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3)
나는 깜짝 놀란 낯으로 루시페우스를 쳐다보았다.
한데 킬리온의 귓가에 바싹 다가선 그의 낯에는 조금의 당혹감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마치 킬리온을 두고 ‘백부’라고 언급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힐베르크의 비극에 귀족파의 마수가 뻗쳐 있다더니, 그 구체적인 방법도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갖은 당황스러움에 사로잡혀 꼼짝도 못 한 채 뒤이어 일어날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루시페우스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헉.”
내 뒤편 멀리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자그마하게 났다. 그림자들이 은신마저 풀릴 만큼 당황한 거였다.
“빠, 빨간….”
루시페우스의 손에 어느새 그의 안경이 들려 있었다. 안경이 가리지 않은 그의 눈동자는 그 본연의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녁놀처럼 붉고 피처럼 진한 눈동자.
그걸 마주한 킬리온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저도 그레고르에게 배신당한 처지인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너, 너, 너, 너도….”
“예. 백부님처럼 저주받았지요.”
킬리온은 이지를 잃었던 사람 같지 않게, 퍽 올곧은 눈빛으로 루시페우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정신이 돌아온 걸까? 어쩌면 그는 정말로 마음의 문을 닫았던 게 아니라, 그런 척했던 걸까…?
“그리고 어떤 분께서는.”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스르르, 이편으로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쳐, 나는 그를 독려하듯 입꼬리만 조금 들어 올려 보였다.
루시페우스의 낯에 안도감이 스쳤다.
“이런 저희를 두고,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하시던데요….”
“추, 축복은….”
“백부님께서도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그래서 네가 사, 사람답게 살았더냐?”
“사람답게라….”
킬리온의 날카로운 말소리에, 루시페우스가 나지막한 웃음을 뱉었다.
그의 고개가 살포시 떨구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엔, 그렇게 좀 살아보려고 합니다.”
이번엔.
그가 이번 생을 언급할 때마다 가슴이 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그의 목소리는 즐거운 듯 울리니 다행이기야 했지만….
‘미안한 거야, 그래. 이렇게 같이 지내면서 갚으면 되고….’
가, 같이 지내다니?
긴박한 상황을 앞에 두고서 물색없게 생각이 흘러 쑥스러워졌을 때.
“저기, 네 연인은 그러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킬리온이 대뜸 나를 눈짓했다.
“…감히 그런 호칭을 댈 수 없는 분입니다마는. 제 체질에 대해 평생 함구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고도 한참 주저하던 킬리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커다란 안경을 쥐었다.
순간적으로 내려 보였던 안경 너머로 비친 건….
‘정말 빨간 눈이었어….’
내 추론이 맞아떨어진 풍경에, 나는 놀란 티도 못 내고 그저 붙박여 있었다.
한번 놀란 그림자들 또한 더 이상 존재감을 티 내지 않았다.
가제보 안에 다시금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을 무렵.
“크, 크클클….”
갑작스레, 킬리온의 잇새에서 끓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주받은, 핏줄이 무슨, 사사사랑을. 크큭, 클클….”
어느새 킬리온의 눈빛은 루시페우스가 제 눈 색을 보이기 전의 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멀끔해진 듯했던 정신이 다시금 흐려진 기색이었다.
저와 같은 빨간 눈을 본 충격에 잠시간만 정신이 돌아왔던 걸까? 그는 다시금 헛소리를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 그런 사치는, 집어치우고, 그레고르에게서 도, 도도, 도망이나, 쳐. 어차피 배시, 배, 배신당할 거니까.”
“배신이야 이미 당했습니다.”
“네 쓰, 쓸모가 다하, 다하고 나면, 제가 써머, 먹은 일, 가가갖고서 협박을, 으음, 혀협박을 할 게다.”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문장 사이사이마다 접사처럼 덧붙었다.
“내가, 그놈의 가, 간교한 혀끝에서 도마, 망치려고 어, 얼마나 무무무서운 비미, 비밀까지 빼돌렸…는데.”
그 순간, 나는 그게 내 체질에 관한 이야기임을 직감했다.
“근데 그, 그 정돈, 아무것도 아니라며…. 화, 확실한 게 필요…하다며.”
킬리온은 제가 그 당사자 앞에서 주절대고 있는 것도 모르고 기묘한 중얼거림을 이어갔다.
‘나 참, 그래. 알게 된 지 20년도 더 지나서야 써먹는 걸 보면 그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법하지.’
감히 황실의 비밀을 폄하한 후작의 뻔뻔함에 나는 속으로 냉소했다.
실제로는 킬리온을 계속 끄나풀로 써먹기 위해 허세를 부린 쪽에 더 가깝겠지만 말이다.
‘성녀 부부가 죽은 게 10년쯤 전의 일이니까, 내 세례식 일을 누설하고도 최소 그때까지 계속 후작에게 휘둘린 거겠지.’
내가 킬리온과 알비누스 후작의 연에 대해 이리저리 가늠하는 사이, 킬리온은 계속하여 무언가를 주절대고 있었다.
“나도, 나야 처음엔, 나는 그냥, 그, 그냥, 서, 서성녀님께서, 돌아오실 수 있으시다길래….”
언제부턴가 안경 너머 킬리온의 눈가에서 다시금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드, 드디어, 시시신들의 푸, 품으로 돌아오…신다고.”
조금 전 그의 눈동자가 루시페우스의 것과 같은 색임을 확인해서일까. 그의 눈시울을 한껏 채웠다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왠지 아주 낯설지만은 않았다.
‘성녀에게 애착이 컸구나? 그 부군만 사라지면 다시 교단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할 만큼.’
그랬는데 성녀도 휘말려 죽고 말았으니 죄책감에 정신을 놓은 걸까? 아니면 그런 척을 함으로써 알비누스 후작에게서 벗어나려 한 걸까?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성녀가 환속한 뒤여서, 사람들에게 성녀가 갖는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았다.
‘…뭐가 되었건, 이 신관의 신앙심을 이용한 셈이니 저열하네.’
루시페우스가 소리 없이 안경을 다시 쓸 때까지, 킬리온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알렉스와 리키는 점심때가 다 돼서야 마차를 세워둔 쪽으로 돌아왔다.
일행이 아닌 척 그들이 마차 근처를 서성일 때, 내가 마차의 창문을 열고 말을 걸었다.
“이야기 잘됐어?”
“예에, 뭐, 황태자 전하의 문장이 효능을 제대로 발휘했죠.”
알렉스가 마차를 등지고 선 채 대꾸했다.
“의심스러워하는 기색도 없고?”
“대신전에 계시다가 은퇴하신 신관님들에 대해 전수 조사하겠다니,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하고 냉큼 협조하더군요.”
“잘됐네. 며칠만 더 고생해줘.”
나는 간단히 치하하는 말을 곁들이며, 바구니에 가져온 칠면조 햄 샌드위치를 차창 너머로 그들에게 건넸다. 프리지어궁에는 단순히 황성 외곽 시찰을 나간다고 해두었기에, 오며 가며 먹을 수 있도록 주방에서 간단한 도시락을 싸준 터였다.
“전하께서는, 그… 잘 만나 보셨습니까?”
“…예상외의 수확이 컸어.”
“예상…외요?”
“간단히 말하면, 그가 빨간 눈이고.”
“헉.”
알렉스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얘들이, 아까부터….’
번번이 내 수하들의 여과 없는 반응을 듣는 루시페우스에게 미안해져, 나는 좌석을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알비누스 후작이 그걸 빌미로 그를 협박한 모양이야. 그리고 두 사람은 이복이든 이부든, 형제… 정도의 사이인 것 같고.”
“예에? 그분은 평민이라면서요? 이복형제라면 선대 후작의 씨라 어쨌든 귀족일 테니, 이부형제일까요?”
“…그러게. 그것도 알아봐 주고. 아무튼, 후작이 신관을 협박해서 힐베르크의 비극에 연루시킨 듯해. 정확히 말하면 성녀님의 죽음에 말이야.”
“…와아.”
알렉스로 말할 것 같으면, 샌드위치를 받아 든 내내 한 입도 대지 못하고 내내 탄성만 내지르는 중이었다. 대신 그의 소대원인 리키가 야무지게 샌드위치를 뜯었다.
“황실의 비밀을 유출한 건에 대해서는, 그럼…?”
알렉스가 에둘러 말하며 말꼬리를 늘였다. 루시페우스가 그 비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몰라서 얼버무리는 거였다.
실상은 루시페우스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대충… 그가 누설한 게 맞는 것 같아.”
“정신을 놓으셨다더니, 그걸 증언하시던가요?”
“루시페우스 경을 어린 시절에 한번 봤다더니, 반가워서인지… 잠깐 정신이 돌아왔었어.”
“오호라.”
반갑기는 반가웠을 거였다. 저와 같은 빨간 눈을 마주했으니까.
그는 평생 빨간 눈임을 숨기고 바깥에서 살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빨간 눈이 있을 곳으로 가장 어울리지 않는 교단의 중심에서 지냈다.
‘악마의 자식이라 배척받으면 신전이 아무래도 어렵게 느껴질 텐데 말이야….’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알렉스에게 넌지시 말했다.
“황성에서 일이 많으니 이동하는 시간 단축하자고 이렇게 와놓고는 일 더 주는 셈이라 미안한데.”
“에이, 전하께서 데이트하심에 제 임무가 도움이 되었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경.”
나는 미간에 힘을 팍 주고 알렉스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알렉스와 마주 보고 있던 리키만 내 낯을 확인하고는 헤쭉 웃었다.
“그 신관이 필요 이상으로 전대 성녀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아.”
“필요 이상…이라.”
“귀의한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나 싶고. 성녀와의 관계에 관해서도 조사해보면 좋겠어.”
“교단 지원서 같은 건 대신전에 남아 있을 테니 황성 돌아가는 길에 생장크트산도 들러야겠네요.”
“대신 수정 거래 현황 쪽은, 그동안 내가 직접 지휘하고 있을게. 루시페우스 경이 도와주기로 했고 말이야.”
“믿음직하시겠습니다.”
그 말꼬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놀리는 건 놀리는 거지만 틀린 말도 아니어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 후작의 일을 돕던 루시페우스만큼 귀족파의 수상한 흐름을 좇는 데 도움이 될 이는 없을 테니까.
알렉스와 리키가 샌드위치를 다 먹은 뒤, 수도원에 그들을 남겨두고서 마차를 출발시켰다.
수도원 입구에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지나, 마차가 산 밑 마을을 향해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혹시, 제게 기대지 않으시겠습니까.”
루시페우스가 오늘도 내 턱 끝의 리본을 사락거려 변장 보닛을 벗겨내며 물었다.
제가 오는 길에 마법을 걸어 푹 재워줬어도, 그새 또 피곤해졌을까 걱정인 모양이었다.
그 다정한 걱정이 황송해 나는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냐, 별로 안 피곤한데.”
“그래도요.”
루시페우스의 손이 좌석을 짚고 있던 내 손을 덮었다.
“…제가 기댈 순 없지 않습니까.”
으응?
그의 말끄트머리에 쓸쓸함이 은은하게 배어 있어서, 나는 절로 그의 낯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낯에는 요즘 들어 그를 볼 때마다 진하게 밴 피로감 너머로, 엷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아, 그러니까.
‘루시페우스야말로 오늘 굉장히 무리했지….’
사람 다섯을 데리고 새벽부터 순간 이동 마법을 쓴 데다가, 계속 내 체력을 위해 신성력을 썼고.
무엇보다 킬리온에게서 제대로 된 답을 이끌어 내겠답시고 제가 빨간 눈임을 드러내기까지 했으니까.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타인과 닿을 수 없는 그는 늘 긴장 상태여서인지, 나와 있을 때라야 좀 풀어지는 기색이었고….
‘일종의 애착 인형 같은 걸까?’
그의 기운을 북돋고자 나는 부러 너스레 떠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좀 피곤한 것도 같고. 그럼 좀 누워볼까?”
“피곤하시다고요.”
그의 낯이 자책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제가 날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내가 고단해졌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조건반사적인 반응에 쿡쿡 웃었다.
“그냥 핑계 대는 거야. 중요한 부분은 뒤쪽이라고.”
“뒤쪽요. 그러니까….”
“으응, 이러고 갈래.”
그러고 나는 그대로 납죽 몸을 뉘어서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고개를 괴었다. 마차가 그리 넓지 않아서 몸을 잔뜩 웅크려야 했지만 나름대로 안정감이 있었다.
올려다본 그의 낯이 당황 일색이어서 나는 또 키득거렸다.
“괜찮지?”
“…괜찮지 않을 리가요.”
그가 당황스러운 듯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귀 끝이 조금 빨개져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