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46화 (146/220)

146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6)

마법을 쓰는 걸 비밀로 하기 위함인지, 남자는 호신용인 양 지팡이를 하나 지닌 채였다.

격식을 갖춘 정장 차림에 머리를 묶은 모양도 훨씬 꼼꼼하여 꽤나 결벽적인 느낌을 주었다. 레베카가 그를 본 건 번번이 흐트러진 모습뿐이었기에 그 인상이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온실에서야 그렇다 쳐도, 며칠 전엔 낯도 해쓱하고 차림도 좀 느슨하더라니. 세실이 나아서 그런지, 기운도 퍽 안정돼 보이고….’

황궁 연회에 안 다닌 지 한참인 레베카인지라, 그의 대외적인 차림새를 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교단의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인사했다.

“주신의 여명에 축복을 간구합니다. 알비누스의 루시페우스라 합니다.”

“앉게.”

레베카는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턱짓하여 그를 앉혔다.

“마티야.”

다구를 들고 뒤따라 들어온 사제가 허리를 숙였다.

“손님은 내가 직접 모실 터이니, 부를 때까지 나가 있어라.”

“네, 신관님.”

사제는 다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서, 다시금 허리를 깊이 숙인 뒤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레베카는 들여다보던 서류에 눈을 붙박은 채 말했다.

“덕분에 세실이 다 나아서 내 고맙기도 하던 차인데. 아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수선화궁에 출근도 했다 하고.”

“제 기쁨입니다.”

“…….”

기쁨, 맞겠지…. 그리 말하는 청년은 입을 열었던 사람 같지도 않게 단단한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조금 더 하려던 레베카는 그대로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세실이 회복한 것만으로도 기쁘다는데, 내 말이 무슨 소용이겠어?

그러는 내내 루시페우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만 내리깐 채였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이 한참을 이어진 뒤.

보던 업무를 다 마친 레베카가 응접탁자의 상석에 와서 앉았을 때였다.

“…이런.”

“사안이 사안인지라, 먼저 여쭐 수 없었습니다.”

남자의 태연한 말소리에 레베카가 웃음을 삼켰다.

조용히 있는다 싶더라니, 그새 응접 공간을 둘러싼 결계를 쳐 놓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느껴지는 마력의 알싸한 느낌에 레베카는 목뒤가 쭈뼛하였다.

‘저번에 세실의 방에 들이닥친 것도 그랬지만, 꽤나 막무가내구먼.’

번번이, 세실의 일이라 그런 거겠지만….

“뭐, 잘했네. 내가 결계를 쳤다면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왔을 것인데.”

“다행입니다.”

대신전에는 신성력의 발현을 감지하는 결계가 있었다. 그러니 레베카가 두 사람의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결계를 쳤다면 경보가 울릴 거였다.

마법에 대해서는 방비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마탑과 신전 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이 마탑을 벗어나는 일이 없어서 별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대신전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걸 어찌 알았나?”

“신전의 결계에 관한 정보는 유출된 적 없습니다. 제가 해독했을 뿐입니다.”

“아하. 눈이 꽤 밝군.”

“감사드립니다.”

…딱히 칭찬은 아니었는데. 내내 태연자약한 청년의 태도에, 레베카는 왜 자꾸만 샐쭉거리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가 업어 키운 막내를, 제 눈엔 아직 핏덩이 같은 애를 좋아한답시고 제게 살갑게 구는 게 빤하니 그런가….

‘세실이 남다른 아이기야 합니다마는, 그 애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녀석도 이럴 일입니까….’

모든 이변을 관장하시는 달의 신께 속으로 투정하며, 레베카는 손님을 위해 차를 내었다.

루시페우스가 은은한 향의 허브차를 한 모금 맛봤을 무렵.

“그래. 세실의 건강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

“네. 그러니까….”

레베카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루시페우스는, 입을 열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저, 잠시.”

장갑을 낀 그의 손이 허공을 몇 번 더 스쳤다.

오싹한 기운이 서너 번 더해지는 게, 결계를 몇 겹 더한 모양이었다.

‘과하구먼….’

신전에서 이야기가 샌 듯하다니 이해는 가지만…. 레베카는 침음했다.

이 정도의 마력 반응이면 웬만한 신관급만 돼도 다 눈치챌 터인데, 뭐라 둘러댄다….

“서대륙의 마검사들이 황성에 들어와 있습니다.”

레베카의 고뇌를 알아차린 듯 루시페우스가 말했다.

“그들이 신전에 잠입할 일이야 없겠지만…. 근래 황성에 혼란한 일이 많으니 엮으려면 얼마든지 엮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엮는다면.”

“4황녀 전하께서 그들 중 몇을 구금 중이십니다. 그중에는 실제로 생장크트산에 무장한 채 진입한 일로 체포된 자들도 있습니다.”

필요하면 그들에게 덮어씌우라는 소리였다.

익숙한 듯 세실리아의 일에 대해 읊는 그의 말소리에 레베카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세실이 하는 일도 제대로 알고 있는 모양이고….’

세실리아가 군부에서 일하는 거야 널리 알려져 있다지만, 그 애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다들 모르는데 말이다.

‘생각보다도 더 관계가 깊은 모양이지….’

자꾸만 그와 세실리아의 사이를 가늠하게 되는 호기심을 누르면서, 레베카는 그의 용건을 재촉했다.

“그래. 안심할 만하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안심이라.

제 작은 빛에 관한 일에 대해서라면, 특히 그녀의 안전이 연관돼 있다면 루시페우스는 늘 추호도 안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란 것도 알았다.

그의 결계를 한 겹이라도 파훼할 자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그는 준비해둔 말을 주저 없이 꺼냈다.

“제 양부와 그 아들이 4황녀 전하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알비누스 말인가.”

레베카의 눈동자가 차분히 다음 말을 주문했다. 교단에 귀의하면서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 탓에 금빛 반점이 사라져, 그 군청색 눈동자는 더없이 진중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제 의형이 황실에 적을 두기를 청했다더군요.”

“그러니까 그건.”

“예, 은사를 지신 분을 협박한 셈입니다.”

“황실에 적을 둔다라….”

레베카는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기 위해 농담을 덧붙였다.

“그대의 의형이 세실의 옆자리를 차지할까 질투가 나서 내게 고하는 겐가?”

“뭐, 어차피….”

한데 루시페우스의 낯은 대번에 씁쓸해졌다.

“그가 아니어도 제가 탐낼 자리가 아닌 건 압니다.”

작은 별의 옆자리라.

루시페우스로서야 그런 건 단 한 번도 바라지 못한 거였다.

아니, 기실 너무도 오랜 꿈이어서 바람이라고 하기에도 새삼스러웠다.

세실리아의 뒤에서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건… 그녀가 허락하는 곳에서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

허락된다면 감히 작은 빛에게 다가가 손을 잡는 것.

그 다정한 온기를 떠나보내지 않는 것.

어려서부터 막연히 바라왔지만, 후작에게 복수하고 죽을 것만 생각하여 무의식 너머에 묻어두었던 소망.

달의 신과의 일을 기억해낸 이후로 이는 루시페우스에게 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세실리아의 ‘옆자리’에서일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옆자리라는 것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세실리아의 시간을 독점하고, 평생을 지키고, 손끝 하나라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런 것을 바라기야 했다.

법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그것이 더욱 수월하다는 것 또한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귀족파의 업보를 모두 정리한다면…. 알비누스가 꾸민 일은 역모죄 감이니 멸문을 피할 수 없을 테지.’

정황이 참작되어 업화를 피한다 해도, 남은 혈육 하나 없는 그가 귀족 신분을 유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신분이 남아 있더라도, 이 저주받은 태생으로서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제가 유일하게 소망하는 이가 황실의 지고하신 딸인 이상 그에게는 존재한 적조차 없는 선택지였다.

‘게다가 황궁을 떠나지 않겠다고 노래하시는 거야 유명한 이야기고….’

그것을 단순한 투정으로 오인하여 사교계의 모든 청년이 부마의 꿈을 버리지 않은 거지만, 세실리아의 뜻을 삶의 지침으로 삼기로 한 그에게 이는 제 세계의 부인할 수 없는 명제였다.

‘그럼에도 하등 미안해하실 것 없는 이유로 마음이 약해지셔서는….’

그래서 저를 받아주시고 만 걸 테지.

뭐가 되었든, 제 작은 빛께서 명하시는 대로 살면 된다.

세실리아가 혹여라도 마음을 바꾼다면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터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 또한 가늠해보지 않았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여하간 그 혼자서는 탐낸 적 없는 일이었다.

한편, 루시페우스의 말에 레베카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세실의 옆자리를 탐내지 않는 게 더 문제 아닌가…?’

그를 처음으로 본 밤의 온실에서, 그의 고통을 제 상처보다 더 괴로워하던 제 막냇동생을 떠올리자면 말이었다.

‘…역시 파벌 때문인가?’

알비누스는 황태자 그레이스의 골칫덩이 중 하나였다. 게다가 지금 루시페우스가 흉수로 지목하는 것이 제 양부와 의형이니 그가 몸을 사릴 법도 했다.

‘황실의 비밀을 갖고서 은사를 진 자를 협박한 건, 역모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수니까.’

세실리아의 체질을 비밀로 한 게 황실의 위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애의 안전을 위해서였으니, 세실리아가 무사히 성인이 된 지금은 공개적으로 처벌하고 멸문해도 모자람이 없을 거였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안전은, 이자라면야 괜찮을 것 같은데….

‘세실 덕에 의식이 좀 바뀌었다지만, 혼외자 출신의 부마가 든 적이 없기도 하니 그것도 걸림돌이겠고….’

레베카는 그런 모든 계산을 속으로 삭이며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뭐. 그대가 세실을 얼마나 연모하는지, 그런 걸 듣고자 만난 건 아니니까.”

“네. 그건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

정말, 번번이…. 눈앞의 청년은 세실리아에 대한 마음을 노출할 기회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구는 것이었다.

‘이렇게 마음이 깊으면서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요즘 애들이 다 이런 건지, 이자가 유독 의뭉스러운 건지. 레베카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그대의 양부와 의형이 알게 된 것이, 신전에서 샜다고 생각한다는 게지.”

“예. 정확히는, 저택에 오래전부터 드나들던 신관이 한 분 계십니다.”

“정확한 용의자까지 있군그래. 한데, 세례식의 참석자는 모두 당대 교황 성하와 금언 서약을 했는데.”

그녀들의 막내 할아버지였던 선대 교황은 8년 전에 신들의 품으로 떠났다. 하지만 교황이 선종했대서 그 서약까지 깨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신과 달의 신의 앞에서 맹세한 바니까.

루시페우스가 후작의 피를 받으면 알비누스의 이름을 버리겠다고 두 번의 생에 거듭 맹세했듯이.

“당시의 참석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 알지?”

“제가 제 양부에게 정신계 마법을 걸어 확인하였습니다.”

“…마법의 가능성은 참 무궁무진하군.”

루시페우스의 발언은 자칫 무도하게 들릴 수 있었지만, 레베카는 그가 세실리아에게 깊이 빠져서 한 일임을 알아 괘념치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자백한 내용이.”

“킬리온이라는 그 신관께서 당시 맹세하는 과정을 엿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킬리온… 님께서?”

레베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의 당황한 낯을, 루시페우스는 공손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분을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혹시 그분에게도 정신계 마법을 걸려는 건가…?”

“그분께 신성력이 많으신 것을 제가 압니다. 제 잔재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신관 킬리온을 단 한 번 봤을 뿐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외부인에게 소개된 것 자체가, 후작이 그의 체질에 대해 킬리온에게 상의한 때가 최초였으니까.

어린 루시페우스는 신관을 마주한 순간, 이따금 저택에 몰려오던 범상치 않은 기운이 그의 것이었음을 알았다.

그것이 신관급의 신성력임을 안 건 더 나중의 일이었지만.

‘그 정도의 신성력을 지닌 자에겐 정신계 마법이 쉽게 들지 않겠지.’

물론 제 압도적인 마력을 퍼부으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으나, 신관의 정신을 파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는 곧, 상대가 신관만 아니었다면 그러고도 남았을 거란 소리였다.

“그럼, 왜 만나보려는 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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