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2)
“예, 기억하시는지요. 제가 그레고르의 양자입니다.”
“그, 그, 그레고르가, 왜, 왜 갑자기….”
갑작스러운 킬리온의 반응에 사제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신관님이 입을 여셨어…!
그것이 반가우면서도, 진짜로 정신이 돌아온 건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운 듯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젊은 사제 둘이서만 자리를 지키는 걸 보면, 킬리온이 외부인을 만나는 게 수도원에서는 딱히 주의할 거리가 아닌 거지. 그렇다면….’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두 사제 중 보다 연배가 높아 보이는 접객 담당 사제에게 말했다.
“저, 사제님. 저희가 너무 오랜만에 찾아뵈어서 신관님께서 노여우신가 봐요.”
“예, 예에, 그러신가 봅니다….”
“괜찮으시다면 혹시, 저희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간 못 찾아뵈었던 연유를 말씀드리자면 아무래도 가문의 불민한 사정을 입에 올려야 할 것 같아….”
그리 말하며 나는 두 사제를 향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변장 보닛을 쓰고 있어서 세실리아 얼굴의 파급력은 먹히지 않겠지만, 적어도 애원조만은 피력할 수 있을 거였다.
이지를 잃은 초로의 신관을 보필하는 일이 고역으로 느껴질 어린 사제에게라면 더더욱.
“대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에, 그러면….”
어린 사제가 눈동자를 굴려 접객 담당 사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두 사제가 잠시간 곤란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용건 마치시거나 무슨 일 생기시면…. 여기, 이 종을 흔들어 주십시오. 저희가 듣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접객 담당 사제가 소맷부리에서 작은 종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 안에 추가 없는 것이, 사제들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감읍한 낯을 지어 보이며 교단의 예법에 따라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뒷모습이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루시페우스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잘 풀렸네.”
“…제가 할 수도 있었는데요.”
“신관들에게는 함부로 마법을 걸면 안 된다며?”
“수도원에 배속되는 사제들은 신성력이 꽤 떨어지더군요.”
“…….”
그들의 신성력이 그다지 크지 않으니, 정신계 마법을 써서 그들을 여기서 떼어놓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온건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왜.”
“전하께서 심력을 소모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뜨악한 낯으로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보았다. 한데, 그의 낯에 깃든 건 어떤 비정함이 아니라… 정말로 나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이 과보호, 진짜.’
황실의 과보호에 익숙해진 나라도 루시페우스의 과보호는 이따금 뜨끔했다.
결이 다르달까, 방향성이 다르달까….
“괜찮아. 결과적으로 잘 풀렸잖아.”
그리 말하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제보 안쪽에 앉아 있는 킬리온을 쳐다보았다.
“나, 나는, 야, 약속대로 했어. 조요, 조용히. 조용히 있었다고….”
그는 여전히 루시페우스 쪽을 힐끔대면서 혼란스러운 낯으로 주절대고 있었다. 눈빛에 총기가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맨 처음처럼 아주 죽은 눈동자인 것도 아니었다.
“저를 알아보는가 봅니다. 저분도 꽤 큰 신성력을 타고나셔서, 제가 지닌 것을 보실 수 있으시거든요.”
어느새 신관에게 가닿은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마치 그의 영혼을 가늠하는 듯이….
“그 신관만은 제가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전하의 기사들은 저만큼 눈이 밝지 못하니까요. 금언 서약 과정을 직접 엿들으려면 신성력만으로는 힘든 일이었을 텐데….”
“혹시 그 신관이 마력을 썼다고 생각하는 거야?”
“분명히 존재하는 가능성입니다.”
그러니까 루시페우스는, 그가 저처럼 마력을 다룰 줄 알아서 금언 서약의 과정을 엿들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기실 그 외에 다른 경우의 수가 없었다.
육성이 들릴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금언 서약을 집전하던 선대 교황 성하께서 모르셨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 감지되지 못할 만큼 먼 곳에서, 제삼의 능력을 썼을 수밖에.
그리고 대신전은 마력의 발현에 방비되지 않았으니 마법이라면 아무도 몰랐던 게 말이 된다.
‘어쩌면, 그건 킬리온의 비밀과 연관이 있겠지….’
나는 신관의 두꺼운 안경에 시선을 붙박은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빨간 눈을 지닌 이들은 대체로 마력 또한 강하게 타고난다고 했으니까.’
마침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내 곁에 있고 말이다.
나는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있지, 저 안경 너머에… 답이 있지 않을까?”
“안경요?”
루시페우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난번 렌틸 자작의 반응을 보니 빨간 눈의 마을에 관해서는 가설 단계라 섣불리 말을 꺼내면 안 되겠지만,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되겠지….
“신성력의 가장 기본적인 활용은 신체를 강화하는 거랬어. 피로를 회복하는 것도 그 일환이고…. 손의 연장선인 검에 검기를 두르거나, 다리에 둘러서 축지법을 쓰는 것 또한 다 같은 맥락이잖아?”
루시페우스는 잠자코 내 설명에 귀 기울였다. 그가 신성력을 체계적으로 계발한 적이 없으니, 그 이론이 크게 익숙지는 않을 거였다.
“시력도 마찬가지래. 내 기사들 보면 신성력으로 시력을 강화해서 멀리 있는 걸 보거나 밤에도 사물을 더 잘 식별하곤 하더라고.”
“마법으로도 비슷한 기능을 할 수야 있지만, 아무래도 신성력이 훨씬 효율적이겠군요.”
곰곰이 내 말을 듣던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무의식중에 신성력을 활용한 경험을 떠올렸을 때 이치에 맞는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 정도의 신관이 굳이 안경을 끼고 다닌다는 것은….”
“필시 뭔가 비밀이 있겠군요.”
“나는 그가 빨간 눈이 아닌가 싶어.”
내 말을 들은 루시페우스의 낯이 급격히 굳었다.
“빨간 눈이 아무래도 마력과 연관이 있는 것 같거든.”
“그건, 단순히….”
“아니.”
그가 습관적으로 저주 운운할 것이 빤해, 나는 작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빨간 눈이라는 사실은 암조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인지라, 나는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듯 에둘러서 대꾸했다.
“그건 저주가 아니야.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축복이 과하게 내려진 것뿐이지.”
“축복…이라고요.”
내 말을 곱씹는 그의 낯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줄 겸, 까치발을 해 그의 귓가에 농담조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에게는 아예 없는 거여서 부러운데.”
하지만 루시페우스의 낯이 풀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의 귓가가 새빨개지기는 했지만….
‘평생 괴로워했으니, 이 정도로는 안 통하는구나.’
어쩔 수 없지. 나는 난처한 낯으로 뒤편을 눈짓했다. 그림자들이 들을까 걱정이라는 듯이.
“잠깐, 결계 좀.”
“…예.”
루시페우스는 혼란스러운 낯을 했으면서도, 순식간에 손을 움직여 우리를 둘러싼 결계를 쳤다.
“말씀하세요.”
“생각해봐. 알비누스 후작은 강박적으로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잖아. 아무리 이복누이의 아들이라 해도, 빨간 눈의 아이를 자기 밑에서 키운 게 이상하지 않아?”
루시페우스의 낯이 다시금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에게는 두 번의 생에 반복되어 일어난 일이라 의심조차 해본 적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 안경을 맞춰준 거. 애초에는 후작이 했을 거 아냐.”
“…네, 다섯 살 때였죠. 다른 사용인들에게 들킬까 봐서….”
“그 대처가 너무 능숙했다고 생각해, 나는.”
어린 루시페우스를 처음 맡고서 고민할 시간이 몇 년 있기야 했겠으나, 마도구로 빨간 눈을 감출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 것이… 같은 사례를 알기 때문 아니었을까?
‘일종의 경로 의존성 같은 거지. 빨간 눈이 악마 들린 게 아닌 것도 알고 있었을 테고….’
루시페우스는 혼란을 감추지 못한 낯으로 고개를 들어 킬리온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안경 너머로 경계의 빛을 바싹 띤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분이 후작저를 드나드신 게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입니다. 뵌 건 아니지만, 저렇게 강한 신성력이 이따금 저택에 다녀간 건 알 수 있었거든요.”
“그래. 그만큼 오래된 사이면… 후작은 그가 빨간 눈이란 걸 아는 거야. 그래서 똑같이 경에게 마도구 안경을 맞춰준 거고.”
“…….”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루시페우스는 팔짱을 낀 채 턱을 만지며 킬리온을 노려보았다.
“그때 분명, 지하의 힘이라고….”
그는 머릿속으로 과거의 어떤 순간을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도 얼마간 미간을 좁힌 채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그런 건가.”
그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새 결계를 해제한 듯 다소 먹먹했던 귀가 트이는 느낌이 났다.
“나, 나는 아무것도 몰라…!”
루시페우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킬리온은 화들짝 놀라서 의자 위로 쪼그리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알비누스와 연관된 자들을 의식적으로 경계하는 걸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 킬리온을 잠시 내려다보던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초로의 신관은 바들바들 떨며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제가 에리나의 아들인 그때 그 아이입니다.”
“에, 에리나…. 에리나는 지지, 진짜지.”
진짜? 무슨 소리지?
‘게다가 에리나 경을 알다니…. 에리나 경이 알비누스에 머무른 기간이 무척 짧다고 되어 있는데.’
그래서 에리나 경의 행적에 관한 정보도 많지 않은데…. 후작가와 연이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레고르가 제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 아냐, 몰라, 나는.”
루시페우스가 허리를 더욱 깊이 숙여, 킬리온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신관님께서 저주받은 체질을 지니셨다…라고.”
“…뭐라고!”
발작적인 반응이었다.
“이게! 감히 형한테! 반쪽짜리라도 귀족이라고 네네, 해줬더니!”
형?
…반쪽짜리?
킬리온이 내뱉는 말들은 조금도 걸러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순도 100퍼센트의 진실일 거였다.
하지만 거기서 건질 수 있는 정보들이 조각에 불과해서일까, 그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진실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킬리온은 평민이라고 했는데…. 형이라고? 알비누스 선대 후작의 아들이라면 가주에게 인지된 셈이니 평민이라고 할 리가 없잖아. 그러면 선대 후작 부인의 사생아인가? 후작더러 반쪽이라는 건 또 뭐야…?’
내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루시페우스는 태연히 취조를 이어갔다.
“그러게요. 신관님… 아니, 백부님이신가요. 아무튼 그레고르에게 신의를 지키셨는데 말이죠. 유감입니다.”
“비, 비밀로 해주기로 했잖아! 그래서, 그… 그래서 내가….”
킬리온은 의자 위로 접어둔 무릎 위로 양손을 맞잡고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가제보 안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와 루시페우스, 그리고 가제보 바깥에서 은신하고 있는 그림자들까지 그의 입에서 떨어질 말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빨간 눈이라는 것을 묵인하는 대가가, 혹시 내 비밀을 흘린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그때, 신관이 말을 짜냈다.
“…그, 그래서 내가 서서, 성녀님께 그 상자를 드, 드린 건데….”
거기까지 말한 남자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 그 자식만 주, 죽으면, 성녀님은, 살게 해준다며….”
맞잡은 킬리온의 손끝이 벌벌 떨렸다.
“서, 성녀님께서, 교다, 교단으로, 도, 돌아오실 거라고….”
…뭔가 엄청난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 같은데?
‘그 자식은, 힐베르크 후작의 아버지? 선대 후작 부부의 죽음을… 이 신관에게 사주했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