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13)
원로원에서 증언한다라.
아수라마수라의 모든 귀족가의 대표들 앞에서 제 허물을 들춘다는 소리였다.
그의 낯은 담담하였으나 그 선언이 암시하는 무거움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렇게까지 큰 도움이라니, 제게 선택의 여지는 있는 건가요?”
분위기를 풀기 위함인지 렌틸 자작이 웃음기를 띤 낯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증인이 주목받는 게 자작의 그림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내 기사들이 전략실 명의로 보고서를 꾸며줄 수도 있어요. 자작이 좋은 쪽으로 해요.”
“선택의 여지가 두 개는 되는군요. 고민해 보겠습니다.”
렌틸 자작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지난번 첫 의회 때 게이블스의 권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했으니, 앞으로 의회가 열릴 때마다 법리 해석을 둘러싼 공방이 펼쳐질 거였다.
‘당분간은 간 좀 보는 정도일 테니, 10월이나 돼야 본격적으로 논의되겠지. 서류 꾸밀 시간이야 충분해.’
그때, 스칼렛이 불현듯 말했다.
“거기 적힌 일 중 가장 최근의 것이 세르니타의 사냥 대회인데, 원래는 제가 그 주관인을 맡을 예정이었어요.”
“…그러십니까.”
루시페우스야 이전의 생을 통해 아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 일은 꼭 공론화하고 싶어요. 그래서 마수 거래 내역서를 확보했는데, 자료에 의하면 경께서….”
“네. 그 건이, 제가 후작과의 계약에 따라 움직인 마지막 임무입니다.”
“그러면 혹시 그 일에 대해서도.”
스칼렛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시페우스가 마법을 쓰는 건 공식적으로 비밀이었다. 원작, 그러니까 그의 이전 생에도 아멜리를 마수로부터 구할 때 말고는 남 앞에서 마법을 쓴 적이 없었다.
이제는 그걸 알게 된 사람이 많아졌고, 그 스스로가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마탑에서만 살아가는 마법사들은 빨간 눈처럼 멸시는 안 당할지언정 배척당하기는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루시페우스는 무감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가 마법을 쓰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면, 그 또한 괘념치 않습니다. 마탑에 들어가려다가 거절당한 처지라, 마법을 쓴다는 게 온전한 비밀도 아니고요.”
“…거절당했다니.”
렌틸 자작의 눈매가 굳었다. 마탑과 학자의 탑은 동일한 체계의 인재 양성 기관인지라, 마탑의 결정이 섣불리 이해되지 않아서일 거였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고자 하는 전하의 의지가, 제 비밀보다야 훨씬 중요합니다.”
그 내용과 달리 부드럽기 그지없는 말소리에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침 내게로 돌아온 그의 시선이 더없이 따스했다.
두근두근두근, 박동 소리가 들릴세라, 나는 명치 끝을 주먹으로 꾸욱 눌러야만 했다.
렌틸 자작의 타운하우스를 나섰을 때. 서편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보고드릴 것도 있고, 시간도 꽤 늦었고 해서요.”
아직 해도 지기 전이었고, 내겐 많은 호위가 붙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가 내게 보고하고 말고 할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루시페우스는 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길 청했다. 예의 벌레 집는 듯한 자세로 스칼렛을 바래다준 뒤의 일이었다.
오늘의 호위인 알렉스는 무슨 눈치를 봤는지, 가을바람을 즐기겠다는 시답잖은 핑계를 대며 마부석으로 피신했다.
‘이게 다 근무 태만인데, 그걸 책할 마음이 없는 나도 문제지….’
역시 연애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다.
나를 먼저 마차에 태운 루시페우스는, 훌쩍 들어와서는 당연한 듯 나와 나란히 앉았다.
그와 함께 마차에 탄 건 대신전에 다녀오던 날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저 상처받기 싫어서 그를 밀어내고, 그는 쓸모를 주장하며 맴돌던 시절.
그때까지만 해도 거리를 지키겠다는 듯 맞은편에 앉았었는데.
‘하긴, 알제니아의 피크닉 때 나란히 앉아 가긴 했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여지없이 수줍어져, 내가 괜스레 창밖에만 시선을 두고 있을 때였다.
“전하, 잠시.”
“응?”
그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루시페우스의 손끝이 내 턱을 스쳤다. 마차를 타고 내리는 동안 남의 눈에 띌까 봐 챙겨 쓴 보닛의 리본이 스르르 풀렸다.
그의 손길에 보닛이 떨어져 나가자, 내 머리칼이 금세 원래의 빛을 찾았다.
그 변화를 바라보는 그의 낯에는 일종의 감격이 들어차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역시 세실 얼굴이라 더 좋아하나 싶었을 텐데….’
그의 낯에 비치는 걸 굳이 분류하자면 뿌듯함에 가까웠다. 누군가와 걱정 없이 스치고, 그 상대가 또 나…이고….
‘윽, 나도 별생각을 다 해.’
내 귓바퀴를 따라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주는 그 커다란 손에, 나는 천천히 볼을 기대며 물었다.
“근데, 게이블스의 소후작이 알비누스 소후작을 싫어해?”
내가 언급한 인사들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루시페우스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졌다.
“아니, 게이블스 소후작은 다 자기 아랫사람으로 보잖아.”
“옳게 보셨습니다. 그간 싫어할 일은 없었던 것도 맞고요. 한데….”
루시페우스는 자못 불만스러운 낯으로 잠시간 말을 멈췄다.
“한데?”
“제 의형께서 그릇된 연심을 품은 게 들통 난 바람에요.”
“그릇된 연심…?”
설마 내가 짐작하는 거…? 나는 황당하다는 듯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는 4황녀 전하의 부마 자리에서 가장 먼 자 아닙니까. 일전에 아카데미에서의 일로 말이지요.”
“아하. 하지만 그가 나를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게 설령 진짜 호감이었대도, 벌써 옛날 일인데 말이지.
루시페우스는 내 말을 자르며 단언했다.
“황성에 전하를 조금이라도 연모하지 않는 신사가 어디 있습니까.”
“글쎄, 딱히?”
그냥 선망의 대상 정도라면 모를까?
내가 입술을 쫑긋 내민 채 눈동자만 데로록 굴리며 생각에 빠졌을 때였다.
“…제 입으로 전하께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듣고 싶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부딪었다. 조금도 아프지 않은 그 접촉에는 토라짐에 가까운 원망이 배어 있었다.
뭐, 사실관계가 무엇 중요하랴.
나는 쿡쿡 웃으며 그의 손바닥에 짧게 입 맞췄다. 장갑 너머로 익히 아는 그 단단한 손바닥이 따뜻했다.
“미안. 나 또 물어볼 거 있어.”
“레이디 작은 별께서라면야 얼마든지요.”
“경은… 후작에게 복수하는 게 목표라고 했었지?”
“…네.”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해놓고, 루시페우스는 썩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그 대꾸가 한 박자 늦었던 것이다.
“그건 알려줄 수 있어?”
후작이 그를 박대한 것은 번번이 같았을 테지만, 그의 지난 생에서 그는 끝까지 후작의 충실한 하수인이었으니까.
루시페우스는 굉장히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낯으로 대꾸했다.
“…제가 그에게 배신당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하, 실수가 아니라?”
“그 녀석은 아무래도 제가 아닌 것 같다니까요.”
“그래, 그래. 경은 강하니까, 만에 하나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려도 거기서 실수로 죽을 일은 없지.”
내가 키득거리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가슴께에서 살랑대었다. 루시페우스가 그걸 생경한 손길로 손끝에 쥐어 들었다.
“저와의 거래에서 주기로 한 것이 있는데, 그게 일종의 사기였습니다.”
“사기? 후작한테 그게 없었어?”
“레이디 작은 별께서는 늘 옳으십니다.”
그의 손끝이 내 머리카락을 말아 쥐더니 금세 그의 입술에 가닿았다. 머리카락에서 감각이 동한 듯, 그 끄트머리처럼 심장이 살랑거렸다.
“…역적에다가 사기꾼이기까지. 그 거래 내용은, 아직 알려주기 좀 그런 거지…?”
“네. 천천히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 답하는 루시페우스의 어조가 단호했다.
‘뭔지 몰라도, 꽤나 중요한 비밀인 거겠지.’
우리가 승기를 잡은 것과 별개로,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했으니까. 신중한 그는 조금의 허점이라도 방지하기 위해, 히든카드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후작 부자와 그 가신들을 몰살하고 후작가의 흔적을 대륙에서 지워버리고 싶지만요….”
으, 응?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는 그의 말소리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저 나긋나긋할 뿐이었다.
이어지는 짧은 한숨과 함께 그는 바싹 굳은 내 정수리에 슬며시 이마를 기댔다. 늘 그렇듯 무게를 싣지 않는 접촉이었다.
“그렇지만, 제가 어떤 형태로든 전하의 곁에 있으려면… 조금의 흠결도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응, 그런가….”
맞는 말이기야 했다. 내 기사로든, 보좌관으로든, 호, 혹시나 부, 부마…로든….
앗,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대지 말자!
또 혼자 앞서나갔다는 생각에 나는 속으로 잔뜩 수선을 떨었다.
“배다른 누이의 혼외자마저 거둬준 양부를 살해한 비정한 조카가 아니라, 정당하게 그들을 파멸시키려면 말이지요….”
다행히도 그 자세로는 내 빨개진 낯이 보이지 않아, 루시페우스는 그저 하던 말을 이을 뿐이었다.
“하긴, 정당하게 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나만큼 그걸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였다.
정당하게 원작을 지키겠다고 10년이 넘도록 암조를 키웠고, 구박받는 빨간 눈의 아이를 정당하게 구할 길이 없어 그의 역할 운운하며 내버려 두었으니까.
그리 생각하니 양심이 콕콕 찔려… 나는 거기에 덩달아 물씬거리는 괜한 서운함에 집중했다.
“그러자니 바빴나 봐. 알비누스 쪽도 살피고, 게이블스 쪽도 살피고, 로즈버리에도 다녀오고….”
“그편이 뒤탈 없으니까요. 전하를 위한 일이니 제 기쁨이기도 하고….”
“그런 줄도 모르고 기다렸네.”
그의 말이 또 너무 다정해, 나는 거기에 말려들세라 재빨리 툴툴대었다.
깜짝 놀란 루시페우스가 내게 기댔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기다리셨다고요?”
“전에도 손거울 갖고 다니라고 하더니 딱히 연락하지도 않고. 요즘도, 뭐 하고 있나 알 수가 있어야지. 난 또 사라진 줄 알고….”
내가, 어? 괜히 그동안 헷갈렸겠어?
말하면서도 치졸해서 나는 억지스러운 소리를 속으로 삭였다.
“…기다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흘끗 본 루시페우스의 눈썹이 늘어져 있었다.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는 낯이었다.
“저야, 전하께서 회복하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 공무도 바쁘실 테고, 딱히 저를 기다리실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서….”
“경이 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구석이 있네.”
나는 쿡쿡 웃으며 그의 무릎을 간질였다. 전하, 이건 좀…. 그의 낯에 조금 전과는 다른 당혹감이 흘렀다. 이번에는 놀라라고 한 거였지만.
“용서받고 싶으면 말이지….”
“수도원에 직접 가시겠다고요?”
황궁으로 복귀하여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한 말에 알렉스가 깜짝 놀랐다.
장난 같은 용서의 대가로 내가 얻어낸 것은, 내 비밀을 흘린 신관을 만나러 가는 길에 나를 데려가는 거였다.
루시페우스는 굉장히 곤혹스러워했지만, 한편으로 내가 직접 가기를 고집하는 이유를 알아 결국엔 수락하고 말았다.
“아니, 그 먼 데까지 가자면 몇 날 며칠이 걸리는데요….”
“빨리 갔다 올 수 있어.”
“어떻게 빨리요? 거기가 말을 타도 사흘 거린데 마차로는…. 아, 혹시.”
알렉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빨리 수긍해주니 좋지만, 저건 명백히 날 놀리는 거였다. 나는 체념하듯 대꾸했다.
“그래. 루시페우스 경이 함께 움직이기로 했어. 호위 둘에 그림자 넷 정도까지는 괜찮겠다던데.”
“와아, 능력이 정말 압도적이시긴 하네요.”
마탑과의 업무를 도맡는 알렉스는 자연히 마법에 조예가 깊어져, 루시페우스의 실력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하는 눈치였다.
“황실 비밀에 연관된 일이니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고…. 무엇보다 경, 아직 에스메르 일 안 끝났잖아? 수정 거래 내역 추적하는 거. 그러니 황성 오래 비우면 안 되지 않겠어?”
“윽.”
내 타박에 잠시간 찔린 듯한 표정을 지은 알렉스는, 이내 심각한 낯을 지었다.
“사실, 몬타즈 상단 쪽은 진즉에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태 보고가 없었어?”
“그게, 전하께서는 귀족파에서 더 이상 수정을 모으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몬타즈 상단의 거래가 마지막일 거라고요.”
“그랬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 수 있는 건 루시페우스뿐인데, 그가 그 일을 그만두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수정 매입 규모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들이 수정을 다른 데 쓰는 바가 있는지, 그걸 추적하던 참입니다.”
“하지만 제 양부의 움직임이 심상찮아서요.”
…역시, 간단히 안심하기엔 이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