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6)
“그게….”
루시페우스는 잠시간 고장 난 듯,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그건 늘 그가 하는 말이었지, 내가 언급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루시페우스를 잠시 붙박아 두고서, 나는 헨리에테에게 손짓했다.
나한텐 나만의 방법이 있지.
“헨리에테. 이번 주 사교 모임, 어떤 게 있지?”
“가장 큰 건 모레 황성 주간지 건물에서 리히트 백작가가 여는 자선 파티입니다. 내일 그렌트우드 백작 부인의 살롱이 열리고, 사흘 뒤에는 롬멜 백작가에서 레이디 그레타가 다과회를 열고요.”
“그렇다면?”
“자선 파티라면 귀족파에서도 많이 참여할 테니까요. 거기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헨리에테가 나를 대신해 사교계의 눈과 귀가 된 지도 벌써 7년이 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어떤 행동을 원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렸을 거였다.
“수정 광맥을 발견했다거나, 질 좋은 수정을 선물받았다거나… 판로를 찾는 척하면 좋겠지. 수정 값이 아직 떨어지지 않고 있으니 투자하고 싶다고 나서는 것도 좋겠어.”
“맡겨주세요.”
헨리에테의 짤막한 말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페우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역시나, 그는 꽤 의아해하는 낯이었다.
헨리에테는 바깥에서 보기에 그저 사교 활동을 즐기는 내 시녀 겸 비서관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까.
“우리 라마르 영애가 사교계에서 파벌 안 가리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인물이잖아?”
“…레이디 헨리에테가 재담가라는 사실이야 사교계에 유명합니다만.”
루시페우스의 말소리는 그의 판단이 아니라 주입된 사실을 읊는 듯 울렸다.
“재담가라서 유명해진 게 아니라, 유명해지기 위해 재담가가 되었지.”
“전하 덕분에 제가 재능을 깨우쳤죠.”
그리 말하는 헨리에테의 사무적인 어조는 재담가라는 세간의 평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였다.
“헨리에테에게 접근하는 이들이 있다면 귀족파 중에서도 수정 거래에 꽤나 진심인 가문일 테니, 그쪽 중심으로 알아보면 될 거야.”
“하지만 전하, 너무 심력을 기울이시게 되는 것 아닙니까.”
루시페우스가 꽤나 걱정스러운 낯으로 말했다. 물론 그 변화가 미미하여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거지만.
“정말로, 그 정도 알아내는 건 제게 일도 아닌데요. 다른 가문들까지 제가 다녀갈 경우를 방비하진 않았을 테니….”
“경의 도움이 결코 가벼워 보여서 그러는 게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이 있고, 그 과정에서 분명히 예기치 못하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어.”
내 말에 딜런과 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보원들의 말투나 눈짓 같은 비언어적 메시지도 중요했고, 타깃들이 은연중에 흘리는 이야기도 도움이 될 거였다.
우리의 완고한 기색에 루시페우스는 여전히 아쉬움을 풀풀 풍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을 더 보태지도 않았다.
나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장에 생각나는 거라면…. 지금 수정 값이 오를 대로 올랐으니 계속 사들여서 그 가격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한 다음, 일시에 팔아서 한탕을 노리는 건데.”
“그런 거라면 제가 투자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편이 낫겠네요.”
“응응. 좋은 미끼가 되어봐 줘. 경제사범으로 엮어 넣는다면 그림이 더 아름답겠네.”
나는 전생에서 소액 투자자들을 노리던 주식시장의 작전주 세력을 떠올렸다.
‘문제는, 이들이 한탕을 친다 해도 대륙을 뜰 리가 없다는 건데….’
게이블스라는 아수라마수라의 오랜 명문가 중 하나가 그 대열에 껴 있으니 말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허물이 게이블스를 향하는 걸 확인하면 좋겠어. 그들의 진짜 목표가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고 해도, 귀족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독과점 횡포를 저지른 셈이니까. 수정은 단순한 사치재도 아니고.”
“그렇죠. 올해도 조만간 성기사단에서 파견 나갈 텐데, 기사단도 원정 준비하느라 고생이겠네요.”
폴의 대꾸에 나는 한쪽 손끝으로 톡톡 반대편 팔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한번 다녀오면 수정의 반 이상은 못 쓰게 된다는 거니까. 성기사단 예산을 축내려고 수정을 계속 독점하나? 그건 수가 너무 조야한데….”
“전하.”
“괜찮대도. 일단 정석대로 가볼게.”
루시페우스는 어떻게든 내가 고민하는 게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당장 필요한 건 게이블스 후작을 공격할 무기를 하나라도 더 찾는 거니까. 좀 더 살펴보고, 정말 경의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말할게. 아직 말미가 남았잖아. 그렇지?”
“…….”
불만스러움이 은은히 배어난대도 침묵은 긍정이었다.
말미. 그러니까 그의 지난 생에서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강제로 연 것은, 성기사단이 달의 공전 주기에 따라 짙어지는 마기를 잠재우기 위해 파견 나갔을 때의 일.
애초에 수정을 모은 것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기 위해서였던 만큼, 루시페우스는 그 시기를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올해 두 달이 함께 그믐이 되는 게 다다음 달 초니까. 성기사단이 진군하는 기간을 고려해도 한 달 정도가 남은 셈이지.’
한 달이면,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보름마다 열리는 원로원 의회도 최소 두 번은 열릴 테니까.
“여차하면 경이 도와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헨리에테나 내 기사들이 마음 편히 움직일 수 있게 됐지 뭐야.”
“마, 맞아요! 도와주시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네, 어쨌든 저희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거니까요!”
내 기사들의 급조된 너스레에 뒤에서 헨리에테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아무리 살갑게 군대도 루시페우스에게 별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걸 다른 데 쓰려는 거라면, 분명 큰 움직임이 있을 거야. 그럼 우리도, 경도 모를 수가 없을 테고.”
“…제 나름대로 알아는 보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진 말고.”
내가 말하는 ‘무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들은 듯, 루시페우스는 조금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그는 제 마법 실력을 두고서 쓸모를 주장했으니, 그걸 선보이지 못하는 게 아쉬운 듯했다.
‘달래 줘야겠네.’
나는 속으로 쿡쿡 웃으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내일 에스메르로 출근하면 일과 마치고 보고하러 오라고 마르탱에게 전해줘.”
“넵.”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응, 고생들 많았어.”
딜런과 폴은 고개를 꾸벅여 보인 뒤 그대로 집무실을 나갔다. 용건이 끝났으니 문밖에서 경호하기 위함이었다.
달칵, 문이 닫힌 소리가 난 직후.
“전하, 저….”
기다렸다는 듯이 헨리에테가 말했다.
“황태자 전하 보좌관실에 제출할 서류가 있어서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응? 무슨 서류?”
“음, 보좌관들끼리 보고하는 그런 서류랄까요…?”
“에엥? 황태자 전하께는 내가 조만간 정기 보고 올릴 건데?”
내가 의아하다는 낯으로 헨리에테 쪽을 돌아보았을 때.
“…아.”
헨리에테가 루시페우스 쪽과 문 쪽을 번갈아 가며 눈짓하는 것이….
‘자리 비켜준단 소리구나.’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한 채 고개만 홱 돌렸다. 또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았을 게 빤했으니까….
“그, 그래, 다녀와.”
헨리에테는 진짜로 무슨 서류를 챙기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그길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뭐, 헨리에테도 이 김에 잠깐 바람도 쐬고. 좋은 거지. 복지 최고네.’
나는 이 상황이 자못 쑥스러워서 속으로 수선을 잔뜩 떨었다.
‘역시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달칵, 헨리에테가 나간 뒤 집무실 안에는 짧은 적막이 흘렀다.
열여섯 살 때부터 늘 기사들과 복작대던 넓은 공간에 루시페우스와 단둘이 있으니 아무래도 느낌이 묘했다.
이곳에서 그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공공의 적 취급이었는데….
‘지금은….’
눈동자를 굴려 루시페우스를 살피니, 단둘이 남아서인지 슬며시 풀어진 그의 자태는 어딘지 느른해 보였다.
이윽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이 어색함이 쑥스러움인지 뭔지 명확해지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갈래?”
“…예.”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한쪽 입꼬리가 벅참을 눌러 내린 듯 근사하게 올라가 있었다.
집무실의 발코니는 황궁 뒤편 숲과의 경계가 되는 담벼락을 면하여, 그 앞에 자라난 키 큰 정원수들이 시야를 한가득 메우는 곳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이따금 찾아들던 내 발코니와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공간.
황궁의 한쪽 끝인 만큼, 자연히 이쪽으로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그 때문에 데이베드를 설치해 이따금 바깥 공기를 쐬며 휴식을 취하곤 하는, 진정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슬슬 가을이 오려나 봐. 바람 끝이 차네.”
나는 발코니의 난간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말에 호응하듯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어 금세 뜨거워졌던 머리칼이며 얼굴이 살포시 식어 내렸다.
발코니 문을 닫은 루시페우스가 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얼굴 위로 손그림자가 졌다.
“왜, 볕 쬐고 있었는데.”
“눈 아프실 것 같아서요.”
“아냐, 딱 좋은데.”
내 말에 루시페우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내 낯에 안 좋은 기미라도 떠오를까 염려하는 건지 손을 물리는 내내 그의 시선이 꼼꼼히 내 얼굴을 살폈다.
“괜찮대도.”
“가을볕이 더 따가운 법이라지 않습니까.”
“…걱정도.”
햇볕을 쬐자니 나른해져서, 나는 난간 위에 걸쳐둔 팔에 턱을 괴었다.
‘아아, 이제 좀 쉬는 것 같네.’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킬리온이며 기사들과 대화하느라 머리도 팽팽 굴리고.
루시페우스가 계속 회복시켜 주었다지만 하루에 겪은 일이 많으니 심적으로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피곤해하실 거면서. 저를 쓰시면 쉬운 일 아닙니까.”
그리고, 이 남자는 눈치 빠르게도 그걸 다 알아챈 모양이었다.
나는 쿡쿡 웃으며 얼굴을 더욱 파묻었다.
“정신계 마법이 뭐 좋은 거라고 계속 쓰려고 그래.”
“그래도 그게 가장 확실하니까요.”
“말했잖아. 증언 외적인 것으로도 살펴야 할 것들이 있고, 무엇보다….”
나는 팔에 머리통을 묻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보았다.
한쪽 팔을 걸치고서 난간에 기대어 있던 그는 내가 얼굴을 보이기만을 기다린 눈치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눈동자에 작은 생기가 피어올랐으니까.
“경이 정신계 마법 쓰는 거, 내가 안 괜찮아. 그거 썼다고 할 때마다 경 표정이 안 좋은걸.”
“제가 무슨….”
볕을 모로 받아서인지 평소보다 더 굴곡진 남자의 인상이 은은하게 굳어졌다. 그건 멋쩍음과 당황스러움 정도로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야 비슷비슷한 무표정이겠지만, 내게만은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해서일까. 그 낯에 피어오르는 작디작은 변화만으로도 그의 심사를 파악하게 된 지 오래였다.
“세르니타에서도 그랬고, 에스메르에서 우리가 방화한 거, 마법 감식 결과 은폐했다고 했을 때도 그랬고.”
“그거야 다 전하께 필요한 일이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내게 필요하지 않았다면 안 하고 싶은 일이었을 거 아냐.”
시인하기 싫어서인지,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손을 뻗어 내 귓바퀴를 훑었다.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이 몇 번이고 그의 긴 손가락에 얽혀들었다.
“세르니타에서 경이 마법 걸었던 자들이 안전하게 돌아갔다고 했을 때. 경이 얼마나 안도한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