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8)
“아무래도 마법을 쓰시니까 운신이 자유롭지 않으십니까.”
케인이 한껏 사무적인 표정으로 답했다. 차마 입가에서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건 참을 수 없는 듯했지만….
“언제?”
“한 닷새쯤 됐으니, 전하께서 와병 중이실 때 아닐까요? 며칠 전에 병문안 오셨다더니, 못 들으셨어요?”
“응, 뭐, 딱히…?”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다녀간 일 자체는 진즉에 다 퍼졌던 것이다….
‘결계를 쳐서 보고 들은 건 없어도, 내 방에 와서 오랫동안 머무르다 간 건 알 수밖에 없으니까….’
한데, 그 이후로 루시페우스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게, 그러기까지 해놓고….
‘역시 남자들은… 핫.’
아냐, 아냐.
전생의 트라우마 때문에 습관적으로 불신이 드는 건, 기실 내게도 너무 번거로웠다.
가족들이며 내 사람들이야 벌써 스무 해를 넘게 함께해 희미해졌지만, 그게, 조, 좋아…하는 사람이어서야.
빨개졌을 게 자명한 낯을 가리기 위해 나는 찻잔에 입을 묻었다.
‘그리고 그는 다를 테니까….’
내 못난 이야기를 다 듣고도 괜찮다고 말해준 그였다. 그만큼 다정한 그라면, 어째서인지 애초부터 내게는 늘 물렀던 그라면 쉽게 변하지는 않지 않을까…?
‘…그리고 변해도, 뭐 어때. 지금 조, 좋으면 그만이고….’
내가 어린 그에게 지은 과오에 비하면, 마음이 변하는 것쯤이야 별 잘못도 아닐 거였고….
그렇게 어려서부터 나를 기억한다면, 그래서 번번이 내게 다가왔던 거라면… 정말 얼마나 오래된 마음이야, 그건….
‘그런 마음이라면 좀 믿어봐도 되겠지…?’
계속 루시페우스 생각을 하자니 어딘가 쑥스러워서, 나는 괜스레 찻잔 가장자리만 만지작거렸다.
‘…뭐, 쓸모를 증명한다더니 바쁜 모양이지.’
그렇게 수런거리는 마음을 정리하고서, 나는 케인의 보고를 재촉했다.
“그래서, 로즈버리엔 왜 왔대?”
“그분이 로즈버리에 보낸 인부들을 뽑았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응, 그랬지.”
정확히 로즈버리의 일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개발 사업에 보낼 인부를 선발하는 일에 관여했다고 했었으니까.
“남작님이 다치셨으니 인부들을 구금 중이었는데, 고용주 자격으로 로즈버리에 배상하고 가셨어요. 무려 금화 천 개요.”
“천 개?”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금화 1000개면 평민 부호들이 사는 1구역에서 작은 집을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즈버리의 2년 치 예산에 맞먹었다.
“그 돈은 아마….”
“네. 알비누스에서 그런 사려 깊은 짓을 할 리가 없으니 사재에서 출연하신 거겠죠?”
“무엇보다 원로원 개회연 이후로 그분께서 저택에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정말 알비누스 후작과 척지신 게 맞는 것 같은데….”
데릭이 조심스레 보태는 말소리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다 신경 쓰실 일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정확히 뭘 하는 중인지는 몰라도, 제가 관여하던 알비누스의 일을 직접 수습하기 시작한 것만은 확실했다.
‘…본인이 와야 뭘 물어보든 말든 하지.’
그리 말하며 나는 탁자 위에 올려둔 손거울을 한번 노려보았다.
루시페우스가 나를 재워두고 나간 뒤, 나는 깊은 밤이 돼서야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열도 다 떨어지고 몸이 훨씬 가뿐해진 채로.
그간 내 곁을 지킨 레베카는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기색이었지만, 그저 나아서 다행이라며 나를 한번 꼬옥 안아주었을 뿐이었다.
마법이 흥미로운 재질이긴 하구나, 그런 정도의 말만 덧붙였을 뿐.
‘루시페우스가 마법 같은 걸 걸고서야 다 나은 거니까. 실제로는 마음이 편해져서 나았겠지만….’
그러고서 혹시 연락이 올까 싶어 서랍 안에 처박아 두었던 손거울을 꺼낸 것인데. 며칠이 지나도록 그도,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그렇게 가놓고, 기별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직 무슨 사이도 아니니 어쩔 수 없나….
아까 산뜻하게 정리했던 게 무색하게, 마음이 다시금 시무룩하게 가라앉으려 할 때였다.
“전하?”
“아, 응!”
핫, 자꾸만 생각이 그에 관한 쪽으로 흘러버리고 만다.
‘연애 감정이 아니라 내가 문제였던 거야.’
정신 차려야지. 나는 마치 회의 내용을 곱씹고 있던 양,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으음, 그러니까. 그가 후작 부자하고 갈라선 건 맞대.”
그리 말하고서 눈동자를 굴려 그들의 안색을 살피니… 케인과 데릭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눈치들은 또 쓸데없이 좋아서.’
어쨌든 루시페우스 얘기니까, 내가 한눈판 걸 다 알겠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탄광 쪽은 잘 정리된 거고?”
“네, 애초에 부상자가 많지 않았고요. 폭발도 규모가 작아서, 수정 광맥은 찾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예에. 남작님이 쓰러지셨으니 광맥을 발견해도 영지에서 나서려면 시간이 걸렸을 텐데 잘된 일이죠. 그동안 수정을 빼돌렸다면 손쓸 새도 없었을 테니까요.”
케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원작에 비하면야 남작의 부상도 경미했고 로즈버리의 부가 유출되는 일도 없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물론 원작에서는 수정 광산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없었지만….
‘선황 폐하께서 특별히 입단속하셨을 정도의 매장량이라….’
나는 팔걸이에 올려둔 손가락을 톡톡 치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거기 있던 인부들은 다 철수했어?”
“뭐… 그분께서 남은 계약 기간에 대한 일당을 미리 챙겨주고 가셔서, 마을에서 좀 머무르다 가려는 것 같아요.”
“영지에 그 사달을 낸 주제에?”
“그들이야 시키는 대로 한 거 아니겠습니까. 로즈버리 입장에서는 외지인이 하루라도 더 머무르면 좋죠.”
“역시 그렇게 되나….”
하긴, 궁핍한 로즈버리 사정에 외지인이 돈을 한 푼이라도 더 쓰고 간다면 좋을 거였다.
‘이 김에 로즈버리령도 부흥하면 좋겠지….’
로즈버리가 광산을 헐값에 내놓지 않도록 로즈버리에까지 수정 광맥에 관한 사실을 비밀에 부친 건데, 정보가 물밑에서 퍼진 바람에 이런 피해도 입는 거였다.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면 차라리 로즈버리와 협상하는 척이라도 했을 테니까.
“케인. 혹시 로즈버리에 글렌치아 상단이 다녀가?”
“아뇨. 로즈버리에 인접한 라부르령이 근방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어서, 거기까지는 오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수정 광산이 있다는 걸 공론화해서, 개발 업체 입찰을 받는 게 낫겠어. 글렌치아가 수정 광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니 한번 판을 깔아달라고 해보면 좋을 것 같아.”
“오오, 그러면 로즈버리에 도움이 좀 되겠군요? 요즘 수정 값도 한참 올라 있는데.”
제 고향의 사정이 나아질 거라 생각하니 신나는지, 케인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수정 값은…. 아니, 곧 떨어질 거야.”
“네?”
“귀족파에서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 예정이어서, 거기에 대비하여 수정을 사들이고 있던 걸로 추측하고 있었잖아?”
그렇죠, 케인과 데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사실이라고 확인받았어.”
주어 없이 한 말이었지만, 두 사람은 내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바로 알아챘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두 기사의 낯에 장난기가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본인이 실행하려던 일이 맞고, 알비누스와 갈라서면서 그만두기로 했대.”
“그런데 아직도 알비누스 상단에서 수정을 사들이고 있다면서요?”
“그러게. 저도 이상하다고, 연유를 좀 더 알아보겠다곤 했는데…. 우리도 3소대에서 알아보는 중이고. 알비누스 내부 분위기는 어때?”
“그동안 중지해 두었던 일들을 그분 없이 다른 방식으로 하려는 것 같은데… 후작 부자만 비밀스레 만날 때가 많아 정보를 구하기가 전보다 쉽지 않습니다.”
“역시 친아들은 다르다는 건가…. 이번에 가서 다시 살펴봐야겠군.”
데릭이 그간 대신 살핀 바를 보고하자, 케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성에 복귀했으니 제가 다시 맡을 일이었다.
“데릭. 그 신관이랑 궁정 화가는, 어떻게 됐어?”
“아아, 네.”
데릭이 느릿하게 답하며 케인의 낯을 살폈다. 케인이 없는 사이에 알비누스에 관해 내린 지령이었으니까.
“경이 로즈버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대장 회의한 날에 알비누스 소후작이 왔었잖아? 그날 그가 나를 협박했거든.”
“네에? 협박요?”
케인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세례식 때의 일에 대해 금언 서약이 걸려 있는데…. 그걸 알고 있다고 말이야.”
“세례식 때 일이라면…?”
“응, 황실 비밀.”
그리 말하며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더는 묻지 말란 의미였다.
황실 비밀인 이상 내 기사들이라도 알 이유는 없었다.
‘…내 체질에 대해서는 대충 눈치를 채기야 했겠지만.’
세례식에 하는 거라 봐야 신성력 측정밖에 더 있나. 나를 위해 소대장들이 응급 키트를 지니고 다니는 이상, 대충 짐작하고는 있을 거였다.
레베카의 초커를 이따금 쓰곤 했으니, 설마 신성력이 아예 없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세례식 참석자 중 알비누스랑 연이 닿는 자가 있는지, 데릭이 조사하던 차였어. 그런데 후작저에 드나들 정도로 가깝게 교류하던 신관이 하나 있다더라고.”
“응. 그런데 그분 인상을 대조해보니 세례식에 참석하신 분은 아니었고. 당시 궁정 화가는 은퇴했지만 아직 황성에서 지내서 만나본 참인데….”
데릭이 내 말을 받아 케인에게 설명을 이었다.
거기까지는 먼젓번에 보고한 내용.
데릭은 곧바로 새로운 보고 사항을 읊었다.
“그런데, 금언 서약이 꽤나 강력하게 걸려 있어서 전하의 세례식 장면을 그렸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발설할 수 없겠던데요?”
“그래?”
“세례식에 참석했는지 여부조차 말하기 어려워하더라고요. 고개조차 못 끄덕여요.”
“그럼 그 신관은?”
“다행히 인상착의가 엄청 독특해서 신상을 찾기야 했습니다.”
“독특해?”
“안경을 쓰신다더라고요.”
흐응, 그래?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눈이 엄청 나쁜가?’
신성력으로 시력 강화도 할 수 있는 걸 생각하면 사제가 안경을 쓰는 게 이상하긴 했다.
“선대 교황 성하의 시종이셔서, 성하께서 선종하신 이후로 수도원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건강이 좀 안 좋으시다고….”
“건강이?”
“마음의 문을 닫으셨다던데요.”
“하필이면….”
데릭의 완곡한 표현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만나보기 전에 관련 정보부터 수집해야겠네.”
“네. 알렉스가 조만간 출장 신청할 거예요.”
어휴, 내 수하가 또 바빠지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이야 루시페우스가 그만두기로 했다지만, 스칼렛 쪽 일도 그렇고 여전히 할 일이 많은데.
‘도미닉 그 자식을 진짜…. 우리 가족이 오직 내 안전 때문에 그 귀찮은 금언 서약까지 건 건데.’
만일 알비누스가 이 일을 아버지나 그레이스 앞에서 거론한다면, 우리 가족은 기꺼이 내 비밀을 공론화하고 알비누스를 처단할 거였다.
내가 안전히 성인이 됐으니, 굳이 더 이상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당사자인 나로서야 고마운 나의 가족에게 그런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내 선에서 처리하면 될 일이야.’
정보가 어떻게 샜는지 확인해서, 조만간 귀족파를 소탕할 때 한 번에 처리하면 된다.
‘게이블스 후작이 알비누스의 음모에 협조한 걸 폭로하면 스칼렛에게 명분이 실릴 테니까.’
그리 내가 결의를 다질 때, 케인이 불쑥 물었다.
“소후작이 데려온 서대륙 마검사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몇은 구금돼 있다던데요.”
“3구역에 건물 하나를 숙소로 쓰고 있다나 봐. 그가… 계속 감시하고 있어.”
“그냥 이름 부르세요.”
“뭘, 저희 사이에 또.”
“…….”
좀 진지해지나 했더니…. 나는 그들에게 눈을 흘기고는 말을 이었다.
“수선화궁에 구금된 이들은 막심 경이 취조하는 중이고.”
“그들이 소후작에게서 받기로 한 대가가 뭔지 알아본다고 하셨죠?”
“징글맞게도 입을 안 여네요.”
“동감이야.”
처음 루시페우스가 렌틸 자작의 타운하우스에 침입한 자들을 체포해준 게 거의 한 달이 다 되었다. 학자의 탑에 출장 갔던 막심을 기다린 걸 빼도, 보름이 넘도록 그들과 씨름 중인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루시페우스가 후작저 내에서 알게 된 건 없었으려나….’
다음에 만나면 물어보려는 차인데, 다음이 언제일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그때 일이 다 꿈이었던 거 아냐?’
그리 방어적인 생각을 불쑥 펼치며, 내가 다시금 애꿎은 손거울을 노려볼 때였다.
…어라?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손거울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