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5)
“응.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나온 마수들에게 휘말려서….”
책에서 그는 레오폴트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다가 잘못 휩쓸리는 바람에 마수들에게 죽고 말았다.
아무리 강한 그라도, 결국 방심하면 그렇게 되는 거니까….
“그 일은 정말 그만둔 게 맞는 거지?”
“안 그래도 말씀하신 대로 알비누스에서 수정을 사들이고 있는 걸 확인한 참입니다.”
“경이 알비누스에서 나오려고 한다던데. 소후작이….”
도미닉을 언급한 순간 루시페우스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 보여준 것 중에 가장 냉랭한 무표정이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아무튼, 조만간 확실히 없던 일로 만들겠습니다.”
“그거야 뭐. 경에게 위험한 일이니까….”
어쨌든 거기서 죽고 만 건 내 친구나 내 가족이 아니라 그였으니까. 물론 황실을 위해서도 그게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건 맞지만….
또 내가 인상을 찌푸린 걸까. 그가 내 미간을 문지르며 다시 엷은 미소를 띠었다.
“설령 제가 격랑에 휘말린다 해도, 죽지 않습니다.”
“그래도. 경이 아무리 강하대도 그건 또 모를 일이니까….”
그 상상에 내 낯이 착잡하게 물들 때였다.
“…우선, 저는 실수로 죽지 않았고요.”
“아냐?”
“저는 거기서….”
거기까지 말한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어슷한 곳을 노려보다가… 미간을 슬쩍 찌푸리더니 말을 삼켰다.
“지금은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아무튼, 제가 거기서 죽은 건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
“네. 전하께서 읽으신 그 이야기 속의 녀석이 아무래도 저보다 좀 덜떨어진 모양입니다.”
또, 어딘가 농담인 듯 울리는 말소리.
제 죽음을 언급하며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마다, 그는 아까부터 저답잖은 말투가 되는 것이었다.
그게 번번이 귀엽…게 느껴지고 말았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올해 열릴 일은 없을 거고, 혹여 열린대도… 저는 절대 죽지 않으니까요.”
경이 그렇다면야…. 나야 보탤 말이 없어, 그저 그리 웅얼거리며 고개를 주억이고 말았다.
“전 원래 제 수명을 올해까지로 정해 두었지만, 이젠… 전하께서 죽어도 된다고 허하실 때까지가 제 수명인 걸로 정하기도 했고요.”
“…뭐?”
“전하께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럼 좀 더 살아볼까요.”
“좀 더 살지 말고, 수명 다할 때까지 살아.”
아,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렌강 상공에서 불꽃놀이를 보던, 그저 설렘만을 추억으로 남기려던 그때의 일이 떠올라…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고 말았다.
번번이도 참 내 심장에 해로웠다.
“그러니 곁에 두시고, 원하실 때까지 살라고 명하실 수 있도록….”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조심스레 자리에 눕혔다. 곧 해가 뜨려는지, 두꺼운 암막 커튼의 틈으로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들어 오고 있었다.
이불을 턱 아래까지 덮어주고, 마법을 거는지 내 이마를 짚으며… 그는 다짐처럼 읊조렸다.
“곧 다 신경 쓰실 일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그의 마법 때문인지 시야가 잠시 부옇게 달아오르는가 싶었을 때. 그의 입맞춤이 내 이마에 내려앉았다.
스치듯 짤막한 접촉이었지만 심장까지 델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가 불러온 수마(睡魔)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버티자니, 멀어지는 그의 낯에는 벅찬 감동 같은 게 서려 있었다.
“…그래야 제 쓸모가 마음에 드셔서 곁에 둘 만하다 생각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쓸모라니.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여전히 그 쓸모를 읊는 그의 사정이 낯설지 않아, 나는 또 마음이 욱신거리다가… 그대로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지난번 원로원 개회연에 다녀온 이후로, 윌로우 게이블스는 그 생각을 머리에서 떨칠 수 없었다.
넉 달 만에 간 사교계는 겉으로야 여전한 듯 보였지만… 눈치 볼 일이 없는 그가 보기에도 바뀐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제게 공손히 굴던 치들이 퍽 줄어들었다.
‘내가 그새 좀 말랐다고 우습게 보나?’
그게 단순히 외양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다양하지 못한 그는 그날로 식사량을 늘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지가 달라진 사람이 그의 눈에 여럿 들어왔다.
맨 처음 놀랐던 건, 아카데미 시절 제가 예사로 괴롭혔던 블라우베르의 사생아가 4황녀의 보좌관이 된 거였다.
‘그 반쪽 놈은 어쩌다가 4황녀의 눈에 들어서….’
제가 욕하면 대꾸도 못 하고 움츠러들던 등신이 교양 넘치는 낯을 하고 있던 꼴이라니….
‘스칼렛 그것도 뭐라도 된 것처럼 나댔고.’
그중 유독 두드러진 건, 힐베르크라는 어디 다 망해가는 후작가의 친딸로 판명 났다는 그 영애였다.
‘갖고 놀다 버리기 딱인 촌뜨기였는데.’
마지막으로 봤을 때, 재미 좀 보려고 했더니 아우렌바흐 애송이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짜증 났었는데. 술김에 4황녀에게 화풀이하려다가… 알비누스의 그 귀신 같은 놈한테 당해버렸고.
‘그 귀신 새끼도 묘하지.’
그때 저를 공격해놓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번에 낫게 해줬다. 어쨌든 꼴사납게 절뚝거리는 꼴을 안 보이게 해줬으니 고맙기도 했고.
윌로우는 루시페우스가 주기적으로 걸어주는 마법 덕에 힘든 줄도 모르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똑똑.
“들어오너라.”
윌로우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육중한 문을 열어젖혔다. 언젠가 제 것이 될, 게이블스 가주의 집무실이었다.
“오오, 그래. 왔느냐, 내 아들.”
원체 아들인 그를 애지중지하는 후작이었지만, 그가 몇 달을 앓아누웠던 이후로 그것이 더 심해졌다.
제가 들어오자마자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인자하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에 윌로우는 흡족해졌다.
‘그래. 아버지는 어차피 나를 사랑하시는데. 스칼렛 그것이 뭘 어쩌건….’
그는 속으로 제 누이를 비웃으며 책상 앞에 가서 섰다.
“안 그래도, 개회연 때 네 늠름한 모습을 보고 연락 온 가문들이 많아 너를 부르려던 참이었다.”
“연락 온 가문들요?”
“네 나이가 벌써 스물일곱이니 슬슬 정착해도 되지 않겠느냐. 게이블스의 안주인 자리도 너무 오래 비웠고.”
윌로우가 그간 연애를 했다기엔 한미한 가문의 영애들을 욕보이고 다닌 수준인지라, 정착은커녕 떠돈 역사도 없었지만….
게이블스 후작은 보좌관이 정리한 서류들을 윌로우 쪽으로 펼쳐 보였다. 게이블스가 혼담을 넣을 만한 가문의 영애들을 추려 그 초상과 함께 정리한 거였다.
윌로우는 이 상황이 자못 불만족스러웠다.
‘그때 협상만 잘해 주셨어도, 부마 자리가 내 거였는데.’
황제가 4황녀와 게이블스 간의 혼담이 이뤄질 일 없다 못 박은 것에 대해, 윌로우는 제 아비가 자존심을 세우다가 일을 그르친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건 무엇보다도 본인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이젠 도미닉 알비누스 같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깝치고 말이야….’
4황녀는 차기 게이블스 후작 부인이니 감히 눈도 두지 말라고 할 때, 비위 맞추며 설설 기던 머저리가….
아버지 앞이어서 그런 말을 꺼낼 순 없었지만, 그 볼이 불만스레 실룩거리는 것만은 감출 수 없었다.
“왜, 아직도 뜻이 없는 게냐?”
“게이블스는 귀족파의 중심이니 웬만한 가문으로는 안 될 텐데요.”
“아니란다. 오히려 뒷배 없는 가문이 뒤탈도 없고 좋지. 그저 여인이란 조용히 저택 안살림 하면서 내조하는 것이 미덕 아니겠느냐. 우리가 게이블스인데, 사교계의 일이야 눈속임에 불과하고. 네 어미 생전에 어찌나 시끄러웠는지, 기억하지?”
스칼렛이 사교계의 일인자임을 누구보다 잘 써먹고 있으면서, 게다가 스칼렛의 혼처를 빌미로 귀족파 가문들을 휘두르고 있으면서, 후작은 손쉽게 사교계의 영예란 게이블스에게 무의미하다 못 박았다.
기실 후작도 제 아들이 신랑감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게이블스의 부와 영광은 굳이 정략혼에 기댈 필요 없는 것이니, 그저 제 아들이 후사만 멀쩡히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 아버지.”
“그래.”
“제가 원로원 의회에 배석해서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면, 좀 더 많은 가문에서 딸을 내어주려 하지 않겠습니까.”
“오오, 원로원 의회 말이냐.”
“제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생각해 봤는데, 저도 슬슬 아버지의 짐을 나눠 질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여….”
후작의 낯이 밝아졌다.
제 아들이 가주로서의 정무에 관심 없는 거야 진즉부터 알고 있던 차였다. 그저 결혼하면 책임감이 생기겠거니 기다릴 뿐이었다.
한데 알아서 이리 철들어 주다니.
누이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몇 주간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그래, 잘 생각했다. 당장 마일스를 불러서 다음 의회부터 준비해 보자꾸나.”
“예에, 그리고….”
윌로우가 모아 쥔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후작님께서 알비누스의 목줄을 잡고 있으실 겁니다.”
결박 마법을 풀어준 이후에도 루시페우스는 이따금 그를 찾아왔다. 그것이 비공식 방문임을 강조하듯, 번번이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제 의형이 4황녀 전하의 부마가 되고 싶은 나머지 게이블스도 다 무시할 요량이던데…. 차기 게이블스의 가주께서 단속해 두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비누스의 그 귀신은 제 가문과 틀어졌는지, 도미닉의 계획에 대해 귀띔해 주기까지 하는 거였다.
저를 자리보전케 한 게 미안해서일까, 제게 힘을 실어주려는 모양인데….
‘도미닉 그 새끼도, 아무리 친형제가 아니라지만 동생을 너무 막 다뤘어. 나처럼 적당히 풀어 줬어야지.’
제가 4황녀의 부마가 되지 못한다면, 제가 아는 그 누구도 되면 안 되었다.
윌로우는 그 비뚤어진 욕망을 애써 감추며 제 아비에게 신실한 아들의 낯을 지었다.
“그리고, 저도 슬슬… 귀족파 청년들을 규합해보려 합니다. 그러려면 아버지께서 쥐고 계신 각 가문의 정보를 알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귀족파 청년들을 규합하겠다며 후작님께 청하십시오. 분명 다른 가문들이 배신하는 일이 없도록, 각 가문의 치부를 수집해 놓으셨을 겁니다.”
숫제 루시페우스가 읊어준 대사 그대로였다.
다시금 후작이 반색하였다. 어려서부터 귀족파의 후계자들과 어울려 지내는 아들이었지만, 그 어울림이 주색잡기에 한정되어 걱정스럽던 차였다.
그런데 알아서 귀족파의 권세를 잡겠다고 나서다니…. 아들을 철들게 해준 알비누스의 양아들에게 고마움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래. 마일스가 바빠지겠구나. 앞으로 네가 이끌 가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신의를 지킬지 알아두면 큰 도움이 되겠지.”
아버지께서 저를 총애하심에, 윌로우는 씨익 미소 지었다.
개회연 때 보니 스칼렛 그것이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어차피 게이블스는 나서부터 제 것이었다.
‘계집이 날고 기어봤자지. 사교계에서 웃음 팔아 얻은 인기가 뭐 그리 대수라고.’
그것이 천지 분간을 못 하는 그를 시한폭탄으로 만들려는 루시페우스의 계획임을, 그는 몰랐다.
루시페우스가 구태여 알비누스 또한 게이블스의 약점을 잡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은 것 또한, 알 수 없었다.
“조만간 대신전으로 찾아뵙고 싶습니다.”
대신전의 집무실. 레베카는 며칠 전, 제 막냇동생을 찾아왔던 남자를 떠올렸다.
냉정한 낯을 하고서 그 속은 세실리아에 대한 연정으로 부글대던 그 묘한 남자를.
저와 의논할 것이 있는 모양인데, 세실리아가 꿈결에라도 들을세라 말을 아끼는 기색이었다.
“전하의 체질에 대해… 신전에서 이야기가 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용건을 듣자마자 레베카는 남자의 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마법을 써서 제게 연통을 넣은 것이 오늘 아침의 일.
똑똑.
지난번과는 다르게 퍽 일반적인 방법으로, 남자는 레베카의 집무실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