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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51화 (151/220)

151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11)

“구, 국혼?”

나는 대경실색한 낯으로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아무 말이야…?

“왜요? 두 분 화해도 하신 것 같고. 여기에도 오신 거 보면 전하께서 하시는 일도 대강 다 아시는 거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내가 우물쭈물하는 걸 쳐다보던 스칼렛이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소곤대는 말이….

“남자 마음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대충 연애만 하다가 끝내겠다?”

“으응?”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개방적이셨네요?”

“뭐라고?”

“아무리 시절이 바뀌었다지만, 아직 아수라마수라는 정략혼이 대세고. 연애결혼을 한다손 치더라도 첫 연인과 하는 게 정석이잖아요?”

“그으렇긴 하지…?”

“그리고 두 분은.”

탁, 스칼렛이 절도 있는 손짓으로 부채를 접은 뒤 루시페우스 쪽에 대고 까닥거렸다.

그러고서 소리 없이 또박또박 움직이는 입 모양은 분명….

연, 인, 사, 이.

‘뭐, 뭐라고…? 누가? 내가? 루시페우스랑?’

드, 들었을까? 나는 그를 흘끔대고픈 걸 참으며 눈동자만 바르르 떨었다.

한데 스칼렛의 낯에 깃든 건 완벽한 장난기였다.

나는 뒤늦게나마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나 놀리는 데 맛 들였어, 아주?

“아니야, 그런 거.”

“아직은요?”

“아니야, 아무튼.”

뭐어… 아직 정확히 이야기한 것도 없고. 그가 신분 문제를 운운한 걸 보면 알비누스의 처분이 우선인 듯도 하고.

‘지금처럼 내가 피하지만 않으면 다 좋다는 것 같지만….’

기실 스칼렛의 말이 맞기야 맞았다. 내가 그와 이토록 가까운 관계인 게 알려지면 분명 사교계가 뒤집어지고 황실이 난리 나고 온 제국에 소문이 다 날 텐데.

‘그런 걸, 루시페우스는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일까, 나는 그의 선택에 모든 걸 맡기기로 한 차였다.

‘신분 문제야, 이번 일만 잘되면 작위 하나쯤 문제도 아니고. 빨간 눈의 경우에는 학자의 탑에서 연구 결과만 나오면 안심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러니까, 그가 원한다면야 어떻게든 방법이….

‘워, 원하기는 뭘?’

또 혼자 들떠서 전생 버릇 나오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애먼 스칼렛만 쏘아보았다.

“…전하께선 매정도 하시지.”

내 낯에 스친 생각을 다 읽었는지, 스칼렛은 뭘 알겠다는 양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상대가 상의 없이 한 행동에 반드시 보답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가진 걸 다 내버리신 셈이잖아요.”

스칼렛의 호박색 눈동자가 루시페우스 쪽을 곁눈질했다.

“보내주신 것들 살펴보면, 그 가문은 조만간 귀족 명부에서 지워질 텐데.”

“…역시 내 장기 말이 꽤 영리해.”

그녀의 말을 끊고자 한 말이었지만,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스칼렛에게 보낸 자료들은 암조에서 수집한 귀족파의 치부 중 게이블스가 개입한 건만 정리한 것이었다. 알비누스와 연관된 일들도 기록돼 있기야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알비누스의 죄가 무거움을 짐작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장기 말 고르는 눈은 좋으시면서, 왜 그쪽으론 그러실까.”

“영애. 갈수록 말이 좀 불경해?”

“그러게요. 제가 생각해도 요즘 좀 무엄하네요.”

그리 말하는 스칼렛의 입매가 삐뚜름한 미소를 그렸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머. 어떻게 하실 생각은 있는 거였어요?”

“…영애.”

스칼렛이 쿡쿡 웃으며, 항복했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제집인 양 자연스럽게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루시페우스도 몇 걸음 떨어져 우리를 뒤따랐다.

“순간 이동 마법으로 왔다고 했지?”

“네, 재밌던데요?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스칼렛은 내게 팔짱을 끼는 척하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루시페우스 경 있잖아요.”

한껏 숨죽인 말소리에 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좀… 결벽증인가요?”

“뭐?”

“저를 이동시키겠다며 소맷부리를 잡는데, 무슨, 손끝으로 벌레 집듯이….”

“아아.”

그 사정이 무엇인지 알겠어서 나는 쿡쿡 웃었다. 다른 사람하고는 닿을 수 없으니 그런 거겠지.

내가 아무리 스칼렛과 터놓았어도 그 사정까지 말할 순 없는 법. 나는 루시페우스 대신 적당히 변명해 주었다.

“뭐, 헥터 경이 볼까 봐서 아니겠어?”

“헥터요?”

“지금 여기도 결국 떼놓고 온 거잖아.”

“네에, 뭐… 제 알리바이도 만들어야 하고. 여긴 전하의 기사들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래. 그것만도 자존심 상할 일인데, 영애랑 손 꼭 잡고 순간 이동하면 헥터 경이 기분 나쁘지 않을까?”

“글쎄요…?”

스칼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나는 헥터 경이 과묵한 갈색 머리칼의 미남이란 것 말고는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그으렇게까지 배려심이 넘치는 분 같지는…?”

“뭐?”

얘가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보는 눈이 없네?

내가 아닌 척도 못 하고 황당하다는 낯을 짓자, 스칼렛이 키득거렸다.

“뭐어, 일리는 있지만요. 아니, 이렇게 남자 마음 잘 아시면서 지금껏 왜 모른 척하셨대요?”

“남자 마음은 무슨, 그냥 같은 사람으로서 짐작하는 거지.”

“…하여간.”

스칼렛이 밉살스럽다는 듯 삐죽대었다.

응접실에 다다르자, 요즘 자작저에 머무르며 호위 업무를 총괄하는 리나가 서 있었다.

“앗, 제국의 영롱하신 작은 별을 정말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편찮으셨다더니, 어째 더 눈부셔지셨습니다?”

“그래, 리나 경. 진짜 오랜만이네.”

나는 내 오랜 부하의 익숙한 너스레를 한 귀로 흘려 넘기며 생긋 웃었다.

“크으, 역시 전하의 미소가 최고의 포상입니다. 그런데 왜 혼자십니까? 오늘 호위는…?”

그리 말하며 내 뒤편을 두리번대던 리나는.

“아.”

루시페우스를 확인했는지 김샌 표정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올 때면 다른 소대 동료를 볼 수 있으니 기대한 모양이었는데….

‘루시페우스가 있으면 내 호위가 없는 상황을 납득하는 거구나. 그런 거구나….’

내 기사들의 루시페우스 무한 신뢰, 이대로 괜찮은가.

“알렉스가 왔는데, 저택에 결계를 칠 거라 밖을 엄호하기로 했어.”

“네에, 네. 역시 저희 일이 줄어들 거였지 말입니다.”

“일 줄었어? 그럼 급료도 슬슬….”

“아아니, 감봉당하겠단 소린 아니고요…!”

언젠가의 농담에 진저리 치며, 리나가 황급히 응접실 문을 열었다.

응접실 안에는 하녀들이 미리 차려두고 간 다과상 앞에 렌틸 자작이 홀로 앉아 있었다.

“아, 전하. 오셨군요.”

렌틸 자작은 읽던 것을 탁, 덮으며 자리에 앉은 채 이편을 바라보았다. 내가 스칼렛에게 책처럼 꾸며 보낸 기밀 서류철이었다.

“편찮으셨다더니, 괜찮으세요?”

“내가 은사를 졌는데요, 뭘. 괜한 걱정을 끼쳤네.”

자작에게 생긋 웃어 보이며 나는 그녀가 비워둔 상석에 가서 앉았다.

그러는 사이, 뒤따라 들어온 루시페우스가 문을 닫고서 거기 머물렀다. 문을 한참 짚고 있는 게 어떤 마법을 거는 듯했다.

“…전하께서 소싯적부터 인재를 쓰시는 방식이 남다르시기야 했습니다만, 마법사를 이런 방식으로 회유하실 줄은 몰랐어요?”

“이런… 방식?”

렌틸 자작의 말소리는 꽤 진지했지만, 그게 농담인지 그녀의 반대편에 앉은 스칼렛이 쿡쿡 웃었다.

뭐야, 나만 못 알아들었어?

“저 영식이 이곳의 경비를 위해 애써준 게 벌써 한 달이 넘은걸요.”

“…아아, 그게.”

그땐 별 사이 아니었는데.

지금이라고… 뭐, 음, 그게….

내가 적당히 대꾸할 말을 찾을 때였다.

“처음에는 전하께서 마탑에서 마법사를 섭외해 오셨나 했는데, 알비누스의 영식이란 소리를 듣고 제가 얼마나 놀랐던지요?”

“으응, 아무래도 마법사는 희귀하니….”

“그게 아니라, 전하께서는 옛날부터.”

거기까지 말한 렌틸 자작은 루시페우스가 있는 쪽을 흘끗 살폈다. 정원 쪽에도 결계를 거는지, 어느새 창가로 옮겨 선 그는 유리창에 손을 올린 채 미동도 없었다.

“혼외자 출신의 처우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정말로 부마 자리를 빌미로 혼외자 출신의 귀족파 마법사를 섭외하셨나 싶어서.”

“아, 아니, 그게요!”

“물론 전하께서 황궁을 안 벗어나시려는 걸, 저도 잘 알지만요.”

아까부터 고모랑 조카가 쌍으로 왜 이래?

나는 반사적으로 루시페우스 쪽을 흘끗거렸지만, 다행히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저 결계를 치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보다 오래 걸리네.’

오늘 논의할 이야기가 귀족파에 조금이라도 흘러들어 가면 안 된다는 사실은 그가 제일 잘 알 테니까.

“뭐, 피차 이해관계가 맞으니 말이죠.”

“이해관계요.”

내 에두른 말소리에 렌틸 자작이 눈썹을 들썩였다. 조용히 다과를 준비하던 스칼렛은 놀릴 생각 만만인 듯한 미소를 지었고….

“뭐, 알비누스도 평온한 가문은 아니긴 합니다만….”

렌틸 자작이 그리 대꾸하며, 루시페우스 쪽을 살폈다.

루시페우스는 오늘 우리 세 사람의 밀담에 제가 가진 정보를 보태기 위해 동석한 참이었다. 혹시나 싶어 부탁했더니 그가 흔쾌히 나선 것이었다.

“렌틸 자작이랑 스칼렛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몇 가지만 확인해줄 수 있어?”

“확인뿐인가요. 아직 파악하지 못하신 내용이 있다면 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가 지금껏 저택의 경비를 도와준 것에 비하자면 훨씬 본격적인 참여였다.

‘자작이야 루시페우스가 왜 갑자기 후작을 배신하고 우릴 돕는지 궁금하겠지.’

그에 대해서는 내게도 아직 정확히 이야기해준 바가 없었다. 조만간 말해 주겠다고 하니, 결정적인 정보일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뭐, 이제 우리 사이에 비밀…이랄 것도 별로 없긴 하니까….’

나는 쑥스러운 생각에 빠져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렌틸 자작은 서류 책을 내 쪽으로 올려놓으며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꽤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더군요. 그간 기사들 키운다고 애쓰신 보람이 크시겠어요?”

“애썼기는? 저들이 알아서 잘 큰 거죠.”

렌틸 자작은 내가 호위 소대의 종자들을 암조로 키워내기 위해 그레이스를 설득할 때부터 지켜본 인물이었다.

그녀의 말에 씨익 웃으며, 찻잔에 입을 대려던 순간.

“전하, 잠시.”

어느새 루시페우스가 내 등 뒤에 와 있었다.

“식었습니다.”

“아, 괜찮은데….”

그가 찻잔을 쥔 내 손을 감싸듯이 쥐자, 찻잔의 손잡이를 타고 미약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지난번에 보니 이 정도 온도로 드시길래요.”

“저기, 경.”

스칼렛이 자못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건 차 따르기 전에 해주면 어때요? 아무리 우리가 뒷전이라지만… 앗.”

“예, 그건 맞습니다만.”

루시페우스의 손이 허공을 잠시 떠돈다 싶더니, 다른 사람의 찻물도 덥혀준 모양이었다.

“전하 덕에 마법으로 데운 차도 마시는군요.”

렌틸 자작이 그렇게 무심하게 대꾸했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흐물흐물한 것이… 아무래도 피식거리는 웃음을 삼키고 있는 듯했다.

거기에 쑥스러운 건 나뿐, 루시페우스는 다시 창가로 가서 하던 일을 계속할 따름이었다.

“보셨죠?”

스칼렛이 루시페우스 쪽을 턱짓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우리 뒷전인 거 부정도 안 하시는 거.”

“나보다 얼마나 우선이고 싶어서?”

나는 이치에 안 맞는 대꾸인 걸 알면서도 그렇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말 좀 섞어보니까 정말 별난 분이세요. 검은 신사라며 찬미하는 우리 영애들이 알면 얼마나 놀랄지….”

“스칼렛.”

“고모님, 그치만요.”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 생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이제 서로 도울 사인데, 좋은 말만 할까?”

“어머머, 고모님. 전하께서 이젠 아주 루시페우스 경 편만.”

“거기 적힌 일에 대한 설명, 안 궁금해?”

“…궁금하죠.”

내가 마치 남 일 말하듯 하는 소리에, 스칼렛이 얄밉다는 듯 눈을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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