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58화 (158/220)

158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5)

딜런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하는 말소리에, 폴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아니면, 이제는 저희보다 연인을 더 믿으시는 저희의 주군?”

“경들!”

나의 새된 말소리에 딜런과 폴이 히죽 웃었다.

이것이 요즘 암조의 분위기였다. 틈만 나면 나를 못 놀려서 안달인….

나는 황당함에 소파에 몸을 묻으며 이마를 꾹꾹 짚었다.

헨리에테가 두통약을 챙기려는 듯 부스럭대었으나, 그녀 역시 남몰래 웃음을 삼키는 것이 다 느껴졌다.

그래. 놀려라, 놀려….

‘연인은, 뭐, 아니지만….’

그리 생각하며 손가락 틈으로 루시페우스의 낯을 살피니….

‘…아. 루시페우스는 암조 애들이 이러는 거 처음 보겠지.’

묵묵히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그의 낯에 깃든 건, 쑥스러움과 당혹감처럼 보였다.

나야 내 기사들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그러려니 하지만.

‘…내가 잘 정리해야지.’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엄한 목소리를 냈다.

“작작 좀 해. 어쨌든 루시페우스 경은 손님이고, 선의로 우리 일을 도와주는 것뿐이니까.”

“선의…, 예에.”

“그렇다고 하지요.”

“…….”

그림자들은 대부분 직속 소대 3기 이후의 기사들이 도맡았다. 그래서 케인이나 엘런 같은 1기 기사들보다 연배가 낮았다.

연배가 낮다는 것은 나와 비교적 또래라는 거였고, 그래서인지 놀려대는 건 그림자들이 제일 심했다.

헨리에테가 바싹 다가와 두통약을 찻잔 받침에 놓아주고 나서야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 아까 은신 흐트러진 것도 문책당할 사안이긴 하지만. 경들의 직속상관도 없었고, 수도원이니 위험할 일도 없었고, 돌발 상황이었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내가 차분하게 조목조목 상황을 되짚자 딜런과 폴이 사뭇 긴장한 기색이 되었다.

“아까 본 것 말이야.”

두 기사는 아닌 척 눈동자를 굴려 루시페우스를 흘끗대었다. 정작 루시페우스 본인은 고요한 몸짓으로 찻잔에 입을 묻을 따름이었다.

“일단, 당분간은 비밀이야.”

“네.”

“네엡.”

그리 대답은 하면서도, 두 기사의 눈동자에는 궁금해 죽겠다는 기색이 선연했다.

둘이 서로 눈짓하는가 싶더니, 딜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이라면…?”

“경들도 알게 됐고, 그 신관이 알비누스에게 빨간 눈을 빌미로 협박당한 걸로 추정되는 이상… 조만간 암조 전체에 공유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잠시 함구해줘.”

그렇게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루시페우스는 묵묵히 눈만 내리깔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마차로 내려오는 길에 그림자들을 단속해 두겠다고 그와 이야기해둔 참이었다.

“전하의 뜻에 쓰이는 이상 제 비밀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오래간 지켜주신 만큼 긴요하게 쓰시겠지요.”

그리 말하며 내 손을 꼭 쥐던 것이 떠올라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그건 내가 제 흠을 폭로하지 않으리란 믿음이라고 했지.’

동시에 그 신뢰가 향한 곳은….

“제가 어떤 형태로든 전하의 곁에 있으려면… 조금의 흠결도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함께하는 미래…였기에, 그 심사를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꽤 쑥스러워졌다.

갑작스레 흐른 생각에, 내가 절로 낯을 붉힐 무렵.

이번에도 딜런이 대표로 물었다.

“그, 전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겁니까?”

“응.”

나는 부연 설명 없이 대꾸하며 생긋 웃었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일축이었다.

그가 빨간 눈인 걸 내가 언제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이 최근 학자의 탑과 공조하여 연구 중인 것과 연관이 있는지…. 그중 무엇도 사실대로 답할 수 없었으니까.

‘어차피 말해봐야 거짓말일 테니까. 루시페우스가 킬리온 앞에서 내가 평생 지켜줬다고 했지만, 비유적으로 들렸을 테고.’

아기 때부터 알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열 살 때 저잣거리에서 봤다거나 아카데미에서 봤다고도 말할 수 없고.

그간 내가 루시페우스를 암조의 최고 주의 대상으로 두고 감시한 걸 생각하면, 그런 크나큰 비밀을 알고도 내 수하들에게 함구한 셈이라 퍽 곤란했다.

‘그가 빨간 눈인 것과 귀족파의 음모를 수행한 건 별개의 문제라 말하지 않은 거였지만.’

물론 그간 그가 후작에게 충성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있었고, 실제로 그가 후작과 협력함으로써 얻고자 한 게 그의 체질과 아주 무관한 건 아니었지만….

‘그건 단순히 빨간 눈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다시금 루시페우스의 낯을 살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탁자 한쪽 구석에 시선을 붙박고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또 다른 빨간 눈을 마주한 것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수도원에서 떠나온 이후 그는 이따금 혼자 생각에 빠지곤 했다.

‘…빨간 눈의 마을에 관한 것까지 이야기했다면 더 혼란스러웠겠지.’

학자의 탑의 관행상 아직 공개하면 안 되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가 마음껏 상념에 잠기도록 내버려 두고서, 기사들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그럼, 그, 쓰고 계신 게 마도구…인가요?”

그때, 딜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헨리에테가 듣고 있는 걸 생각해 에둘러서 물어보는 듯했다.

“맞아.”

“하긴, 저번에 세르니타에서 돌아오고서 전하께서 계속 붙어 계셨으니 그때 아셨나?”

“그때도 우리가 그림자였지? 진짜 일 초도 안 떨어지셨는데.”

“우린 못 봤는데, 어떻게 아셨지?”

그리 대거리하며 딜런과 폴이 키득거리는 것이었다.

그런 소리는 너희끼리 있을 때 하지 않으련?

나는 기사들을 눈으로 윽박지르며 용건을 이었다.

“아무튼, 전체 회의 때까지만 조심해주고. 내일은 에스메르 쪽으로 출근하지?”

“옙.”

“네에.”

그림자들은 비번인 날엔 일반적인 암조의 업무를 수행하니, 그들도 내일은 3소대의 일을 하러 가야 했다.

“아까 들었겠지만, 알렉스가 며칠 후에 복귀할 테니 그간 수정 거래 흐름 관련 사항은 내가 직접 챙길 거야. 마르탱에게도 그리 전하고.”

“네. 저희 소대 업무 중 다른 쪽은….”

“당장 급한 건 학자의 탑 쪽인데. 안 그래도 막심 경이 이따 보고하러 오기로 했으니, 내가 따로 말할게.”

찻잔을 내려놓던 루시페우스가 흠칫 굳어서 내게 시선을 던졌지만, 나는 거기에 크게 주목하지 못했다.

“에스메르에서는 어디까지 알아봤어?”

“저희도 내일 출근해봐야 알긴 할 텐데….”

딜런이 폴에게 눈짓했다. 셈이 빨라 에스메르 쪽 일에 보다 해박한 폴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네, 어제 듣기로는 세르니타하고 오겐 쪽까지는 파악 완료됐다고 합니다. 유통된 흐름은 있는데,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수정 보관처가 바뀌어서 아직 실물을 확인하지 못했다고요.”

“그럼 남은 곳은?”

“게이블스랑 알비누스를 제하면, 저, 루시페우스 경께서 지목하신 가문들 중에는 위테르트, 프렘린, 앙블렌, 롬멜… 정도가 남겠네요.”

흐음, 나는 침음하며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끝을 톡톡, 구르기 시작했다.

루시페우스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건을 그만두기로 한 것이 벌써 보름도 더 전의 일.

직후 알비누스 상단에서 다량의 수정을 사들였지만, 그건 루시페우스가 후작과의 거래를 파기하기 전에 체결된 거래였음을 확인했다.

한데 귀족파에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하여 수정을 사들였고, 그게 영 미심쩍어 루시페우스에게서 수정에 투자하는 가문의 목록을 받은 차였다.

‘하나같이 암조에서 감시하던 가문들이어서 추적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문제는 수정을 매입한 경로도, 수정을 보관하던 장소도 모두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경매 같은 데서 사들인 수정은 모두 각 가주들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최근에 매입한 광산에서 채굴한 원석은 각 가문이 투자한 상단을 통해 유통하고 있었는데. 그게 모두 자취를 감췄지.’

암조의 기사들은 몇 년 동안 식자재상의 허드렛일꾼, 우편배달부 등으로 위장하여 각 가문의 사용인들과 가까워진 후, 그들이 중요한 줄도 모르고 내뱉는 이야기들을 모아 정보로 가공했다. 길드를 통해 사람을 고용하여 각 가문에 위장 취업시키기도 했기에 그 정보는 교차 검증까지 치러졌다.

그 햇수가 벌써 한 손으로 다 못 꼽게 된 만큼 정보의 신뢰도도 계속 올라가던 차였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구한 정보가 소용없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이람….’

톡, 톡, 톡, 내가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귀족파에서 음모의 일환으로 수정을 사들인 것은 원작, 아니… 루시페우스의 지난 생을 기록한 그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이 생을 겪으며 알아낸 정보를 통해 직접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수정의 거래 흐름에 주목한 것부터가, 귀족파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갖고서 음모를 꾸미는 것 같다고 운을 떼기 위해 근거를 만들려다가 그리된 거였으니까….’

실제로 수정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최근에 루시페우스에게서 들어서야 알게 되었고 말이다.

나는 루시페우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아까부터 발언권을 얻길 바라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경.”

“쉬운 일입니다. 후작 부자에게 접근하는 것도, 그들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것도.”

나는 미소를 띤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밀히 말해… 후작 부자가 바보가 아니라면, 에스메르와 내 관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어.”

“그건, 정말로 제 불찰….”

“아니, 경 때문이 아니야.”

루시페우스가 반사적으로 사과하려는 듯해, 나는 재빨리 말을 막았다.

“에스메르가 내 영지인 메르제령에 본사를 두고 있고, 또 이르겐트에서 정보 값으로 내 하사품을 냈지.”

“이르겐트와의 일은 제가 관리했습니다.”

“아직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르겐트는 친귀족파 집단이고, 후작과도 연이 닿아 있을 거잖아?”

“…….”

내 말에 반박할 수 없는지, 루시페우스는 침음을 삼킬 따름이었다.

“물론 경이 나선다면, 경이 알아본 흔적까지 지울 수 있으니 정말 믿음직할 거야. 하지만 그자들이 거기에 대비하지 않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

“…부인할 수 없군요.”

루시페우스가 마법을 쓰기 전에 그와 맞닥뜨렸음을 기록할 방도를 세워뒀을 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주시하는 이들을 배치했을 수도 있었다.

도미닉만 해도 마도 기계를 쓰고, 마검사 또한 고용해 두었으니 말이다.

“다른 가문들도 알아봐야겠지만, 비슷한 사정일 확률이 높겠지…. 하나같이 수정을 빼돌렸다면, 아마 한곳에 모아 뒀으리라 가정하고 알아보는 게 좋겠어.”

“그럼, 최근 각 가문에 있었던 수상한 움직임을 다 확인해 볼까요?”

“음, 경우의 수가 너무 많은데….”

폴의 말에, 내가 팔짱을 끼면서 중얼거릴 때였다.

“전하, 역시 제가.”

아니나 다를까, 루시페우스는 또 정신계 마법을 들먹일 기세였다.

‘대외적으로야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들킨 적이 없다지만, 알비누스에선 루시페우스가 나를 위해 행동하리라 의심할 텐데 말이야.’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도미닉에게 들킨 전적이 있으니 말이다.

루시페우스는 분명 내게 가장 강력한 아군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적에게 너무 잘 알려진 패였다. 섣불리 그에게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하는 심사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경.”

“예.”

루시페우스는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받아들일 기세였다.

“흠결이 없어야 한다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