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7)
“우선… 제 양부와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그리고 알비누스에 왜 그걸 흘리셨는지 알고자 합니다.”
“그걸 굳이 알려는 이유는…?”
“혹시 무슨 협박을 당하여 누설하신 거라면, 협박당할 일을 없게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만 놓고 본다면 알비누스들로부터 해코지당하지 않게끔 도와준다는 거였지만, 말소리가 너무도 음산했다.
레베카는 남자의 기운이 미약하게 불안정해진 것을 느낀 차였다. 그 목소리 너머에 서린 건 분노였다.
흐음…. 레베카가 팔짱을 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선, 킬리온 님은 선대 교황 성하의 시종직을 맡으셨던 하급 신관이셨네.”
“하급 신관이라면.”
“평민 출신이셔서 말이지. 그대도 느꼈다시피 신성력으로 따지면 상급 신관은 되셔도 무방했겠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특이한 점은 없으신 겁니까. 다른 보직을 맡으셨다거나….”
“딱히. 성년식을 치르고서 귀의하셨고, 신관이 되신 후론 내내 시종직에 몸담으셨다…. 그 정도.”
그렇군요, 레베카의 말에 루시페우스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의 신성력이 신관치고도 강대한 편이라, 혹여 대대로 황실에서 교황이 나오는 데 반감을 가져 벌인 일인가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레베카만 없었다면 교황 자리를 노릴 법한 신성력을 지녔지만, 상급 신관조차 못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 도대체 무슨 연유로….
“선대 교황 성하의 시종이셨다면, 혹시 대신전에 안 남아 계신 건….”
“맞네. 다른 신관을 모실 수는 없으니 수도원에 들어가셨지.”
수도원은 노르타 산맥의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황성에서 말을 달리면 사흘쯤 떨어져 있는 거리니, 순간 이동 마법을 네댓 번쯤 쓰면 다녀올 수 있을 거였다.
그런 것을 계산하느라 루시페우스가 얼마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레베카가 문득 읊조렸다.
“그런데, 그 정도의 신성력을 지닌 분이 듣고 계셨다면 성하께서도 느끼셨을 텐데…. 그리 놔두셨을 리가.”
“그러게 말입니다.”
선대 교황 역시 은사를 진 자. 황실의 비밀인데 그리 허투루 했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신 막내 할아버지의 단호한 성정을 돌이키며, 레베카는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 직접 그분을 뵙고 확인하겠다는 거지.”
“예. 저도 어린 시절에 단 한 번 뵈었을 뿐인지라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그분이 다른 이에게서 들은 것이라 하시면 그 연결 고리도 추적해야지요.”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는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어쨌든 황실의 비밀 아닙니까.”
결의에 찬 남자의 목소리가 더없이 스산했다.
말로는 황실의 비밀 운운하였지만, 황실의 명운이 걸린 온갖 비밀을 갖다 대어도 남자가 눈 하나 깜짝 않을 걸 레베카는 알았다.
루시페우스에겐 다행히도 레베카는 그것조차 세실리아에 대한 경애로 해석하고 넘어가 주었지만.
‘알기 쉽다고 해야 할지….’
한편으로는 믿음직하다고 해야 할지.
“세실, 그 아이는 또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혼자서 앓고 있겠구먼.”
“굳이 전하의 손을 더럽힐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이리 여쭙게 되었습니다.”
남자의 정중한 대꾸에 레베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세실이 이번 생을 그대에게 선물했다 했지.”
“아….”
그때 그런 말도 꺼내고 말았지.
루시페우스는 속으로 작게 자책하며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의 군청색 눈동자는 작은 달에서 보았던 밤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제 작은 빛의 누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루시페우스는 그녀에게 어떤 거짓도 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번 생이란 말을 하고 말았던 거겠지….
그는 순순히 레베카의 궁금증에 답했다.
“제가 처음으로 살았던 생에서는 전하… 아니, 신관님께 여동생이 없으셨습니다.”
“아하.”
레베카의 눈썹이 크게 들썩였다.
어쩐지…. 레베카는 어째선지 갓난아기 때부터 너무도 특별했던 제 막냇동생을 떠올렸다.
그것이 나중에 사제가 되어 수련하면서는 세실리아에게 신성력이 없어서 그리 보였던 건가 했지만… 그것과는 결이 다른 낯섦이 있었던 것인데.
그 아이의 영혼에 묻은 기색부터가 확연히 달랐으니까.
“다만, 전하께는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루시페우스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 말이 절박하게 울려, 레베카는 다시금 그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신상처럼 단단한 남자의 낯은, 제 막냇동생과 연관될 때만은 번번이 이렇게 생기를 머금곤 했다.
‘달의 신께서 이자에게 두 번째 생을 선물하시면서 세실리아가 편입되었다라….’
변덕스러우신 달의 신께서 이 청년을 두고서 유희하신 덕에, 제게 더없이 소중한 막냇동생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세실리아를 대하는 남자의 행동을 보자면.
‘…자책하고 있군.’
그러니까, 남자의 말은 일종의 간청이었다.
그는 자신이 두 번째 삶을 받으며 세실리아를 불러온 것을 일종의 원죄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걸 들키기 싫은 모양이었다.
‘저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지만…. 오히려 낭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세실에게 너무 부담된다 생각하는 건가? 세실처럼 무조건적인 호의를 못 믿는 애한테는 신의 안배라며 안심시키는 편이 나을 텐데….’
그 애는 어려서부터 가족마저 쉽게 믿어주는 법이 없었으니까.
정말로 이 남자를 부마로 들인대도 제가 말을 얹을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신성력 많은 이와 함께하니 다행이라며 편들어줄 수도 있었다.
새파란 사내가 보이는 솔직함이 이따금 당황스럽기야 했지만….
‘상당히 진심인 것 같고, 저 자책감은 책임감으로 봐도 무방하고.’
남자의 낯을 뜯어보던 레베카는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뭐, 그대의 일은 그대가 알아서 할 일이지. 달의 신께서 안배하신 일이라면야 더더욱. 나야 두 신의 종 아닌가.”
그 무심한 말소리에, 남자의 경직되었던 낯에 안도감이 스쳤다.
“…감사합니다.”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지, 루시페우스는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의 신이 저를 위해 세실리아를 보냈다는 사실은… 세실리아에게만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제 작은 빛께서, 존재하심 자체로 제 삶의 구원이 되어주신 그분께서 실은 저 때문에 이 세계에 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절대로 못 해.’
어려서부터 세실리아를 만났다는 거야 이제는 저들의 인연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저 하나를 위해 달의 신이 그녀를 존재하게 했다는 건, 너무도 자아도취적인 말이 아닌가.
그 다정하신 분이라면야 그런 일도 있었구나, 수긍하실 법한 일이었다. 당신의 자책감을 조금 더셨다고 말해주실 수도 있었다.
‘애초에 왜 자책하시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지만, 생의 문제였다.
그에게 생은 버리고픈 것이었다. 그 굴레를 제가 행복을 바라서, 저 때문에 지워드린 것이 죄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눈에 그녀의 삶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만 가득 차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생이란 것은 그에게 고통이었으니까.
두 번의 생이 내내 그에게 그러했듯이.
제게 죄책감을 가지시는 것 또한, 이번 생을 갖지 않으셨다면 아실 일 없을 괴로움이었다.
저로 인해 얻으신 이 삶은 그저 안온하고 따사로워야만 하는데….
그러니 절대로, 그것만은 털어놓을 수 없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그간 편찮으셨다면서요?”
“뭘, 며칠 푹 쉰 거지. 경이야말로 멀리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어.”
“저야말로 뭐, 고향인데요.”
여름내 높은 건물도 없는 로즈버리 산촌에서 지내서일까, 케인은 한껏 건강하게 그은 채 나타났다.
케인을 보는 건 거의 한 달 만이었다. 황성에 복귀하자마자 내게 인사하러 온 충성스러운 수하에게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이제 실연의 상처는 다 나았어?”
“아, 그, 그게, 참….”
멋쩍어하던 케인은 눈동자를 슬며시 굴리더니, 맞은편의 데릭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전하께서야말로 그분하고 어찌 되신 거예요? 그동안 난리도 아니었다고 암조 사이에서 짜하던데.”
케인이 언급하는 ‘그분’의 정체가 빤했다. 나는 아닌 척 꾸밀 새도 없이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아니 얘들은, 황성 오자마자 보고하러 온다면서 꼭 저들끼리 쑥덕대다 오더라?
“오, 오자마자 별소리를 다 해?”
“그분이 렌틸 자작님 타운하우스랑 힐베르크 후작저에 경비 결계도 쳐주시고, 마검사들도 잡아다 주셨다던데요.”
“그거야 뭐, 세르니타에서 우리가 구해준 셈이니.”
“데릭 말로는 가문 내에서 다툼이 있으셨던지, 안 들어오신 지 오래라 하고….”
“예에, 그러니까요. 얼마 전에는 집무실에서 알비누스 삼부자가 언성을 높였다더라고요.”
케인이 말꼬리를 늘이며 시선을 던지자 데릭이 덥석 말을 물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의 나열에 나는 황당하다는 낯을 지었다.
“그런 보고를, 내가 지금 막 황성에 돌아온 케인 입으로 들어야 해?”
“저희 소대장께서 원래 알비누스 담당이시니까요. 직접 보고하라고 양보했습니다요.”
데릭이 계속 까불거렸다. 말은 그리하지만 루시페우스가 알비누스들과 틀어진 것이 한참 전의 일이니, 내가 알리라 생각하고 보고를 생략한 게 빤했다.
그때 루시페우스가 내게 찾아온 걸 데릭이 다 봤으니까.
이 불경한 것들이, 나 놀릴 건수 생겼다고 빠져서는…. 나는 절로 이마를 짚었다.
“공사 구분 좀 하자. 사생활도 지키고, 응?”
“전하께서는 저희 사생활 다 참견하시면서요.”
“맞아요, 말로테 아가씨 일로 매번 케인 구박하셨으면서.”
“경들은 내 사람들이고, 나는 경들 사람 아냐.”
“으엑, 그럼 전하께서는 누구의….”
그리 말하며 데릭이 눈동자를 굴려 케인과 시선을 교환하였다. 그 눈초리가 잔뜩 휘는 게, 그러니까, 그들이 떠올리고 있는 사람은 분명….
“아니, 경들. 충성 맹세했잖아?”
“저희가 충성 맹세한 건 전하 개인이 아니라 황실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셨잖아요?”
“…….”
하아…. 그동안 루시페우스와 나를 엮으면서 답답해하더니, 아주 신난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루시페우스가 내 방에 오자마자 결계를 쳐서, 그림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게 없다는 거였다.
그날의 일이라면….
‘내가 결국 다 털어놓고 말았고, 또….’
그래서 울고불고하다가, 그가 괜찮다고 했다가, 그러다가….
‘윽.’
그때의 일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말아, 나는 이마를 짚은 손을 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맞닿았던 품이, 손끝이, 이, 입술이 홧홧한 것까지… 피할 수 없었지만.
“됐고, 얼른 보고나 해.”
체념한 듯한 내 말에 두 기사가 서로의 낯에 대고 히쭉 웃는 게 다 느껴졌다. 이 불경한 것들….
“우선 로즈버리 일은 대강 정리되었습니다.”
“그래. 로즈버… 아, 이젠 아니지. 힐베르크 소후작이랑 만났고?”
“소후작, 크으….”
아멜리를 지칭하는 호칭이 바뀐 것에 케인이 짧게 감격했다. 그 심사를 모르지 않아 나도 생긋 웃었다.
“네, 로즈버리 남작님 나으실 때까지 영지 일 좀 도우시다가 올라오신다더라고요.”
“그 인부들은 어떻게 했어?”
“아, 그게 말이죠.”
거기까지 말한 케인이 웃음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뭐지, 불안한데….
“그분…이 다녀가셨습니다.”
“그분?”
“그, 전하의… 어흠. 알비누스의 둘째 아드님 말입니다.”
나를 놀리려는 기색에 세모눈을 뜬 것도 잠시. 케인이 내뱉은 이야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루시페우스가 다녀갔다고?”
“오, 이름….”
“친해지셨네요.”
…건수만 잡았다 하면. 나는 매섭게 눈빛을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