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49화 (149/220)

149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9)

‘언제 온 거지?’

낮이어서, 또 실내에 조명이 환해서 잘 안 보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반가운 낯을 감출 생각도 못 하고 덥석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어? 그 손거울, 그때 그….”

케인이 알 만하다는 듯 피식거렸다.

“마도구는 마도구였군요?”

케인과 함께 성내에 나갔을 때 받은 것인지라 그의 눈에도 익은 거였다.

나는 그를 한번 째릿, 노려보고는 손거울을 열어보았다.

역시나, 마치 인쇄된 것처럼 유려하게 그려진 그의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온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여기 와 있다는 건가…?

나는 흐물거리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어야만 했다.

케인과 데릭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피식댔지만, 다 용서할 수 있었다.

온실의 문에 양손을 올려두고서, 나는 작게 숨을 골랐다.

며칠간 밀린 업무를 최대한 빨리 마치고 달려왔는데, 막상 그날 이후로 처음 보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이런저런 걱정에 마음이 복잡한 것이었다.

‘그게 정말, 다 진짜 있었던 일인 거겠지…?’

무엇보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반쯤 혼미한 상태였던 게 문제였다.

물론 그토록 강렬한 기억이 꿈일 리야 없겠지만….

나는 수런대는 마음을 다잡으며 온실 문을 밀어젖혔다.

일전에도 이렇게 그가 기다리는 온실에 들어섰었는데.

‘그때도 분명 설렜으면서, 안 그러려고 애썼지….’

밝힐 생각 없는 마음을 쥔 채로, 그런 문제에는 애써 관심 갖지 않으려 노력하던 때.

이토록 그의 마음이 선명한데도 그저 무시하려 애쓰던 그때.

그게 오래되지도 않은 일인데….

그 변화가 새삼 설레어, 두근대는 마음으로 나는 발을 내디뎠다.

‘어딨지?’

한데, 그날과 달리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땐 내가 오는 기척을 알아차리고 기다렸던 것 같은데…?

‘이미 와 있다는 소리 아니었나?’

다른 사람이 올까 봐서 숨었나…?

의아한 마음으로 온실을 이곳저곳 두리번거릴 때였다.

쪼롱, 쪼로롱.

마침 나를 이끌듯 새들이 한곳에서 지저귀고 있어, 나는 절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찾았다.’

지난번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통유리창 옆 화단. 그 울타리에 기대어 길게 다리를 뻗어 앉은 채, 루시페우스가 잠들어 있었다.

‘신성력의… 기원?’

장갑이 꼼꼼히 끼인 손끝에는 고대어로 제목이 적힌 두꺼운 책이 걸려 있었다.

‘이런 걸 읽으니까 잠드는 거지.’

나는 속으로 쿡쿡 웃으며 그를 살폈다. 초가을의 온실인지라 재킷은 벗어 두었지만, 셔츠는 목깃이며 소매를 끝까지 꼼꼼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 나른한 모습 위로 오후의 햇살이 기울어져 쏟아지니, 조금 전까지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발소리를 한껏 죽이며 그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피곤했나?’

고개를 살짝 모로 수그린 채 잠든 그는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후작저에서 나왔다더니, 제대로 못 자고 다니나?’

나는 그 옆에 조심스레 쪼그리고 앉았다. 무릎 위로 팔짱을 끼고서, 거기에 턱을 괴고 그를 살폈다.

고집스럽게 도드라진 눈썹 뼈, 그 아래로 섬세하게 뻗은 콧날, 안경 너머로 엷게 다물린 눈꺼풀, 그 가장자리를 빼곡히 채운 속눈썹….

이렇게 평온하게 잠든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릴 때도, 얼마 전 세르니타에서 올라왔을 때도.

‘아, 동대륙에 있는 걸 봤을 땐 좀 푹 자고 있는 것 같았지.’

무방비한 낯을 이토록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게 또 간질간질한 일이라, 나는 깨울 생각도 못 하고 한참 그의 낯만 살폈다.

‘진짜 깊이 잠들었나 보네.’

아파서가 아니라, 그저 내 공간을 편히 여겨서 그가 푹 잠들었다는 사실에 또 마음이 수줍어졌다.

새들이 오후의 햇살 사이를 날아다니는 소리만이 그 안온한 대기를 채웠다.

‘…죽은 건 아니겠지?’

괜한 호기심에, 손을 슬그머니 뻗어 그 뾰족한 코끝에 갖다 대려 할 때였다.

“눈 떠도 될까요.”

“으, 응?”

갑작스레 루시페우스의 입술이 움직여,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 안 자고 있었어?”

얼굴이 새빨개졌을 게 뻔해, 나는 팔에 얼굴을 묻고는 빼꼼히 내민 눈으로 그를 살폈다.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더니, 눈꺼풀이 길게 찢어지며 천천히 눈동자가 나타났다. 나를 곁눈질하는 그 눈매엔 장난기 어린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오시자마자 깼는데, 너무 빤히 보시기에.”

“빠, 빤히 보기는. 알았으면 알은체를 했어야지.”

“그냥, 어찌하시나 궁금하기도 했고요.”

“어쩌긴 뭘 어째?”

들켰다는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이지만, 그의 말소리며 낯에 장난기가 진득한 것이 더 간질간질했다.

아, 정말 뭐가 달라지긴 했구나.

그 모든 게 쑥스럽기 그지없어서, 나는 숫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전하?”

“말해.”

“얼굴 좀 보여주세요.”

“그냥 말해.”

나는 더욱 꼭꼭 얼굴을 파묻었다.

끄응, 그가 난처하다는 듯 침음하더니 내게로 바싹 기울이는 기척이 났다. 그의 맨손이 내 발등을 감쌌다.

“제가 쓸데없는 장난을 쳤습니다. 자다 깼는데 누가 있는 게 낯설었거든요. 그리고….”

평소보다 빨라진 말소리…. 달래는 말소리가 밑도 끝도 없이 다정했다.

“옛날 생각도 났고요.”

“…….”

그러니까, 내가 꿈속에서 어린 루시페우스를 보던 때를 이야기하는 거겠지.

나는 꿈으로 여겼지만, 그에겐 생생한 현실이었던 그 추억.

그 탓에 외로운 아이를 멀거니 쳐다보며 한두 마디나 위로랍시고 주워섬기던 그 시절.

아무리 그가 괜찮다고 했지만, 그에 대한 미안함이 흐려지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그게….”

내가 새치름하게 굴던 걸 그만두고, 순순히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좋았다는 의미입니다.”

“…….”

“정말로 그리웠다는 의미고요.”

내가 고개를 들길 기다렸을 그의 낯에는 내가 자책할까 걱정하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루시페우스의 단단한 손끝이 내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분명, 귀 끝까지 새빨개져 있을 터였다.

마침 루시페우스가 앉아 있던 곳에 잔디가 깔려 있어서, 우리는 거기에 그대로 머물렀다.

바닥에 테이블보를 깔고 그 위에 다과상을 차리니,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층고 높은 온실의 유리 천장에 투과된 오후의 햇살이 키 큰 야자수들을 해밝게 물들였다.

“제가 온 걸 전하의 시녀들이 압니까?”

내가 제 잔에 차를 따르자, 루시페우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괜히 멋쩍어져 눈동자만 굴렸다.

“으응, 그냥 손님이 왔으려니 하는 것 아닐까…. 사람들 눈 피해서 손님 맞으려고 만든 공간이니까.”

헨리에테가 뭘 눈치채고 언질하기라도 했는지, 시녀들이 내온 건 정확히 2인분의 다과였다.

이쪽은 티 테이블을 둔 쪽에서 보이지 않고, 또 그가 밖에서 보이지 않게끔 유리창에 결계를 쳤다고 했는데 말이다.

‘황실에 사생활이란 게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온실에 손님을 들인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게 루시페우스였던 적은 없어서 꽤나 쑥스러운 것이었다.

이른 저녁을 대신하게끔 핑거푸드로 채운 티 트레이 역시 넉넉히 두 사람분으로 꾸려져 있었다.

“입엔 맞아?”

“황궁의 별미인걸요. 맞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작은 크루아상으로 만든 샌드위치를 꼭꼭 씹으며 루시페우스가 신중하게 답했다.

‘태양제 때 축제 장터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모든 음식이랄 것을 처음 겪는 사람처럼 번번이 어색하게 구는 것이었다.

‘솜사탕이나 커스터드 크림 빵이야 귀족들에겐 낯선 맛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이런 평범한 메뉴에조차 이러면.’

하릴없이 어린 루시페우스의 골방에 놓여 있던, 성의 없이 차려진 식사가 떠오르고 말았다.

거기에 또 마음이 욱신거려, 나는 내 옆에 앉은 남자의 낯을 조심스레 살폈다.

언제나처럼 말끔한 낯이었지만, 내가 걱정을 담아 바라봐서일까. 괜히 눈 밑이 우묵해 보였다.

“후작저에서 아예 나온 거야?”

남은 샌드위치를 우물대던 그의 낯이 우뚝 멎었다.

“아니, 그게. 피곤해 보이길래…. 소후작이 가출 운운했었단 말이야.”

소후작이라는 말에, 그의 낯이 살얼음 낀 듯 더욱 살벌하게 굳었다. 그는 손에 남은 것을 찻잔의 받침에 내려놓고는 냅킨으로 입을 찍어내었다.

“네…. 아무래도 협력하지 않기로 했는데, 계속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떠돌아다니는 거야?”

“네?”

“잠을 제대로 못 자나 싶어서. 방금도 그렇고.”

“아아.”

그가 멋쩍은 듯 목뒤를 쓸었다. 바싹 얼었던 낯이 다소간 풀린 기색이었다.

“…아주 아니라곤 못 하겠군요.”

“신성력 쓰면 괜찮은 거 아냐?”

나는 어느새 찻잔도 내려두고 바닥을 짚어 그에게 바싹 상체를 기울였다.

“우리 언니들도 그렇고, 레오도 그렇고. 신성력 쓰면 남들보다 체력도 더 빨리 회복되는 것 같던데.”

거기까지 말했을 때, 루시페우스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아닌가? 나는 그의 낯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께서는 제 지난 생을 다 아시면서.”

그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내 손등을 살며시 짚었다.

“꼭 그를 그렇게 부르셔야겠습니까….”

“응? 그? 누구?”

생각지도 못한 말소리에, 내가 한 말을 곱씹다 보니….

“레, 레오?”

“…그것도 전하께서 하시면 안 되는 것으로 추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요….”

제게 그럴 자격이 없으니…. 그리 말끝을 흐리며 루시페우스의 낯이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이거…. 지, 질투…?

레오폴트가 나를 애칭으로 불렀다가 아멜리의 질투를 샀던 일이 겹쳐져,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내 낯에 이는 변화를 들여다보던 그가 엷게 웃으며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3황녀 전하께서 어디까지 확인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손가락이 마치 내 손등을 간질이듯, 마디의 오돌토돌한 능선을 배회했다.

“신성력은 평소에 봉인해두고 있습니다. 그땐 제가 잠시 흐트러지는 바람에 그게 풀렸던 거고요….”

“아….”

“안 쓰는 게 더 편해서, 지금은 다시 눌러 두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나 치유해줬을 때는.”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개방하면 됩니다. 전하께 쓰이지 않으면 전혀 필요 없는 힘이니까요. 저야 그쯤 없어도 튼튼하고.”

내 손을 만지작대던 손이 내 얼굴로 올라와 눈썹을 쓸었다. 덧그리는 양이, 내가 눈썹을 한껏 늘어뜨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아까 전부터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그, 프리지어궁에 방 많은데….”

“네?”

“경은 몰래 왔다 갔다 할 수 있잖아. 그게, 2층은 나 혼자 써서 밤이면 사람도 없고.”

“…….”

루시페우스의 낯이 기묘하게 굳었다.

“불편하게 자면 아무래도….”

“제게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소리가 너무 단호해서, 나는 찔끔 놀라고 말았다.

내가 또 멋대로 들뜨고 말았나 싶어서….

‘괜히 부담스럽게 굴고 말았나?’

또 전생 버릇 나오고 마는 건가, 마음이 조금 침울해지려 할 때였다.

루시페우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를 생각해 주시는 것 같아 더없이 기쁘지만…. 제 개인적인 일로 괜히 심려 끼쳐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후작저에 있는 제 방에 결계를 쳐 놓았습니다. 저택에서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해두고서 이따금 오가고 있고…. 그러니까 그쪽은 정말로 신경 안 써주셔도 됩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어째선지 쑥스러운 듯한 낯으로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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