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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52화 (152/220)

152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12)

“그렇다는데, 경.”

창가에 서 있던 루시페우스가 이편을 돌아보았다.

“네, 그럼.”

짤막하게 대답한 그가 손을 몇 번 내저었다. 끼익, 끽, 내 옆의 협탁이 뒤로 밀리더니, 문가에 사용인을 위해 놓아둔 스툴이 그 자리로 왔다.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스칼렛은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아니, 소파 넓은데 여기 앉으시면 될걸….”

“전 이게 더 편합니다.”

누군 편해서 권했나, 스칼렛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진짜, 결벽증도 이런….”

보셨죠, 전하? 스칼렛이 내게 눈짓했다.

그게, 같이 안 앉으려고 그런 건 맞지만, 결벽증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이기야 하겠지. 나도 사정을 몰랐을 땐 그랬으니….’

하지만 달리 변명해줄 방법도 없었다.

시선을 또르르 굴려보았지만, 루시페우스는 태연하게 내 곁에 갖다둔 스툴에 걸터앉을 뿐이었다.

“경, 우선 이걸 좀 봐줘.”

내가 렌틸 자작 앞에 놓여 있던 서류 책을 가리키자, 루시페우스가 짧은 손짓으로 그걸 두둥실 띄웠다. 제게 날아오게 한 책을 받아 든 그는 묵묵히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막간을 이용해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요즘 저택이 아주 소란스러워요. 소후작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거기까지 말한 스칼렛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루시페우스 쪽을 흘끗 보았다.

“정신이라도 차린 것처럼, 단합 대회라도 하는 양 매일같이 귀족파 후계자들을 집에 불러들여서 말이에요.”

스칼렛이 차게 웃으며 말했다. 나와 렌틸 자작은 윌로우 놈이 정신 차릴 일이 없음을 알아 덩달아 웃었다.

루시페우스가 서류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소후작은 그들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협박요?”

스칼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번 신나서 웃고 떠들다가 가던데…?”

“웃으면서 이야기하면 모든 게 다 얼버무려지리라 착각하는 치들이잖습니까.”

루시페우스의 단언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윌로우 놈에게 귀족파의 약점을 다 들어가게 했다더니.’

아무래도 그걸 갖고서 윌로우 놈이 골목대장 놀이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가주님의 보좌관하고도 꽤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게…. 조만간 원로원에서 재밌는 꼴을 볼 수도 있겠다 싶고요.”

“아직도 마일스가 보좌관이니?”

“네, 찰리라고, 그 아들을 키우고 있기는 한데….”

루시페우스가 자료를 다 살피기를 기다리며 한동안 담소가 이어졌을 때.

탁, 두꺼운 표지가 덮이는 소리가 났다.

“벌써 다 읽으셨어요?”

스칼렛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저야 뭐, 읽어서 배우는 덴 도통했으니까요.”

“아하, 하긴. 아카데미 시절에.”

“…네, 벗이랄 것이 책밖에는.”

아, 이런….

그리 대꾸하는 그의 어조는 건조했지만, 내게는 그게 명치 끝을 욱죄는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아뇨, 매번 수석 차지하신 거 말하려고 했는데요….”

“영식에 대해서는 보넨 자작도 눈여겨보고 있었소. 아카데미 생활에 관심이 없어 보여서 아쉬웠다 뿐, 학자의 탑에 데려가고 싶어 했는데.”

“…그랬군요.”

루시페우스의 낯은 언제나처럼 단단한 무표정이었지만, 그 너머에 작은 당혹감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에게 아카데미는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지, 거기서 제게 누가 관심을 가졌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아카데미에서 마주쳤던 더벅머리 소년이 떠올라, 무의식중에 그의 무릎을 토닥였다. 바짓자락 너머가 설핏 굳었지만 나는 미안함에 빠져 의식하지 못했다.

그 모든 걸 지켜보던 스칼렛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휘며 물었다.

“그래서 그 뛰어난 속독 실력으로 파악하신 내용이, 경께서 아시는 바와 일치하나요?”

“네. 역시 전하께선 모든 걸 알고 계시더군요.”

내게 빙긋 웃어 보인 그는 내 손을 떼어 팔걸이에 올려두고서, 건조한 낯으로 스칼렛에게 답했다.

그 모든 걸 지켜보는 스칼렛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몇 가지 추측으로 결론 맺은 부분만 보충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경께서는 알비누스 후작님을 배신하시려는 건가요?”

스칼렛이 곱게 꾸민 목소리로 낸 질문에 나와 렌틸 자작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루시페우스는 응접탁자 위에 서류 책을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와 후작은 일종의 거래 관계였는데 그 거래를 지속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더욱이, 근래 소후작이 제 가치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여 더는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요.”

“가치관? 영식이 하던 일은 대부분 후작의 야망에 보탬이 되는 일 아니었소?”

렌틸 자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스칼렛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래 관계셨다면, 그 거래를 통해 얻기로 한 건 이제 필요하지 않으신 거예요?”

“네. 알고 보니 애초에 필요 없는 거였고요.”

그가 후작의 일을 돕는 대가로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기 위한 자본을 지원받기로 했던 건데, 이는 이제 없을 일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제가 거래 관계로써 이루려던 것은….”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스칼렛에게서 렌틸 자작에게로 옮아갔다.

“애초에 후작의 야망과 무관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음을 제가 알았고.”

그의 말소리는 담담했지만 듣는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 중요한 것’은 세르니타에서 그가 정신을 잃었던 이후로 늘 나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방관하는 선에서 그치려고 했지만…. 마침 소후작이 제가 지키고자 하는 유일한 가치를 해하려 하니, 더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겠더군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말소리가 선득하게 울렸다.

‘이건 도미닉이 내 체질을 두고 날 협박한 걸 말하는 거겠지….’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그저 찻잔에 입을 묻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두 레이디로서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은유하는지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래, 뭐. 영식에게 정확한 목적이 있다면 다행이오. 단순히 전하께 눈멀어 그런 거라면 언젠가는 후회하지 않을까 싶어 연장자 된 오지랖으로.”

“설령 그렇대도 후회할 리는 없습니다.”

“…….”

렌틸 자작의 너스레에 진지하기 그지없는 단언이 뒤따르자, 실내가 숙연해졌다.

“아, 하하. 그래서.”

분위기를 수습한 건 사교계의 일인자인 스칼렛이었다.

“제 오라비를 어찌하고 계신 건지 알려 주시겠어요? 다른 귀족파 후계자들을 협박하게 만든 것도 경의 작품인가요?”

스칼렛의 질문 세례에, 루시페우스가 뜸을 들이듯 다리를 길게 꼬며 그 위에 깍지를 꼈다.

“게이블스에 알비누스 소후작도 다녀갔습니까.”

“네에, 그분이 첫 번째였어요.”

“그렇군요.”

루시페우스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듯 미세하게 올라갔다.

“전하의 기사들이 수집한 정보는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들이지요.”

“응, 그렇지.”

나는 루시페우스가 서류 책을 흘끗하며 묻는 말에 대꾸했다.

“게이블스가 지금의 세를 구축한 것은 모두 과거의 일에 기인하는 것들입니다. 가령.”

루시페우스가 깍지 낀 제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힐베르크 후작가의 비극에 어떤 가문이 손을 댔는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의 말소리에 모두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나 또한 아닌 척했지만 크게 놀랐다.

‘저게 알비누스의 약점…이라는 거지? 알비누스가 단순히 힐베르크 영지를 노린 게 아니라, 애당초 그 일련의 사건들을 직접 꾸민 거였어?’

어쩐지, 힐베르크의 비극에서 작위적인 냄새가 나더라니….

그때, 렌틸 자작의 눈매가 매섭게 굳었다.

“성녀의 신변에 그들이 위해를 가했다면, 그건 역모 이상의 일이오.”

내가 세실 평생 그녀에게서 배웠지만, 그녀가 그토록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성녀께서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 지난 격랑 이후이긴 하지만…. 그 격랑이 이전보다 극심했던 건, 전하께서도 아시지요.”

렌틸 자작의 호박색 눈동자가 내게로 와서 붙박였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평소보다 크게 열린 탓에 이례적으로 황태자가 남은 성기사단을 이끌고 참전해야만 했던 지난 격랑.

그때 만 두 살도 안 되었던 내가 의견을 낸 걸 계기로 그레이스가 렌틸 자작을 섭외했으니, 당시의 일을 그녀도 알고 있을 거였다.

“학자의 탑에서는 그게, 성녀께서 환속하셨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제껏 격랑에 성녀가 참전한 적은 없었지만, 대대로 성녀들의 출현 주기를 따지면 격랑의 주기와 일치했거든요. 실제로 지난 격랑 때 성녀님의 신성력이 봉인된 반지를 가져가서 승기를 끌어오기도 했고요.”

렌틸 자작의 이야기는 공개된 적 없는 것이라, 우리 세 청년은 아닌 척해도 꽤나 동요했다.

루시페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한 가문이 다른 가문을 멸문의 지경에 이르게 한 음모라며 언급한 걸 테니까. 실제로, 그 자체로도 귀족파를 공격할 꽤나 좋은 소재이긴 했고.

하지만 자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차원이 대륙급이 된다.

“이 가설은.”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인 만큼, 학자의 탑 담장을 넘은 적이 없죠. 다음 격랑이 오기 전에는 검증할 수 없으니까요.”

이번에 연구 중인 그 건처럼요. 렌틸 자작이 나직이 덧붙였다. 원칙상 가설 단계의 연구는 탑 바깥으로 유출하면 안 되기에 조심하는 기색이었다.

“이후로 두 달의 그믐 때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가 갈수록 진해지고 있잖아요? 그 강도를 분석하면 정확히, 성녀께서 돌아가신 해를 기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녀를 해한 것을 대륙의 안전을 위협한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네요.”

“…의회에서 공개할 수 있도록 탑과 상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의중을 정확히 파악한 렌틸 자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20년 사제 관계, 이제 척하면 착이다, 이거야.’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던 루시페우스가 덧붙였다.

“게다가 그 사건은 게이블스와 알비누스의 두 가주가 가주직을 쟁취한 이후, 처음으로 함께 꾸민 일입니다.”

“공교롭게도 말이지.”

그리 대꾸하며, 나는 스칼렛에게 눈짓했다.

알비누스의 허물일 뿐 아니라 게이블스 후작에게도 치명타가 될 테니까.

스칼렛의 낯은 바싹 얼어 있었다.

그건 가문의 비밀을 제게 조금도 알려주지 않는 가족에 대한 원망 때문이 아니라, 이 진실이 선사한 부담감에 기인한 듯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자 루시페우스에게 물었다.

“경은 그걸 언제 알았고?”

“저야 꽤 오래된 일입니다.”

‘오래’를 언급하는 그의 어조가 다소 독특하게 울렸다. 그러니까 이전의 생부터 알고 있었단 소리였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비밀들이 모두 게이블스 소후작에게 흘러들어 가 있습니다.”

“…잘 정리하면 분명 좋은 패가 되겠네요. 현 가주님의 허물인 셈이니까요.”

마침내 스칼렛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기 깃든 건 조심스러운 설렘이었다.

“그리고 그 놈팡이라면, 분명 궁지에 몰리거나 들뜨는 일이 생겼을 때…. 아니, 하다못해 술에 취했을 때.”

“네. 으스대며 떠벌리기 딱 좋을 겁니다.”

스칼렛의 중얼거림에 루시페우스가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한동안 응접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민감한 사안인 만큼 결정적인 패였기에, 다들 착잡한 낯 너머로 미세한 희열을 품었다.

“그 증거로 쓸 만한 게 있을까? 그게, 경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증명해 보일 테니까요.”

루시페우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니, 내가 저를 왜 못 믿어, 이제 와서…?

한데 그의 낯에 떠오른 건 아쉬움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내가 저를 신뢰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담백함이었다.

“우선, 소후작이 근래 레이디 아멜리를 동정하는 듯한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힐베르크의 비극에 대해 알게 된 건 확실합니다.”

“그하고 계속 만나…?”

“그자가 알비누스 소후작의 불쌍한 의동생을 썩 신뢰하게 되었거든요. 본인을 낫게 해줬을 뿐 아니라 남의 부축을 받는 꼴을 안 보이게 해준 탓에요.”

“어쩐지, 몇 달간 누워만 있던 주제에 병상에서 나오자마자 열심히도 싸돌아다니더라니.”

루시페우스의 말에 스칼렛이 조소했다.

“제 마법으로 그의 근력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무리 움직여도 운동은 되지 못할 테니 당분간 회복할 일은 없고요.”

그 말에 나는 작게 풋, 웃었다.

“꽤 유치한 골탕을 먹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드네.”

내 너스레에 그간 무겁게 내려앉았던 응접실의 분위기가 슬며시 풀어졌다.

“그 외에도, 서류에 있는 일들을 공론화하실 거라면….”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서류 책을 한 번 스친 뒤 렌틸 자작을 향했다.

“필요하다면 원로원에서 증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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