 사선을 그렸다. 양쪽으로 늘어진 입꼬리가 흐물거렸다.
“예, 제가 과욕을 부렸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지.”
나는 그의 어깨에 걸어두었던 손으로 그의 옷깃을 쓸듯이 움직여, 빗장뼈가 맞물린 부분을 짚었다. 아까 크라바트를 잡아당긴 바람에 느슨해진 옷깃 너머로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내가 믿기로 했으니까, 그만큼 경도 믿어보지 않을래?”
“제가 전하를 어찌 감히 믿지 않겠….”
“아니.”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 나는 그의 목울대로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을 꾹꾹 눌렀다.
“은사를 졌다거나 황제의 딸이라거나 그런 거 말고. 그냥 한 사람으로서의 나 말이야.”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거였다면 세실리아의 얼굴마저 번외로 놓자고도 하고 싶겠지만…. 루시페우스는 나와 마주친 적 없을 때조차 나를 그리워했다고 하니까.
그가 이 벅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어쩌면 진짜 ‘나’이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말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루시페우스는 알까?
아무려면 상관없었다. 사실 나조차도 그걸 굳이 구분하고 싶은 내 심리를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
나는 그저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댄 채 그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덧붙였다.
“그러니까, 경의 기쁨과 슬픔에, 내 기쁨과 슬픔을 걸기로 한 나.”
느릿하게 내 머리를 쓸던 그의 손이 멎었다. 나는 그의 낯에 어떤 기미가 피어오를까 싶어 조심스레 살폈다.
“물론, 쉽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어떤 면에서 나와 루시페우스는 닮아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쓸모를 강박적으로 고민했고, 쓸모가 없더라도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리란 상상을 하지 못했다.
내가 그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그가 나를 마음에 담았다 믿는 것처럼, 그 또한 제가 강하고 유능하기에 내가 그를 허락했다 믿을 터였다.
“그렇지만, 나도 노력해볼 테니까. 경도 천천히 해보면 어떨까?”
나는 한 단어 한 단어 꼭꼭 씹듯이 내뱉었다. 그가 언제고 이 말을 기억해낼 수 있도록.
그래서 제가 나의 그 무엇도 다 괜찮다고 말하듯, 나 또한 저를 무조건 믿는다는 걸 기억하도록.
내 말이 이어지는 내내, 루시페우스의 낯에 밴 건 작은 혼란이었다. 한참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그는, 뭐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지금 떠나시겠습니까?”
“응?”
“그, 동대륙이든 서대륙이든. 어디든요.”
“뭐어?”
갑자기 아까의 내 과장을 읊는 말에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내가, 어? 분위기 다 잡아놨는데, 갑자기 산통을 깨?
하지만 그것도 미울 리가 없었다. 나는 황당하다는 낯으로 피식 웃었다.
“그게, 아까 그리 말씀하셨을 때… 정말로 아주 잠깐 상상했을 뿐이지만, 설레는 건 부인할 수 없더군요.”
“어머, 그사이 상상까지?”
내가 부러 호들갑을 떨었음에도 그의 낯은 여전히 진중했다.
“그게, 정말로 황실이고 무엇이고, 제가 감히 전하의 곁을 넘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던 그 어려운 것들을 다 잊고 나면… 정말로, 전하와 저의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은 곳 어디로라도 떠나고 싶어져서 말이지요.”
내 머리를 감싼 채 멎어 있던 그의 손이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 목뒤를 감쌌다.
“그리고 한 가지 정정할 것은.”
그 부드럽고 단단한 손이 내 머리를 받치며 제게로 당겼다. 그 손길에 턱이 들리며 깊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조급하게 달려들던 나를 달랠 때와는 확연히도 다르게, 뜨거우리만치 진한 소유욕과 애정이 깃든 단 한 번의 접촉이었다.
천천히 내 입술을 머금었다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떼어낸 뒤.
“기쁨과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입니다.”
네, 행복…. 숨길 수 없는 애정에 담뿍 젖은 눈빛으로 웃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원래 슬픔이 뭔지 모르고 자랐고. 전하께서 제게 이리도 가까운 자리를 허락하셨으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쪽, 마침표와도 같이 코끝에 내려앉은 입맞춤.
그러고서 루시페우스는 나를 안아 올려 발코니의 난간에 앉게 했다. 나를 가두듯 난간을 짚고서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낯에는 소년 같은 장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를 따라 나도 수줍게 웃었다.
말로야 내 마음을 믿어달라고 했지만, 그건 기실 나 스스로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전생의 슬픔에 사로잡혀 자꾸만 방어적으로 오그라드는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토록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마음이 그리도 오래됐으며 그리도 깊은데.
그러니까, 정말 괜찮을 텐데.
“…그럼, 진짜로 가볼까?”
“네?”
“서대륙보다는 동대륙이 낫겠지? 경이 한번 가봤으니까.”
내 갑작스러운 말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루시페우스는 뻣뻣한 낯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