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1)
“아, 공기 정말 좋다.”
마차의 문이 열린 순간, 나는 절로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습기 가득한 청량한 공기, 눅눅한 흙 내음, 새벽이슬 머금은 잎사귀들이 내뿜는 신선한 향취.
새벽의 숲속을 경험하는 건 정말이지 세실 생애 처음이었다.
그 신선하고 촉촉한 공기를 콧속 가득히 들이마시며 마차에서 내려서려던 순간.
“전하, 저.”
먼저 내린 루시페우스가 마차 아래서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야 있었는데… 그 자세가.
“땅이 질어서요.”
“경, 나 걸음마 잘해….”
“잘못 디뎌서 다치실까 걱정입니다.”
그는 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안아 들려는 듯, 양팔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밤새 내린 이슬이 땅을 담뿍 적셔서일까, 마차가 멈춰 선 잔디밭은 겉으로 보기에도 꽤나 질었다.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그의 자세에 내가 조금 곤란함을 느낄 무렵.
“전하, 오셨어요? 새벽에 별 질 때쯤 출발했는데, 벌써 수도원에 도착하다니. 마법이 좋긴 좋네요!”
마차 뒤편에서 알렉스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아닌 척하기 위해 알렉스와 그의 소대원인 리키는 따로 말을 달려 미리 와 있던 참이었다.
장난하지 말고, 빨리 손!
나는 재빨리 손을 흔들어 루시페우스에게 손으로만 부축하라고 단호하게 손짓했다.
“…….”
그리하여 알렉스와 리키가 마차 앞쪽에 등장했을 때, 나는 태연하게 마차 아래 내려서 있을 수 있었다.
루시페우스가 마법을 써서 질척해진 바닥을 적당히 마르게 한 뒤의 일이었다.
“경,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이크.”
루시페우스의 답이 꽤나 냉랭하게 울렸다.
그게 무슨 연유에서인지도 모르면서, 알렉스는 내게 너무 가까이 서지 않으려 노력하는 척 성큼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네가 자꾸 이러는 게 더 문제인 것 같은데….
“산길이 꽤 험하던데. 오시는 길 멀미 안 하시고 괜찮….”
거기까지 말한 그는 또 무슨 눈치를 살피더니.
“…으셨겠죠, 네.”
“으응, 오는 내내 푹 잤어.”
알렉스의 눈매가 깊은 호선을 그렸다.
오늘의 여정은 먼동이 터오기도 전, 프리지어궁에서 시작했다. 알렉스의 3소대가 수정 거래 흐름을 추적하느라 바빠, 시간을 알차게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 집무실에 모인 나와 루시페우스, 알렉스와 리키, 그리고 두 명의 그림자는 루시페우스의 순간 이동 마법으로 황성을 벗어났다.
그러고도 세 번 더 마법을 써서 노르타 산맥의 자락에 자리한 산 밑 마을에 다다른 뒤 각각 말과 마차를 빌려 육로로 움직였다.
대신전이 자리한 생장크트산처럼 수도원 부지 또한 외부인의 출입을 엄중히 관리하기에, 산의 초입부터는 마법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산 밑 마을에서 빌린 마차가 작고 허름했지만, 루시페우스가 갖은 마법을 걸어준 덕에 나는 멀미하지 않고 편히 올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의 강행군에 피곤해졌던 것도 쌩쌩하게 회복했고.
“뭐, 내가 피곤하겠어? 말 달려서 온 경들이 피곤하겠지.”
“예에, 뭐, 딱히 저희를 걱정하셔서 하시는 말씀은 아닌 걸 압니다요.”
알렉스가 내내 느물거렸다. 나는 새침하게 그의 낯을 한번 쏘아보았고, 한편으로는….
‘정말, 둘이 보내지 않길 잘했지.’
맨 처음 내가 루시페우스에게 부탁한 것은 사실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공식 행차로 꾸밀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따라붙어 봐야 번거롭기만 할 테니까.’
지금도 내 영지인 메르제령에 허위로 만든 신분으로 온 참이었다. 변장 보닛 아래로 연갈색 머리칼을 나부끼는 평범한 인상의 레이디는, 메르제령 영주 대리의 먼 친척으로 되어 있었다.
“경이 수도원에 가보려 한다는 거 말이야. 혹시 내 기사랑 같이 가면 어때?”
“저는 그 기사와 동행하고 싶지 않은데요.”
내가 누구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루시페우스는 내가 의도한 이가 알렉스인 줄 안다는 듯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었다.
경매장에서 마주친 이후로 알렉스의 장난이 지나쳤으니 꺼릴 법도 했다.
지금처럼 말이지….
“됐고. 오기 전에 이야기한 내용 기억하지?”
“넵.”
“예에.”
“나는 루시페우스 경이랑 그 신관을 확인하러 가볼게. 그동안.”
“네. 저희가 수도원장이랑 행정실 쪽을 만나서 그 신관님이 수도원에 오신 이후로 만난 이들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신관님의 신상도 좀 알아보고요.”
장난기를 말끔히 지운 낯으로 알렉스가 대답했다.
“혹여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황태자 전하의 문장이 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적당히 핑계 대고서 중지해둔 뒤 상의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점심때쯤 여기서 만나.”
고개를 꾸벅여 보인 알렉스는 리키와 함께 먼저 수도원 쪽으로 떠났다.
‘저들이야 황태자의 비밀 감찰 업무로 포장하면 될 테니 문제없겠고….’
황실에서 교황이 배출되는 만큼 교단은 황실과 가까웠다. 성기사단이 황실파의 세력으로 간주될 정도로.
‘그러니 귀족파에서 성기사단을 궤멸시킨답시고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려고까지 한 거겠지.’
하지만 그 신관이 내 비밀을 흘렸다는 정황이 있는 이상, 교단을 온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방문도, 그 목적도 쉽사리 노출할 순 없었다.
내가 변장 보닛의 리본을 더욱 꼼꼼히 묶을 때였다.
“가실까요?”
“응, 그래.”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던 양 내밀어온 루시페우스의 손 위에, 나는 내 손을 스스럼없이 올려놓았다. 꼭 쥐는 그의 손끝이 눅진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신관 킬리온 님을 뵈러 왔습니다. 알비누스 후작가에서 왔습니다.”
“아, 저, 그게, 킬리온 님께서는….”
접객을 담당하는 사제가 꽤나 곤란해하는 기색에, 나는 루시페우스에게 눈짓했다.
역시, 문제가 있는 게 맞나 봐.
신관 킬리온의 정신 건강에 관한 이야기는 대신전에도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렉스가 알아본 내용을 공유했을 때, 대신전에서 수소문한 루시페우스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했으니까.
나는 사제를 안심시키기 위해 루시페우스 대신 나섰다. 선량한 낯을 한가득 지어 보이면서.
“신관님께서 편찮으시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어요. 후작님께서 그간 신관님과 격조하셨던 탓에 새까맣게 모르셨다며, 우선 용태가 어떠신지 알아보라고 저희를 보내셨답니다.”
“평소에 킬리온 님을 뵈러 오는 손님이 없으신데….”
“신관님께서 대신전에 계실 때, 알비누스 후작님과 깊은 교분을 맺으셨답니다. 다만 수도원으로 떠나신 뒤로는 거리가 거리다 보니….”
실제로 둘의 사이가 무슨 이유로 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되는 대로 읊어보았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제는 별반 의심하지 않는 낯이었다.
“…킬리온 님께서 수도의 높으신 분들과 연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그 말씨에 북부 지방 방언이 배어나는 것이, 이 근방에서 나고 자라 수도원에서 수련사 시절을 지낸 뒤 그대로 배속된 자인 듯했다.
즉, 알비누스나 다른 귀족파와 연이 있기 어려워 보였다.
‘알비누스가 후작가니 그 이름만은 아는 거겠지만….’
오늘 루시페우스의 방문이 후작가에 흘러들어 간대도 상관은 없었다.
수도원에서 황성까지 밤낮없이 말을 타고 달려도 사흘. 서신을 보낸다면 일주일.
대비할 말미는 충분하리란 계산이었다.
떳떳하지 못한 건, 금언 서약 내용을 유출하고 은사를 진 자를 협박한 그들이니까.
나는 눈썹을 한껏 미끄러뜨리며 애원조로 말했다.
“수도원 방침에만 어긋나지 않는다면, 꼭 뵙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황성에서부터 정말 먼 길을 힘들게 왔답니다.”
“으음, 그게….”
내 간청에 사제는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았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어렵게 대꾸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살펴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사제에게 생글생글 웃어 보이고는, 그가 사라진 쪽을 살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 의심 없이 받아주면 좋겠는데.”
“…전하께서는 정말.”
“응?”
그제야 고개를 들어 보니, 어째서인지 루시페우스의 낯엔 불편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왜, 뭔가 이상해?”
“…레이디 작은 별께서 참 야박하시다 싶어서요.”
“야박해? 내가?”
나는 입꼬리를 반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낯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루시페우스가 빈손으로 내 볼을 감싸더니….
“저한테 말고는 아무에게나 이 아름다운 미소를 선사하셨던 거지요.”
하물며 저잣거리의 노점상들에게조차…. 그가 엄지 끝으로 내 입꼬리를 꾹꾹 눌렀다.
“아니 그게에, 예의 바르게 굴려며언.”
“예, 저한테도 이치에 닿지 않는 부탁을 하실 때만 그러셨고요.”
“부탁할 때는 다 그게에.”
“저야 뭐, 어쨌건 늘 좋았습니다만….”
그 손끝이, 어느새 슬금슬금 영역을 넓혀 내 입술을 만지고 있었다. 기류가 간지러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새빨개진 낯으로 눈동자만 또르르 떨구었다.
“아, 그, 경, 애들 봐….”
지금도 그림자가 둘이나 따라붙어 있다구….
요즘 나랑 루시페우스가 만났다 하면 다음 날 암조 애들 눈초리가 심상찮은 게, 그림자 애들이 번번이 소문을 퍼뜨리는 모양인데 말이다.
지금 내 낯이 빨개진 것까지는, 변장 보닛 덕분에 알아차릴 수 없겠지만….
하지만 루시페우스의 손길은 그러고도 한참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깃든 게 명백한 아쉬움이어서, 내 입술이 덩달아 간질간질했다.
“저, 형제님, 자매님?”
그때, 타이밍 좋게도 접객 담당 사제가 밝은 낯으로 돌아왔다.
그게 쑥스러움에 몸을 배배 꼬던 내게만 좋은 타이밍이었지, 그 사제에게는 전혀 좋지 못한 타이밍이었지만.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루시페우스의 손끝이 여지없이 딱딱히 굳었던 것이다….
“킬리온 님 용태가 괜찮아서, 잠시 뵈어도 좋으실 듯합니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고맙습니다!”
나는 루시페우스가 그 사제에게 어떤 싸늘함을 선사할세라, 재빨리 대꾸하며 안쪽으로 따라 들어갔다.
사제가 안내한 곳은 수도원 건물 뒤편의 정원이었다. 일과 시간이 시작되어서인지, 수도원에서 유일한 휴게 공간으로 보이는데도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저기 계십니다.”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종종걸음으로 앞서나간 사제는, 한쪽 구석에 자리한 작은 가제보로 향했다. 거기에는 머리가 반쯤 센 중년인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한 50대 정도…인가? 나이가 렌틸 자작보다는 많아 보이고, 아버지보다는 적어 보이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는 표현답게, 커다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신관의 다갈색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어 보였다.
“주신의 여명에 축복을 간구합니다. 그뤼넨 남작가의 멜리사라고 합니다.”
나는 재빨리 가제보에 들어서며, 신관과 그를 보필하는 듯한 어린 사제에게 인사했다.
“저와 함께 오신 이 신사분께서 알비누스 후작가의 자제이신데, 킬리온 신관님과 알비누스 후작님께서 과거에 깊은 연이 있으셨던지라….”
나는 중요하지 않은 말을 정신없이 주워섬겼다. 사제들이 혼란한 와중에 미심쩍은 줄 모르고 넘어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킬리온이야 설득의 대상이 아니었고, 우릴 안내한 사제나 그를 담당하는 사제나 연배가 퍽 낮아 보이니 쉽게 넘어가리란 계산이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루시페우스가 가제보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주신의 여명에 축복을 간구합니다. 저는 알비누스의….”
“허, 허억…!”
내내 죽은 눈동자로 바닥을 굽어보고 있던 킬리온이 급작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너는, 그, 그, 그, 그레고르의…!”
그레고르, 그러니까 알비누스 후작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