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50화 (150/220)

150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10)

“게이블스 소후작… 말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나는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게 게이블스의 많은 비밀이 흘러들어 가게 해두었습니다.”

“게이블스의 비밀?”

“정확히 말하면. 게이블스가 귀족파를 통솔하기 위해 쥐고 있는 다른 가문의 비밀들이죠.”

“비밀이라면, 약점…을 말하는 거지?”

“전하께선 늘 옳으십니다.”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은은한 호선을 이뤘다.

놀리는 게 아닌데 나는 지레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옳기는…. 그냥 다 모른 척하고서 뻔뻔하게 굴던 거였는데.’

어릴 때고 지금이고 그에겐 별반 잘한 게 없구나…. 나는 마음이 침울해질세라,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윌로우 놈에게 귀족파의 약점이 다 들어갔단 말이지…?”

“윌로우 놈….”

웃음을 참는지, 루시페우스의 낯이 조금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네. 게이블스 후작은 후계자 수업이라고 생각하며 다 일러줬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윌로우가 말이 후계자지, 아직 가주의 업무를 제대로 익히지 않은 걸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병상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소후작이 철이 들었거든요. 고모님의 등장으로 누이를 본격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하더니 당당히 소후작으로 인정받기 위해 뭐라도 할 만큼요.”

“…아하.”

그러니까, 이 모든 게 그가 한 일의 결과란 소리였다.

윌로우 놈을 묶어두었던 마법을 풀어 사교계에서 다시 활개 치게 했듯, 그가 실각할 경우의 수를 늘린 모양이었다.

“그자가 으스대길 좋아하니 귀족파의 약점이 공론화될 좋은 기회겠네. 조만간 렌틸 자작이랑 레이디 스칼렛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좋은 소식이 되겠어.”

“그리고 또.”

미미한 표정 변화로나마 뿌듯한 기색을 뽐내던 루시페우스가 말을 이었다.

“제 양부와 연이 있는 신관이 있습니다. 아마 전하의 비밀이 그를 통해 샌 것 같은데….”

“안경 쓴 신관?”

“…아시는군요?”

마침 오늘 보고받은 내용이었으니까.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내 일인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제 쓸모를 보일 기회를 하나 놓쳤습니다.”

말소리는 당혹스러운 듯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내 낯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입술에서….

갑작스레 지난밤의 기억들이 파편이 되어 머릿속을 헤집었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왜, 왜 그래?”

“아, 그게….”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내가 타박하듯 낸 목소리에, 루시페우스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전하께서 미소를 보여주시니 좋아서….”

아, 그러니까….

“웃으실 때 늘 머리를 조금 흔드시기에.”

“레이디를 눈으로 좇다 보니 알게 된 일입니다. 제게는 보여주시지 않는 모습이니 더 깊이 각인되었나 보지요.”

생각해보면 그때도 그는 줄곧 같은 마음을 내비치고 있었는데.

아니, 그전부터, 혹은 꽤 오래전부터….

‘…자꾸 미안해지네.’

한편으로는 손끝이며 명치 끝이며 간질거리지 않는 부분이 없어, 나는 뭐라 대꾸하지도 못했다. 루시페우스 또한 한동안 말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잠시간 쑥스러운 침묵이 흘렀을 무렵.

“아무튼, 그래서 조만간 수도원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수도원에? 경이?”

“네. 그 신관이 수도원에 있다고 해서요. 금언 서약하는 것을 엿들었다던데, 절차상 불가능한 일이라더군요.”

“그런 걸 대신전에서 알아봤고?”

“…네.”

루시페우스의 대꾸가 한 박자 늦었지만, 나는 거기에 별로 주목하지 못했다.

“수도원에는 내 쪽에서도 파견 보낼 예정인데.”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내 일이잖아. 내 수하들도 나름대로 조사한 바가 있고.”

“저희 가문에서 비롯된 일인걸요.”

“경은 알비누스에서 나올 거라며.”

“그렇지만….”

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거기 깃든 건 명백한 시무룩함이었다.

그게 또 귀엽게 느껴지고 말아, 나는 손을 뻗어 깔끔하게 넘긴 머리칼을 빗질하듯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로즈버리에도 다녀왔다며. 피해 보상금도, 분명 경의 사재에서 냈을 거 아냐.”

“재물은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말소리가 단호하게 울리는가 싶더니, 그의 머리를 지분거리던 내 손끝이 어느새 그의 손에 쥐여 있었다.

“이렇게 전하께서 칭찬해 주시는 게 훨씬 값진걸요.”

나직하게 읊조리던 그의 말꼬리는, 내 손끝에 깊이 새겨지는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손끝에서 심장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 그렇다면.”

그게 번번이 너무도 어색하여 나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 몬타즈 상단에서 수정을 사들인 거. 그쪽도 알아봤다며.”

“아, 그거요….”

그가 앓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제가 그만두기로 하기 전에 계약이 체결된 건이더군요. 거래를 취소할 말미가 충분했는데도 왜 그대로 진행했는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다 그 일에 쓰려고 모으던 거지…?”

“…네. 거기엔 마기에 오염된 수정이 필요하거든요.”

“아하.”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마계에서 나오는 마물에 대응하기 위해 수정을 사들인 게 아니라, 수정을 마기에 오염시켜서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여는 데 쓰려던 거였어…?’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인위적으로 열렸다는 사실이 원작에 언급되지 않았던 만큼, 그 원리 또한 나로서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루시페우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네.’

마기에 오염시키려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가까이 가야 하고, 그쪽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으니까.

“그럼 수정을 사들여도 경이 없으면 큰 소용이 없겠네?”

“…이론적으론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제 양부의 움직임이 심상찮아서요.”

“그래?”

“제가 상단주 대리를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빼낸 걸 눈치챘는지…. 사용인이나 가신을 통하지 않고 부자가 직접 움직이는 일이 늘어났더군요.”

그것이 제 과오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굉장히 멋쩍은 낯이었다.

“에스메르에도 더 이상 거래를 제안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전하를 뵈었던 날 바로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요…. 에스메르에 제 입김이 닿았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들이 에스메르를 이용하려고 해서 그간 쏠쏠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리 중얼거리며 나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도미닉이 내 체질을 갖고 협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난 기색이었으니, 그길로 알비누스의 부자에게 찾아간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 때문에 그런 거니까….’

그 사실에 새삼 또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나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한데 내 침묵을 잘못 이해했는지, 그가 조급한 낯으로 재빨리 말했다.

“그럼 혹시, 마검사들을 심문하시는 것을 제가 도울까요.”

“그걸 경이 왜?”

“조금이라도 더 쓸모 있어야, 전하께서 곁에 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떠신가요. 제가 꽤 쓸 만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제 쓸모가 마음에 드셔서 곁에 둘 만하다 생각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또….

그는 번번이 자신의 쓸모를 강조했고, 그것이 세실리아로 태어나고서 내가 강박적으로 생각해온 것과 다르지 않아 번번이 마음이 저릿했다.

나 또한 여전히 ‘쓸모 있는 세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기실 나도 황실에 보답하겠답시고 쓸모를 되뇌는 내 마음이 기이하다는 걸 알았다.

‘어린 시절에 레오가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준 덕에 누그러들기야 했지만….’

그에게는 정말, 아무도 없었지.

그래서인지 동질감보다 더 큰 건 미안함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쥐여 있는 손을 움직여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내 기사들도 충분히 유능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과 다른 능력을 가졌고….”

“내 말은.”

그의 말을 잘라내고서, 나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이 정도면 곁 아니야?”

“이 정도요?”

그와 내 사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정확히 어떤 형식을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가까운 거 아닌가….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입에 올리기가 쑥스러워서, 나는 입을 꼭 다문 채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내 말의 의미를 곱씹는지,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집요하게 살폈다. 거기에 답이 적혀 있는 것처럼….

“…아.”

그리고 어딘가에 생각이 가닿았는지.

“그럼 혹시.”

그가 당황스러운 듯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설레셨다고 하셨죠.”

“응?”

“좋으셨다고도요.”

윽. 면전에서 내가 울고불고하며 마구잡이로 떠든 말들을 주워섬기면…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데.

“으, 응….”

“그게, 지금도…이신 거고요…?”

“그만 말해….”

그의 거듭된 확인 사살에 나는 정말이지 증발해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홱 돌렸다.

“아, 그런 거군요….”

눈동자만 굴려 그의 기색을 살피자니… 수면에 파문이 일듯, 그 낯에 천천히 훈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내 그는 상체를 숙여 제 이마를 내 어깨에 기댔다. 조금의 무게도 싣지 않은, 안도감만을 실은 접촉이었다.

“…그러시다면, 저는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나는 손끝으로 머리가 묶인 그의 목뒤를 간질이듯 쓰다듬었다.

“저는 곧 귀족 신분도 잃을 테고, 게다가 혈통도 미천하지 않습니까….”

우물거리는 그의 말소리가 옷깃을 간지럽혔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긴, 아수라마수라에서는 아직 그런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의 혈통 문제는….’

빨간 눈의 경우에는, 정말 문제 될 게 없는데.

리나가 빨간 눈의 마을을 발견하고 막심과 알렉스가 자료를 찾기 위해 다녀간 이후로, 학자의 탑에서도 관련 연구진이 꾸려졌다.

그렇다면 근시일 내에는 그 비밀이 밝혀질 테고….

‘이 이야기를 해주면 안심하겠지?’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럼 혹시, 그때 입 맞춰주신 것도.”

“으응?”

“그냥 저를 동정하셔서가 아니라….”

“경, 진짜!”

나는 기겁하여 그의 눈앞을 양손으로 막고 말았다.

“나를 뭐로 보고?”

“마음이 약해지셔서 제 무례를 눈감아주신 거라고….”

급기야 나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정수리 끝까지 빨개진 게 빤한데, 안경을 건드리지 않고는 그의 시야를 가릴 수가 없었으니까.

아, 창피하게…!

“내, 내가 나 좋다고 다 받아줬으면 사교계에 나랑 그… 그… 안 해본 사람이 없겠지!”

숫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수준이었다. 한데, 갑자기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더니….

“…또 누가 있었습니까?”

그가 단호한 손짓으로 내 손을 걷어내었다.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감히, 어떤….”

“아, 아니라니까!”

억울해서 울먹울먹한 눈으로 맞섰지만, 그의 낯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진지했다.

그 대치가 얼마간 이어졌을 때.

“…그러면 혹시.”

갑자기 그가 눈을 내리깔더니, 고개를 어슷하게 숙여 바싹 다가왔다.

그의 말소리가 내 코앞에서 울렸다.

“심려하시는 일이 다 끝날 때까지는 잊어두려 했습니다만….”

그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내 얼굴이 바싹 달아올랐다. 그의 사각지대로 숨어들듯 쪽, 짧게 입 맞췄다.

“…그런 건 물어보는 거 아니야.”

“그런가요.”

그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바투 끌어안았다.

달그락, 테이블보가 이지러지며 찻잔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며칠 뒤, 렌틸 자작의 타운하우스.

“전하, 이제 괜찮으세요? 갑자기 편찮으시다기에 놀랐어요.”

내가 현관에 들어서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스칼렛이 나를 반겼다.

“그럼, 그럼. 그동안 잘 지냈지? 나 때문에 늦어져서 미안.”

“아니에요. 저도 그동안 이것저것 생각했고. 그런데, 혹시….”

그리 말하며 스칼렛의 눈동자가 도르륵, 내 뒤편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하여 집사 대신 나를 맞이한 루시페우스가 있는 쪽이었다.

오늘의 만남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그가 저택 전역에 환영 마법을 건 참이었다. 사용인들 또한 잠시간 잠들어 내 방문을 모르게 되었다.

스칼렛이 온 것 또한 게이블스에 알려지지 않도록, 그가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스칼렛을 데려오기도 했다.

스칼렛은 눈매를 휘며 은근하게 말했다.

“곧 국혼이 치러지는 건가요?”

雪花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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