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57화 (157/220)

157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4)

“매번 제 예상 밖이셔서….”

과장하여 한숨지은 그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움직여 몇 가지 마법을 걸었다. 등 뒤가 단단해지는 것이, 내가 좌석에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해둔 것 같았다.

어느새 장갑을 벗은 그의 긴 손가락이 내 관자놀이를 쓸었다. 내 머리칼이 몇 번이고 그의 손끝에 얽혀들었다.

산길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만이 얼마간 이어졌을 무렵.

나는 아까부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조심스레 꺼내었다.

“아까 말이야. 갑자기 왜 그랬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눈 보인 거 말이야.”

그림자들도 다 보고 듣게 놔두고서…. 그리 덧붙이며 나는 루시페우스의 낯을 살폈다.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우선, 전하의 사람들이 제 비밀에 대해 아는 것쯤이야 저는 정말로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번번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놀라는 소릴 듣는 것도 달갑진 않을 텐데.

루시페우스가 작게 웃으며 내 눈썹을 덧그렸다. 명백한 사선이었다.

“전하의 말씀을 듣고 그를 살피니… 마력이 응축된 양상이 보이더군요. 마치 제가 신성력을 눌러두고 있는 것처럼요. 그전까지는 그냥 평범한 수준의 마력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도박을 해봤습니다.”

“마력이 꽤 많았어?”

“저만큼은 아니지만요. 전하의 본모습을 눈치채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렇구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도 그렇고, 루시페우스도 그렇고. 신성력이며 마력이며 하나도 없는 나로서야 상상도 못 할 걸 본다니 번번이 신기했다.

“그 정도의 마력으로도 도청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그분이 마법을 익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청도 신체를 강화하여 행하는 것이라 본다면, 신성력을 운용하는 방식으로 마력을 썼을 수도 있겠습니다.”

“경이 마법 술식에 신성력을 섞는 것처럼 말이지?”

“옳으십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 비밀을 유출한 건 킬리온이 맞고, 그건 그가 알비누스 후작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어서였다. 두 사람 사이의 다른 연결고리는 없는 모양이니, 다행히 말이 더 새진 않았을 거였다.

“그런데 아까 그더러 백부라고 했잖아. 그건 무슨 소리야?”

내 이마를 간지럽히듯 오가던 루시페우스의 손길이 우뚝 멎었다.

“혹시 그가… 알비누스 선대 후작의 혼외자기라도 한 거야?”

“…좀,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그리 대꾸하는 루시페우스는 일찍이 그에게서 본 적 없는 낯이 되었다. 씁쓸함과 괴로움, 착잡함 같은 것들이 거기에 범벅돼 있었다.

“스스로를 형이라고 칭하기에 짐작한 것이긴 합니다만….”

아, 그럼 큰 확신을 갖고서 한 말은 아니었구나? 내가 가볍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려던 찰나.

“…후작은, 사실 선대 후작의 친자가 아닙니다.”

“뭐?”

나는 깜짝 놀라, 잔뜩 일그러진 눈매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루시페우스의 낯에는 씁쓸한 미소가 빛났다. 그의 손끝이 내 눈초리를 달래듯 살살 문질렀다.

“후작의 수많은 죄 중 가장 가벼운 것이어서 굳이 말씀드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을 처단하시게 되었을 때, 가장 강력한 보탬이 될 사실이라 필요한 때 반드시 말씀드리려 했었죠.”

“…왜, 그 증거만 있다면 당장에 후작 부자를 귀족 명부에서 파내고… 아.”

“네. 선대 후작께서 돌아가셨으니 증거랄 것이 없지요. 저와 혈연이 없음을 증명해봐야 저를 잘라내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맙소사. 경은 그걸….”

“지난 생에 알게 되었고요. 제가 당한 배신이 그거였습니다.”

루시페우스는 느릿하게 지난 생의 제 최후가 어땠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어머니의 유해가 수습된 곳을 찾으려면 마도구의 정확도를 올려야 했기에 그의 피를 얻으려 했다는 것.

지난 삶에서 그의 모든 행위는 오로지 그걸 위해서였다는 것.

그래서 후작과 거래한 대로 모든 걸 이룬 뒤, 그 대가로 후작의 피를 받으려던 때… 후작과 제가 혈연이 아님을 알았다는 것.

삶의 목표를 다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그를, 후작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균열로 밀어 넣었다는 것.

“그럼, 후작과의 거래에서 사기당했다는 게.”

“네. 후작에겐 제 어머니와 통하는 피가 없었으니까요.”

“…맙소사.”

그는 내내 별거 아니라는 듯, 그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덤덤히 읊었지만… 듣는 나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너무 다르잖아.’

원작에서는 레오폴트를 끝까지 질투하여 그를 죽게 하려다가, 되레 제가 마수들에게 휩쓸려 죽었다고 돼 있었는데.

‘도대체 원작은 뭐였던 거야?’

내가 전생에 몇 번이고 정주행한 데다가, 갓 태어났을 때 꿈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그 이야기는.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는 듯, 매일 밤을 물들였던 그 이야기는.

스칼렛의 성격이나 사연에 관해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은 거야 서술 트릭이라고 칠 수 있었다. 여주인공의 시점에서 그놈의 ‘여적여’ 구도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악녀’를 일차원적으로 묘사하곤 하니까.

‘하지만 루시페우스의 경우에는….’

그가 빨간 눈이라는 사실도, 거대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생략된 채, 심지어는 그의 최후마저 그릇되게 서술된 그 이야기는… 도대체 뭐였을까.

그게 뭐라고, 나는 그걸 마치 경전처럼 품고 있었던 걸까.

침울해지는 마음에, 그리고 너무도 거세게 물씬대는 미안함에 나는 그의 품에 파고들듯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안.”

“여기서 전하께서 미안하실 일이 도대체….”

“미안….”

“미안하시면 얼굴 보여주세요.”

그의 손끝이 제 품에 바싹 묻은 내 이마를 밀어젖히려 했지만, 나는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꼬옥 더 주었다. 창피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루시페우스가 낮게 웃는 소리가 났다.

“전하께서 워낙에 배움이 빠르신 것을 어쩌겠습니까. 그 소설가가 재능이 좀 떨어지나 보지요.”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통쾌하다는 듯이 울렸다.

그렇겠지. 제 최후를 어리숙하게 그린 자니, 모르긴 몰라도 괘씸할 거였다.

창피함과 미안함에 나는 계속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루시페우스의 손끝은 나를 달래듯 내 귓가만 간질였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런데, 하나 궁금한 건 있습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루시페우스가 입을 열었다.

“분명 전생에서 읽으신 이야기라고 하셨죠. 그건 적어도 22년은 더 전의 일 아닙니까.”

전하께서 지난봄에 스물둘이 되셨으니…. 그리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전하께서는 너무 많은 걸 기억하고 계셔서… 아니, 물론 전하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요.”

그제야 내 얼굴을 봐서 반갑다는 듯 웃으며, 루시페우스의 손가락이 내 코끝을 톡톡 쳤다.

그러니까, 그리도 오래전에 본 이야기를 어찌 그리 자세히 기억하고 있느냐는 거였다.

“음…. 그게,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할 텐데.”

“전하의 말씀이 제게 이상하게 들릴 일은 추호도 없습니다.”

나는 그의 단언에 살포시 낯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환생할 때 말이야.”

루시페우스의 낯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그 이야기가 진짜… 수십, 수백 번 반복됐어.”

내가 전생에서 몇 번 정주행한 것과 별개로, 갓난아기 시절의 혼몽한 시간에는 대부분 ‘공제눈’ 속 이야기가 반복되었으니까.

마치 그 이야기를 달달 외우게 하려는 것처럼….

“그래서 그 이야기만은 지금도 너무 생생해. 정작 전생의 일은 이제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말이야.”

“…확실히 오래된 일이긴 합니다.”

“그게 소리로 들린 건지 글자로 읽힌 건지는 모르겠어. 그냥 계속 반복됐어. 사소한 것 하나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이상하지, 그리 중얼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더니, 루시페우스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서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 이상하지 않다고 했지만.

“그런데, 경은 이게 믿어져?”

“…네?”

한참의 침묵을 깨고 내가 물은 말에, 루시페우스가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전생이니, 이야기니 하는 것들 말이야.”

“아아….”

그의 낯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생각에 빠져 한참을 멈춰 있던 그의 손이 장난스레 내 귓바퀴를 지분거렸다.

“저야 도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옥수수로 에일을 담그는 거라 하시면 온 대륙 양조업자들이 당장 옥수수로만 술을 담그도록 하는 게 제 일인걸요.”

아니, 농담을 해도 사람 세뇌하는 이야기를?

나는 뜨악하다는 듯 곁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농담입니다.”

“당연히 농담이어야지.”

루시페우스의 입가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저야, 같은 삶을 두 번째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이걸 믿어주시는 게 더 신기한데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는 그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어 처음처럼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 생의 나랑도 알았어?”

“네? 그 생의 전하…라니요?”

“그 이야기에서 세실리아는 경이랑 잘 몰랐던 것 같거든. 세실리아는 그냥 레오 친구라는 정도로만… 합.”

깊이 생각지 않고 주절대던 나는, 물색없이 레오폴트를 애칭으로 부르고 말아 양손으로 입을 재빨리 덮었다.

그럴 때마다 조금 서운해하는 그의 낯이 떠오르고 말아서….

“…실수.”

그러고서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니, 그가 웃음을 애써 참는지 입꼬리가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정말 황송합니다. 어찌나 황송한지, 다 털어놓길 정말 잘했죠….”

그리 중얼거리며 그가 내 이마를 제 큰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깃든 건 부인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나는 틀어막은 입 너머로 키득키득 웃음을 참았다.

산 밑 마을에 다다른 우리는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황성으로 돌아갔다.

출발할 때보다 인원이 줄어든 덕에, 올 때는 네 번에 걸쳐 이동해야 했던 것을 세 번 만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프리지어궁 2층에 자리한 내 집무실.

갑작스레 우리가 나타나자, 사무를 보고 있던 헨리에테가 아닌 척해도 깜짝 놀란 눈치였다.

“다녀오셨어요, 전하? 마법이 좋기는 정말 좋네요.”

“그러게. 새벽에 출발했는데, 아직도 해가 중천이네.”

창밖에 잠시 시선을 던진 뒤, 나는 잠시 고민하며 오늘의 일행을 살폈다.

루시페우스와 그림자로 함께한 3소대의 딜런과 폴.

‘얘들이 아까 킬리온과 루시페우스가 나눈 대화를 다 들었지….’

루시페우스는 내 수하들에게 제 비밀을 노출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과 암조 기사들이 그 비밀을 다루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마차 안에서 하는 이야기까지는 못 들었겠지만….’

파하기 전에 한번 짚고 넘어가야 했다.

“딜런, 폴. 잠깐 얘기 좀 할까?”

그리고 나의 눈치 빠른 수하들은, 올 것이 왔다는 기색이었다.

응접탁자의 한쪽에 루시페우스를, 그 맞은편에 딜런과 폴을 앉혀두자 헨리에테가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제자리로 돌아간 헨리에테 역시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 덩달아 집중하는 듯했다.

“아까 신관하고 루시페우스 경이 이야기 나눌 때 말이야.”

“자, 잘못했습니다!”

“그, 저희가 깜짝 놀라 은신이 풀려서….”

…아, 그러니까.

‘저들 기척 들킨 것 때문에 혼나려는 건 줄 알았구나?’

나는 그들이 긴장한 것이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이유에서임을 알아 조금 헛헛한 마음이 되었다.

“아니, 날 뭘로 보고?”

“으음….”

폴과 딜런이 서로의 낯을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살폈다.

“연인 앞에서는 칼 같으신 저희의 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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