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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43화 (143/220)

143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3)

나는 느릿하게 눈을 끔벅였다. 깜빡, 깜빡, 시야가 조금 명료해지는 것도 같았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정말 루시페우스였다. 안경이 떨어져 나간 채, 그저 혼란으로 가득 찬 낯이었다.

또 뭐 때문에 이렇게 흐트러진 건지, 그 단정한 사람이.

마음이 약해져 있어서일까,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신이 좀… 드세요?”

“미안해, 경.”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턱을 감싸 보았다. 손바닥에 물기가 어렸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그렇게 닿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떤 감정이 복받친 듯, 순간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

“…….”

울음 섞인 숨소리를 머금으며, 그가 내 손을 쥐어 거기에 뺨을 묻었다.

어느새 선명해진 시야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너무도 가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뭐가 번번이 이렇게 절박한 거지, 이 남자는.

“그런…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런 눈빛을 받을 자격이 없어, 나는.

한데, 무언가 오해한 듯 그의 낯이 어둑해졌다. 내 손을 쥔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 내 손을 아프게 하는 법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냐.”

“…죄송해요.”

꾹 다문 그의 잇새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제가 지난번엔… 너무 이상한 소리를 해버렸죠.”

“…….”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경.”

“제가, 머리가 돌아버렸나 봅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죄송해요….”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

그는 당치않다는 듯, 급기야는 한껏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에는 어떤 자책, 내 말에 대한 부인 등이 묻어났다.

“제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허황된 망상을 핑계로 감히 곁을 청했습니다. 부담을 드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잘못한 건 난데.

왜, 제가….

‘아, 그러니까.’

계속 자책하고 있었구나.

내가 내 잘못을 직시하지 못해 도망친 것을, 저로부터 도망친 거라고 오해해서….

나 때문에 또 다쳤구나.

마음이 헤지고 있구나.

말라붙었던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졌다.

명치가, 손끝이, 목구멍이 욱죄었다.

…이런 괴로움이 꿈의 것일 리는 없겠지.

“경, 나 좀.”

“…네?”

“일으켜줄래…?”

그가 허둥지둥 나를 부축해 앉혔다.

그러는 동시에 재빨리 협탁에 있던 것들을 챙겼다. 내 이마를 닦아내기 위한 물수건과 주전자 같은 것들이었다.

주석 잔에 물을 따르고, 침대 헤드에 기댄 내 고개를 조심스레 받치고, 내 입술에 잔을 대어 물을 흘려 넣는 그 일련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래. 그가 나를 대함에 조심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신성력 없는 나와 닿을 수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손끝을 잡아볼 때도, 마법진 때문에 괴로워하는 나를 회복시킬 때도, 날뛰는 말로부터 나를 구하거나 불꽃놀이를 함께 보기 위해 나를 안아 들고 있을 때도, 나를 찾아오거나, 에스코트할 때나, 유스티안을 찾아 주겠다고 내 손끝에 피를 낼 때나, 내게 도움을 주겠다며 찾아온 그 모든 순간에….

그는 내 모든 것에 조심스러워했다.

내 등을 받친 팔을 단단히 고정해 두고서, 그는 몸을 힘겹게 틀어 잔을 협탁에 올려두었다.

그러고서 내 입가를 닦는 손짓에, 내 낯을 살피는 눈빛에, 나를 받친 그 품에, 그 모든 곳에 조심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이 다정을 받을 자격이나 있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경, 있지. 나는.”

“네, 전하.”

말씀하세요, 그는 내 입에서 떨어질 말이 무슨 신비라도 될 것처럼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너무 황송하여 눈물이 퐁퐁 솟았다.

“나는 정말… 정말, 경에게 잘한 게 하나도 없는데.”

그러니까, 차라리 빨리 털어놓는 게 맞았다.

그를 그 자책의 수렁에 빠뜨려두지 않도록.

이 과분한 다정이 자격 없는 내게 허비되는 일 없도록….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경에게 내가 찾아간 것 같다고 생각했댔지.”

그의 눈매가 굳었다.

나는 그에게 기대었던 것을 떼내어 바로 앉으려 애썼다.

“맞아. 그거 다 나였어.”

“…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끔 꿈에서 경을 봤어.”

그의 낯이 얼어붙었다. 한편으로는 미세한 기쁨이 깃들려는 것도 같아…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 알았다는 거야. 경의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고, 경이 알비누스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거야 제게 일어난 불행일 뿐인걸요.”

당황한 것도 잠시. 그는 부드러이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멀미가 난 듯이 머리가 울렸다.

“그래서… 그게 경에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그 슬픔이 경에게 어떤 마음을 먹게 하는지, 그래서 경이 어떻게 자라나고 마는지… 나는 다 알고 있었어. 왜냐면.”

왜냐면….

나는 더는 말을 이을 용기가 없어 고개만 숙인 채 우물거렸다.

내 말이 이상하게만 들릴 텐데도, 그는 그저 나를 제게 기대게 하려는 듯 손을 뻗어와… 나는 재빨리 도망치듯 자백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다 알고 있거든.”

나는 마치 자해하는 심정으로 말을 쥐어짜냈다. 그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고서….

이야기요, 루시페우스가 마치 뜻 모르는 외국어를 따라 읊듯 중얼거렸다.

“나는 전생을 기억하고, 그때 경의 이야기를 소설로 읽었어.”

한번 뱉어내고 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이미 들켜버린 바에야, 차라리 후련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다 나와 있었어. 경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자랐는지, 후작가에서, 아카데미에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그렇게 자라서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경이 말한, 경의 첫 번째 생 말이야.”

루시페우스의 품이 멎은 건 한참 전의 일이었다.

“경이 그것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건 알겠어. 하지만, 하지만…. 어렸을 땐 똑같았잖아. 똑같이 많이 울고 똑같이 많이 아프고 외로웠잖아. 힘들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으른 생각으로. 그래서 단순히 내가 이번 생의 목표로 삼은… 내 친구의 사랑을 위한 조미료 정도로 그의 존재를 폄하하고 말았던 그때의 자기기만.

그에게 끌리면서도 그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곧 사라질 마음으로 치부하고, 그의 고백을 듣고서도 답을 내릴 수 없었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기만의 시간을 외면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의 마음이 내가 아는 이야기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나를 향한다면… 내가 모든 ‘하지 않았음’의 대상이 몇 개의 문장으로 운명이 완결된 등장인물이 아니라, 이 세계에 살아 숨 쉬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는 거였으니까.

끝까지 이기적이게도, 내 마음 하나 다치지 않으려고.

잘한 것도 없는데 눈물이 자꾸만 나왔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

“난 경을 위로해준 게 아니야. 나는 그 어린애가 계속 불행하도록 내버려둔 거야. 그냥, 경의 운명이 그렇고 이 세계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해서….”

눈물이 뚝뚝 흘러 이불 깃을 적셨다. 뻔뻔한 얼룩이 점점이 그 영역을 조금씩 넓혔다.

루시페우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기가 막히겠지.

그리고… 혐오스럽겠지.

애초에 이리 됐어야 했다. 굳이 내 허물을 자백하지 않고도 멀어졌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 후련함과 괴로움을 담아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런 나를, 경이 마음에 담으면 안 돼.”

“전하.”

“아니, 오히려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곁에 있었다고 생각해서 나를 마음에 담은 거라면… 더더욱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의 말끝이 떨렸다. 아닌 척해도 충격받았겠지.

얼마나 배신감이 클까.

좋아한다고, 그래서 곁에 있게 해달라고 그리도 바란 대상이 실은 제 어린 시절을 괴롭도록 방조한 존재라는 게.

루시페우스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도, 덧붙일 수 있는 말이 없어… 입술만 꾹 깨물었다.

“…굳이 말씀하실 것도 아니었잖습니까.”

“말할 생각 없었어. 경이 너무 다정하니까, 모른 척하고 싶었어. 나라고 안 설레고 안 좋았겠어? 경이 모른다면 나도 끝까지 모른 척하려고 했어.”

“그리고, 제 마음도 모른 척하시고요.”

“그거야….”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 비스름한 곳도 보지 못한 채 입술만 꼭 깨물었다.

그가 낯에 얼마나 역력한 실망을 띄웠을지, 그 기미라도 볼까 두려웠다.

뻔뻔하지, 죄를 고백하고 있는 주제에.

자조감에 입술을 깨문 잇새로 웃음이 새어 나올 때였다.

“…단지 그것뿐이십니까.”

그가 고쳐 앉는 기척이 나더니, 그의 손이 내 턱을 쥐었다. 그 단단한 손끝이 여느 때처럼 잇새에 깨물린 내 입술을 빼내고, 천천히 내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전하께서 저를 자꾸 밀어내셨던 이유… 말입니다.”

그의 시선이 너무도 뜨거웠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볼 수 없었다. 애써 눈동자를 모로 떨구었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그저 타박이라고 느껴져, 나는 끝까지 감춰두려고 했던 이야기까지 입에 올리고 말았다.

“그게… 경의 그, 그릇된 연심도. 필요했고….”

“네. 그것도 알겠습니다. 그것뿐이시냐고 여쭈었고요.”

그의 말소리는 어딘가 화난 것처럼 울렸다.

그래, 화났겠지….

한번 속내를 털어놔서인지, 나는 순순히 속엣말을 술술 읊었다.

“그것도 그렇고, 경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실수로 죽을까 봐서….”

“저는 이제 거기서 죽지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네. 그리고 또요.”

그의 말소리가 추궁처럼 울렸다.

나는 자꾸만 도망치고 싶었지만, 숫제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내 턱 끝을 쥔 그의 손길이 너무도 완고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여전히 그의 눈 근처도 바라보지 못한 채, 나는 웅얼거리듯 자백했다.

“그리고, 경의 다정함은 언젠가 사라질 거고….”

“제가요.”

“실망하는 건 한순간이잖아. 그리고 지금 실망스러울 거잖아. 난 경의… 평생을 배신한 셈인데….”

주제도 모르는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가 흘러내렸다.

“전하.”

내 턱을 쥐었던 그의 손이 내 뺨을 한쪽씩 감싸며 눈물을 거두었다.

“절 좀 봐주세요.”

“…….”

그러고도 그를 볼 수가 없어, 내리깐 눈을 한참을 깜빡이다가.

“전하.”

그의 채근에, 나는 어렵게도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실은 내게서 한시도 떨어진 적 없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내 낯을 한가득 담은 채… 어떤 감정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건 실망감도, 분노도 아니었다.

또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나는 입술을 아프리만치 짓씹어 참았다.

“저는….”

그 모든 걸 꼼꼼히 지켜보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는, 절대로 전하의 그 무엇에도 실망할 수 없습니다.”

“…….”

“원망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절대, 절대요…. 그리 중얼거리며 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내내 그의 눈동자는 내게 붙박여 있었다.

“전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전하께서 아시는 것과 똑같은 삶을 살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뇨.”

그가 단호히 내 말을 끊었다. 그 단호함이 옮아간 듯 그의 엄지가 다시금 잇새에 말려들려던 내 아랫입술을 눌렀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그 손끝은 내 입술에서 떠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거칠어진 살갗이었다. 내가 잔뜩 짓씹은 터라 이리저리 찢어져 있었고, 피가 났고….

그걸 닦아내듯, 그의 손끝이 천천히 내 입술을 쓸었다.

그러는 내내 그의 붉은 눈동자는 거기서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그것뿐이시라면, 저는 다 좋습니다.”

그 읊조림과 함께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그때처럼, 그의 고개가 슬며시 틀어졌다.

그 까슬한 곳에 제 입술을 맞대는 것조차 너무도 조심스럽고 다정하여….

“그의 시작은 죄책감이었어요.”

나는 어쩌지 못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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