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2)
“…그러셨군요.”
남자는 짤막한 고민을 마치고 한숨처럼 대꾸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 어머니 쪽으로 혈연이 있지 않나… 짐작할 뿐입니다.”
레베카의 감청색 눈동자가 남자에게 지그시 닿았다.
일전에 봤을 때와 달리 평온한 남자의 낯은 석고상같이 단정한 차가움만을 풍길 뿐이었다.
아니, 평온하다니….
정신을 잃은 세실리아의 존재만으로, 남자는 여기에 들어선 순간부터 심히 동요하고 있었다.
어쩌면 여기 오기 전부터도….
남자가 지닌 기운들이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레베카는 그의 주의를 끌듯 침착하게 질문을 이었다.
“그렇다면, 경의 어머니가.”
“알비누스 선대 후작의 혼외자로 성기사단에 복무하셨고, 지난 격랑 때 전사하셨습니다.”
“…그랬군.”
그 대꾸가 꽤나 정직하여, 남자가 황태자가 주시하는 알비누스의 일원이란 사실은 레베카에게 큰 경계심을 주지 못했다.
“성녀께 동생이 있으셨다더니….”
“어머니께서는 제가 한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내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른다는 소리였다.
레베카의 눈동자가 다시금 남자를 살폈다. 외관은 세실리아의 또래지만, 남자의 영혼에 깃든 세월은 범상치가 않은데….
“그러면 그걸 어찌 알았지?”
“그 따님 되시는 분께 신성력의 끌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군.”
연신 무례할 수 있는 질문에도 남자는 성실하게 답했다. 그 낯이 달의 파편처럼 한랭한 것에 비하면 꽤나 이질적이었다.
‘하긴, 유시가 반대한다고 노래 부르던 걸 보면 그 애 앞에서 세실에게 마음이 있는 걸 보였다는 소리니. 꽤나 진심인 모양이지.’
태도는 뻣뻣했지만 남자가 제게 잘 보이려 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처럼 신성력도 마력도 많은 이라면 제 동생의 비밀쯤은 진즉에 알고도 남았을 터.
레베카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한데 신성력도 없는 세실에겐 어째서…?”
“…신성력의 끌림이야 그저 혈연의 문제 아니던가요. 그리고 그게….”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작게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나 레베카로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게 연심이 아닌 건, 저도 압니다….”
“그거야 그렇지.”
“제게야… 존재하신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고요.”
대충 납득하고 넘어가려 했건만, 남자는 쑥스러운 기색도 없이 말을 계속 이었다.
요즘 애들은, 낯간지러운 소리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
30대 중반의 레베카는 황당함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대 같은 체질을 지녔다면 우리 세실이 퍽 긴요하겠지만. 그거야 자네 사정이고.”
“아닙니다. 단순히 그런 필요에 의한 게 아니라….”
그리 중얼대는 남자의 시선은 세실리아의 낯에 붙박이고 말았다. 그전부터 그리하고 싶던 것을 레베카의 눈치를 보느라 참고 있던 것이 빤했다.
“제게 이번 생을 선물한 분이십니다.”
“이번… 생…?”
“달의 신께서 안배하신 일입니다.”
남자의 입술이 열없이 달싹였다.
아, 낯익다고 느꼈던 게 에이든 님의 신성력이 아니라….
레베카는 남자의 영혼에 밴 익숙함의 정체에 숨을 작게 들이켜고 말았다.
작은 빛의 손위 누이는 몇 가지 대화로도 대강의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현세대에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타고나, 교황으로까지 점쳐지는 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후작에게 그녀의 비밀을 누설한 그 신관은 3황녀 전하를 질투해서 그런 걸까…. 조만간 찾아뵙기로 했으니, 그때 여쭤보면 알 수 있으려나.’
루시페우스가 레베카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은 그래서 다행인 일이었다.
레베카가 더는 의심하지 않고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내가 나름으로 결계를 더 쳐두었으니 허튼수작은 부리지 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당부를 곁들이고서.
루시페우스는 그제야 세실리아의 머리맡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기나긴 여정 끝에 간신히 오아시스에 다다른 사막의 여행자처럼, 이제야 돌아왔다는 감각이었다.
베개에 파묻힌 머리통, 시녀들이 느슨하게 땋아 내린 머리칼, 눈물방울을 머금은 은빛 속눈썹.
그 단아한 낯이 열에 달떠 새빨개져 있었다.
레베카가 떠나며 신성력이 거두어져서인지, 그가 방에 막 들어섰을 때보다 상태가 다소 나빠진 듯했다.
그는 떨리는 손끝으로 간신히 장갑을 벗고서 손바닥으로, 손등으로, 손끝으로 세실리아의 관자놀이를 훑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송골송골 맺혔던 식은땀이 딸려 나왔다.
“…….”
루시페우스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지 않으면, 세실리아의 괴로움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또 정신을 잃고 말 것 같아서.
명치 끝이 부글대고 정신이 아뜩하였다.
그는 간신히 신성력을 필요한 만큼 짜내어 작은 마법을 걸었다. 열을 낮추고, 덜 아프고, 기왕이면 좀 나을 수 있도록.
거기에 집중함으로써 그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말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말아서….’
루시페우스는 제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다 저 때문이었다.
저를 밀어내지 마시라고, 제발 곁에 둬주시라고 간원하기 위해 제 음침한 망상을 입에 올리고야 말았다.
‘이런 자가 이용해달라 청하니 신뢰가 가실 리가….’
그 자책감을 담아, 세실리아의 이마를 훑는 그의 손길이 눅진했다.
자꾸 혼란만 안겨드리고, 곤란하게만 하는 저인데. 어째서 자꾸 곁에 있고 싶어지는지….
왜 자꾸 어떻게든 맴돌고자 하는지.
‘차라리 신성력의 끌림 때문이었다면 핑계라도 대기 쉬울 것인데….’
목구멍에 울컥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세실리아에게 건 마법에 신성력을 더욱 보태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추태를 부릴 것만 같아서….
‘그래도 좀 나아지신 거겠지….’
세실리아가 쓰러졌을 때, 그는 크나큰 갈등에 휩싸였다.
제가 괴상한 소리를 지껄인 탓에 충격받고 쓰러진 그녀의 곁에 차마 남아 있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제 손으로 직접 세실리아를 돌보고 회복하게 하고 싶었다.
마법으로 은신한 채 세실리아의 기사들이, 시녀들과 하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풍경을 지켜보며, 그는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했다.
당장 모두를 다 물리고 번거롭기만 한 신성력을 쏟아부어 나으시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열망 이상으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만 데 대한 자책감이 컸다.
때마침 저 멀리서 레베카의 기척이 났다. 아무리 멀어도 무시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신성력이었다.
‘…3황녀 전하의 신성력이라면.’
세실리아를 회복하게 하는 건 레베카도 할 수 있지만, 세실리아를 쓰러지게 한 건 저 하나뿐이었다.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제 몸을 물렸다.
대신 그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윌로우를 충동질하고, 어째서 알비누스들이 여전히 수정을 거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한편으로는 로즈버리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다녀오기도 했다.
적어도, 세실리아가 깨어났을 때 변명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튼소리를 해서 죄송하다, 그늘진 망상이나 품는 종자긴 하지만 연모하는 마음은 진심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곁을 지키게 해달라….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한 번이라도 더 쏟아낼 수 있도록.
세실리아가 쓰러진 날, 그는 손거울에 마법을 하나 더 건 참이었다. 근방의 기척을 감지하기 위한 거였다.
세실리아를 치유하러 오는 레베카의 신성력이 강대하니, 그 기척이 사라지면 세실리아가 나았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레이디에게 선물로 주는 것치곤 음습한 취미 아냐?”
세실리아의 낭랑한 재잘거림이 들려오는 듯했지만. 이제 와서 제 음침함을 변명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한데 며칠이 지나도, 세실리아의 방에서 레베카의 기척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어쩌다 사라졌대도 잠시뿐, 레베카는 며칠 내내 세실리아의 침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무례를 무릅쓰고서.
레베카가 있음을 알면서도 세실리아의 방에 들어선 것이었다.
오길 잘했다. 마법의 술식을 활용하면 더 정밀하게 세실리아를 치유할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오지 말 걸 그랬나. 이렇게 괴로워하시는 걸 볼 바에야.
아니, 그래도 왔어야 했다.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인데….
그토록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루시페우스는 제 볼을 타고 흐르는 게 있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세실리아의 식은땀을 닦아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손바닥에 물기가 한가득 배어났다.
“경의 마음, 그냥 호기심일 거야. 내가 신성력이 없어서.”
그는 세실리아의 말이면 그게 무엇이든 진실로 받들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처음에야 호기심일 수 있었다.
외로울 때면 찾아와 주는 온기. 제 빨간 눈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는 눈동자. 제게 닿고도 아무렇지 않은 체질.
하지만 20년을 가는 호기심이 어디 있던가.
“그거, 변덕이야.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경의 변덕에 흔들리고 싶지 않아.”
세실리아의 그 말에, 루시페우스는 너무도 놀랐다.
제게… 흔들리신다고?
그는 제가 세실리아에게 어떤 의미가 되리라 생각조차 한 적 없었다.
변덕이라니….
처음에야 변덕인 줄 알았다. 제 삶에 조금이라도 숨 쉴 구석을 만들어준 이에게, 무해하다 못해 제 삶의 구원인 그녀에게 제 목숨줄을 쥐여주면 어떨까 하는 변덕.
그것이 실은… 달의 신이 제게 준 운명 그 자체임을 안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납득하고 말았다.
그래. 그건 운명이었다.
그녀에게 무참히도 끌리고, 그녀의 손끝에 제 목숨을 걸고, 이따금 웃어주심에 기뻐하고 화내심에 죄스러워하고.
그녀의 작은 변화에.
그 사소한 변화에… 가슴 떨리고.
아파하심에, 죽고 싶으리만치 괴롭고.
하지만 죽으면 더는 볼 수 없으니, 도움이 될 기회가 아주 없게 되는 것이니, 간신히 살고 싶음을 이어붙이고….
‘…이기적이지 않은가.’
시야가 몇 번이고 흐려졌다. 볼을 타고 흐른 것이 세실리아의 침상을 더럽힐세라 몇 번이고 눈가를 훔치던 손길에 안경이 떨어지고 말았다.
제 눈이야 그 저주스러운 빛을 띠겠으나, 차라리 이걸 보고 눈살 찌푸리심이 나았다.
차라리. 차라리….
이걸 본다면 눈을 뜨신 거니까.
그렇게라도 그, 저들이 재회했던 봄의 여린 풀빛과 제가 감히 발코니를 드나들던 여름의 우거진 녹음이 범벅된 그 눈동자를 보여 주신다면.
그리하여 제가 감히 곁도 탐내지 못하게 만드는 그 두려운 금빛 반점을 빛내신다면.
제 상을 눈에 담지 않으셔도 좋았다.
어쨌든, 눈을 뜨기만 하신다면.
소맷자락이 부산스럽게도 그의 턱을 몇 번이고 쓸었다.
그의 나직한 흐느낌이 얼마고 이어지고 있을 때.
“…미안.”
네?
루시페우스는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만 크게 떴다.
제 감정에 취해 있는 사이의 일이었다. 세실리아가 가물가물 눈을 뜨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그의 우주를 담은 초록빛 눈동자가 물결에 이지러져 있었다.
숨 쉬기가 조금 편해진 것 같았다. 코끝에 걸려 있던 화하리만치 호된 열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몇 번 느릿하게 끔벅이자, 눈앞에 흐릿한 상이 있었다.
이따금 깰 때면 레베카가 있었는데.
한데, 저 상은….
하얀 낯에 검은 머리칼.
붉은 눈동자.
시야가 흐려서 정확히는 보이지 않지만….
‘루시페우스 같네.’
그의 이름자를 떠올린 순간, 조금 트이는가 싶었던 숨통이 다시금 콱 막히는 것 같았다.
‘꿈이겠지.’
나는 간신히 마른침을 삼켰다. 오래간 고여 있던 눈물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며칠 동안 꿈조차 제대로 못 꿨는데, 꿈에서라도 보게 되었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 그러나 직접 할 용기 없는 말을 간신히 입에 올렸다.
“…미안.”
한숨처럼 새어 나온 그 말소리가 가닿은 걸까. 얼굴을 쓸던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이쪽에 우뚝 멎었다.
“미안해.”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