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4)
나의 시작도… 죄책감일까?
그렇게 치부하기엔 지금까지 그와 나 사이에 쌓인 사연이, 그리고 그가 내게 보여준 다정이 너무도 많았다.
지금도, 내 입술을 머금는 일에마저 조심스러워하는 그가….
열기 띤 그의 한숨이 바스러져 내 숨결과 섞였다. 입술이 맞닿은 사이로 꼭 감은 눈에서 떨려 나온 눈물이 스며들었다.
입맞춤은 짭조름했다.
그 우뚝한 코가 내게 걸리지 않게끔, 그는 고요하게 고개를 움직이며 내 볼에 묻어난 눈물을 몇 번이고 닦아내 주었다. 번번이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뜨겁고 또 찌릿했다.
이런 그에게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지 않으려고, 눈길 주지 않으려고, 내 마음이건 그의 마음이건 모든 것을 모른 체하려고 애썼지만… 속절없이 끌리고 말았다.
내 목 뒤를, 다시금 허리를 받치는 그의 손길이 단단하고 또 뜨거웠다.
오래간 내게 떠밀린 걸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그는 몇 번이고 내 입술을 베어 물고 삼키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토록 굳건한 애정이 곁에 있는데, 어떻게 또 한 번 속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도, 내가 어떻게 그래….’
그 모든 번민과 자기혐오를 잊기 위해, 나는 그에게 애타게 매달렸다.
그의 목을 더 긴박하게 끌어안고, 더 깊이 입 맞추라 조르듯 고개를 쳐들었다.
요령 없이 매달리는 내가 힘들지 않도록 그의 단단한 팔이 내 등을 끌어안자, 나는 하릴없이 그의 가슴팍에 온몸을 묻게 되었다.
언젠가 내가 아프게 하겠답시고 팔을 휘둘렀던 그 가슴에.
그러니까 실은, 모든 걸 다 잊어두고서 언제고 달려들고 싶던 그 품에.
“…흑.”
숨이 얽혀 있던 곳에서 울음이 떨려 나오고 말았다.
“흑, …이러면, 안 되는 거.”
그의 입술을 밀어내듯 턱을 떨구자, 내 울음소리가 맞닿은 품 안에서 어른거렸다.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떼어 내 낯을 살폈다.
“이럴 자격 없는 거, 나도 다 아는데….”
자꾸만 울컥거리는 걸 참을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가 몇 번이고 눈가를 쓸어주어도 자꾸만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게 민망해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시기는요.”
그가 상체를 기울여 나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 힘없는 내 손으론 몇 번을 닦아도 자꾸만 젖어 들던 뺨이 그의 큰 손에 낙낙히 담기고 말았다.
그대로 내 고개를 받쳐 올린 그는 흡사 내 눈을 닦아내듯 눈초리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전하께서 모르시는 것도 다 있군요.”
“…흑.”
“일단, 전하께 안 되는 건 없고요.”
“…….”
“그 모든 시간을 전하께서도 기억하신다는 게….”
흐흑, 그 사실을 그의 목소리로 듣는 것만으로 죄책감에 명치가 무거워졌다. 자꾸만 울음소리가 목구멍에 치받혔다.
“저는 오히려 더 좋은걸요.”
그의 뜨거운 엄지가 내 눈시울을 꾸욱 눌러 닦아냈다. 몇 번이고 흐려지던 시야 속 그의 낯에 떠오른 건, 명백한 미소였다.
그런 얼굴이, 내겐 낯설었다.
세실리아로 태어나고 난 뒤에야 알게 된… 이 바보를 어쩔까, 하는 듯한 미소.
“그러니까… 그리도 오래전부터 저를… 아셨군요.”
다시금 죄책감이 명치를 쿡쿡 찔렀다.
“…저만 알고 있던 게 아니었군요.”
그리 읊조리며 그는 어느새 그에게서 미끄러진 내 양손을 모아 쥐었다.
그 손짓이 마치 기도인 듯 경건해, 나는 훌쩍이지도 못하고 숨죽여 그를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내 양손을 모아둔 뒤 거기에 제 손을 포개며, 그는 그저 거기에만 시선을 붙박아 두었다.
아래로 떨군 그의 눈동자가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바다에 빠진 저녁놀처럼 일렁였다.
“망상 같은 게 아니었어….”
그의 볼을 타고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수그린 그의 어깨에서 나는 달빛에 비치던 아이의 옹송그린 어깨를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방관했음에도… 그 수많은 밤에 내가 곁에 있었던 것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만으로도 그는 나를 마음에 담았고.
이 과분한 다정은 오로지 나만을 향해서….
복받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나는 그대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밤이 깊을 때까지 루시페우스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신성력을 써준 덕에 울고불고할 기력이 간신히 났던 거지만, 결국에는 진이 다 빠져 도로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아무리 레베카가 돌보았대도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간밤에 그와 단둘이 있으니 누굴 부를 수도 없어, 그가 주방에 몰래 가 요깃거리를 가져왔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그가 가져온 건 찬 우유에 마법으로 불린 오트밀에 과일 퓨레와 꿀을 넣은 거였다. 그게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워낙에 끼니도 안 챙길 것처럼 생긴 사람이 그러니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 귀엽…게….
“동대륙을 오래 유랑했으니까요.”
“동대륙….”
그가 떠먹여 주는 걸 삼키며 나는 꿈에서 봤던 동대륙의 초원을 떠올렸다.
은하수 빼곡히 찬 밤하늘, 끝도 없이 초원과 하늘이 맞닿아 있던 그 풍경. 오랜 여행의 도중에 초원에서 잠들어 있던 남자.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 먼 하늘을 바라보며 회한 가득한 눈빛을 띠고 있던 루시페우스.
내게 건네려던 다음 숟가락이 허공에 멎어 있었다. 생각에 빠진 내 낯을 살피던 그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동대륙의 배꼽…이라 불리는 평원에 갔었는데요.”
“응, 봤어.”
나는 그를 안심시켜 주듯 미소 지었다. 주방에 다녀오면서 다시 안경을 쓴 그의 낯엔 안도감이 여실했다.
정말이구나…. 그리 중얼거리며.
나로서야 그를 내버려둔 시간을 인정하는 셈이라 괴롭지만… 그는 그 모든 순간에 정말로 나와 함께했다는 사실 자체로 행복한 모양이었다.
‘그게 좋다는 거니까….’
나는 애써 미안함을 티 내지 않으려 했다.
그건, 그건… 어떻게든 알아서 갚으면 될 일이고….
그가 원한다면야, 무엇이든….
그가 다시금 성실하게 숟가락을 놀려 오트밀 범벅을 내 입에 넣어주었다.
“유스티안 전하를 찾을 때 썼던 마도구 말입니다. 동대륙의 샤먼에게서 받은 거였는데요.”
“샤먼?”
“네…. 어머니의 시신이 있는 곳을 찾으려고 했거든요.”
“격랑의 전사자라면 영광의 홀에…. 아.”
내가 처음으로 어른의 사고를 하는 걸 티 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격랑의 전사자들을 예우하는 문제에 의견을 내면서였다.
당시의 전사자들은 신분과 무관하게 모두 영광의 홀에 안치됐는데, 일찍 전사한 자들은 차마 수습하지 못했다고 했다.
에리나 경 역시 그랬을 터.
“네…. 그런데 어머니가 매장되신 곳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균열에 흡수됐더군요.”
“…그 영역이 달의 인력에 따라 더 커지기도 한다더니.”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가 죽을 곳이라고 생각했었기에. 또 이제는… 그가 죽을 마음을 먹었었다는 것이 떠올라서.
“거긴 왜 찾아가려고 했어…?”
“그 샤먼이, 어머니에게서 온 신성력이니 어머니의 육체가 잠든 곳에 버리라고 하더군요.”
“아아….”
“그런데 신성력을 버린대서 삶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아서….”
내내 솔직하게 털어놓던 그가, 갑자기 쓰게 웃으며 말을 줄이는 것이….
‘그래서 죽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구나.’
그의 어둑한 낯에, 나도 덩달아 침울해졌을 때였다.
“그런데 이젠, 제 신성력이 전하께 쓸모 있으니까요.”
“…고작?”
“…전하께서 하시면 안 될 것이 있기는 있었네요.”
그의 눈동자가 단호하게 빛났다.
“고작이라뇨.”
미안, 나는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 내 곁에 머무르기를 청한다면. 그걸로 내 마음의 빚을 어떻게든 갚을 수 있는 거라면.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를 위해서라면… 그래도 되지 않을까.
‘언젠가 상처받게 된대도 내가 잘못한 게 있으니 어쩔 수 없고….’
자못 불만스러운 듯한 그의 낯을 흘끗대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는 나지막이 코로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샤먼이 제게 배꼽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동대륙 사람들은 그곳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부른다면서요.”
“세상의… 중심?”
“저도 명확히는 감지하지 못했지만, 초자연적인 공간인 모양이었습니다. 왜냐면….”
그릇에 든 것을 싹싹 긁던 그의 손놀림이 잠시 멈췄다.
“거기서 제가… 전생을 기억하게 됐거든요.”
“…….”
“전하께서 계시지 않은 삶, 말입니다.”
그리 말하며 그가 또 한 숟갈 듬뿍 뜬 것을 내 입에 넣어주었다. 그걸 우물대며 나는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세실리아는 내가 아니니까, 루시페우스랑 얽히지도 않았겠고….’
그럼 그 세실리아도 신성력이 없었을까. 아니, 신성력은 영혼의 문제이니 다른 세계에서 온 나만 이런 거려나….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 걸, 그는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왜?”
“좋아서요.”
귀 끝이 확 달아올랐다.
얘, 얘는 왜 갑자기.
목소리를 긴박하게 터뜨리던 고백보다도, 짧은 떨어짐조차 아쉬워하던 입맞춤보다도 어째서 이런 게 더 쑥스럽고 마는 걸까….
내가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때였다.
“전하께서 저를 피하지 않으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게….”
“…미안.”
해묵은 죄책감과 새로운 미안함이 뒤섞여, 나는 또다시 사과의 말을 입에 올렸다. 가슴이 자꾸 욱신거렸다.
“아뇨, 그런 말씀을 듣고자 한 게 아니라….”
그가 빈 그릇을 협탁 위에 올려놓더니, 내 두 손을 겹쳐 쥐었다.
“전하께선 제게 미안해하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전하께 실망할 수도, 전하를 미워할 수도 없고. 그건….”
천천히 내 손을 제게로 당긴 그가 고개를 천천히 숙여, 양 손등에 한 번씩 인장을 찍듯 입술을 내리눌렀다.
“앞으로도, 전하께서 무슨 일을 하셔도… 미안해하실 게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
도대체 왜, 마음이 이 정도로 깊은 거지?
내가 뭐라고.
그것이 너무도 과분하게 느껴져, 나는 몰래 입 안의 살만 잘근대었다.
“죄송함은, 제게도 없는 바가 아니고요….”
그리 읊조리며, 그는 제가 입 맞춘 곳을 몇 번이고 꾹꾹 문질렀다. 제 입맞춤을 내 손등에 새기려는 것처럼….
‘제가 미안할 건 또 뭐야….’
그는 내게 예사로 온갖 것에 대해 자책했으니 그 일환일까….
“그런데.”
그때,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울렸다. 그의 평소 말소리보다 조금 높은 톤인 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했다.
“소설…이라고 하셨죠.”
으응…. 그리 우물대며 나는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미안해하지 말라지만, 그를 책 속 등장인물로만 생각하려 애써온 세월이 미안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 낯에 스치는 게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그는 엷게 미소 지으며 내 미간을 문질렀다.
“거기서 저는 어떻던가요.”
“응?”
“좀 멋있게 나왔나요.”
“…….”
아니, 끝의 끝까지 아멜리를 따라다니다가 결국 꼴사납게 죽고 말았는데….
나는 대번에 그의 간단한 설정이 한 문장으로 떠올랐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누가 조, 조, 조,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말하겠어….
나는 얼굴이 새빨개질세라, 창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재빨리 대꾸했다.
“…난 원래 죽은 인물은 기억 안 해.”
“어지간히 꼴 보기 싫으셨나 보군요.”
그가 숨죽여 웃는 소리가 울렸다.
벅참을 가누지 못하는 듯한 그의 낮은 웃음소리도, 지금의 것이라 오해했던 그의 이전 생에 대해 그가 내리는 건조한 평가도 모두 낯설었다.
나는 별수 없이 입술만 빼죽대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런데, 거기서 제가 실수로 죽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