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솔직함에 뒤따르는 것들 (1)
게이블스 후작저의 소응접실. 사교계의 일인자인 그 댁 영애를 보겠답시고 사교계의 이런저런 인사들이 매일같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오늘도 파벌을 불문하고 영애들이 모여들어 레이디 스칼렛의 우아한 카리스마 아래 다과회를 즐겼다.
“저, 영애. 이거….”
참석객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세르니타 후작의 둘째, 파올리를 배웅할 때였다.
계단참을 지나던 도중 파올리는 남몰래 봉투 하나를 스칼렛의 품에 찔러주었다. 그 손끝이 덜덜 떨렸다.
스칼렛이 흘끗 바라본 그녀의 낯에는 핏기가 가셔 있었다.
“…결심이 섰나요?”
겉봉은 그저 영애들이 사교 모임에 서로를 초대할 때 쓰는 편지처럼 꾸며져 있었지만….
“네. 레이디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마수를 반입하면서 쓰신 거래 내역서예요.”
“잘 생각했어요.”
스칼렛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 미소는 그녀를 사교계의 일인자로 만들어준 일명 ‘황홀한 미소’와 달리 퍽 신경질적으로 비쳤다.
파올리는 그녀의 낯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저, 괜찮을까요…?”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잖아요?”
“네에, 그렇죠….”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스칼렛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태연하게 봉투를 열어보았다. 파올리의 낯이 더욱 희게 질렸다.
진짜 초대장처럼 꾸려진 두 장의 종이 사이에 마수 거래 내역서가 있었다.
정말, 말씀하신 대로네.
스칼렛은 흡족한 낯으로 그 자료를 훑어보았다.
“조만간 발신인 불명의 서류 뭉치가 영애 침실에 들어와 있어도 놀라지 마.”
제가 남몰래 주군으로 모시는 분께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을 때. 스칼렛은 그게 뭔지 몰라도, 그간 그들이 준비해온 일에 대한 결정적인 무언가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정말로 며칠 뒤.
‘그때 말씀하신 게 이건가 보지…?’
이른 아침, 창가 티 테이블에 처음 보는 책이 놓인 걸 본 스칼렛은 곧바로 세실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발신인 불명의 무언가가, 이 이른 아침부터 제집 침실에 들어와 있다라….
아무래도 제 은인께서는 제 가문을 오래간 감시해 왔음을 숨길 생각조차 없으신 모양이었다.
‘베키일까? 수잔…? 레로이일 수도.’
뇌리를 스치는 하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가련한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용인들의 것이었다.
책의 내지는 오래간 수집돼온 듯한 보고서들로 꾸려져 있었다.
거기 적힌 글씨가 귀족들의 필체와 사뭇 다른 것이, 어쩌면… 세실리아가 몰고 다니는 기사들이 단순한 호위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니, 이것들은….’
심상치 않은 내용에 스칼렛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 자료들이 지시하는 이야기에 비하면, 그 책이 스칼렛의 침실에 등장한 것쯤은 놀랍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번 사냥 대회 자체가 황실의 정당성을 흠집 내기 위한 함정이었다고….’
가장 놀라운 것은 제 아버지가 난생처음 제게 맡기려고 한 일의 정체였다.
“갑작스레 영애를 신임하는 척하고 무슨 일을 시켜도 핑계 대서 선 긋고.”
이런 일이 있을 걸 알고 계셨던 걸까…?
동시에, 스칼렛은 사냥 대회의 주관인을 맡게 되었다며 수줍게 웃던 파올리 세르니타를 떠올렸다.
껑충 큰 키를 지녔으면서도 가족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희미해, 늘 어깨를 조금 말고 다니는 순하디순한 레이디.
밖에서야 제가 게이블스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스칼렛이 보기엔 세르니타에서 파올리가 받는 취급이 제가 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스칼렛은 그길로 그녀를 회유한 참이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만인의 호감을 사온 스칼렛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잘 생각해봐요. 분명 그럴 분이 아닌데 레이디를 갑자기 칭찬하고 신뢰하는 척하면서 맡겼겠죠. 하지만 레이디도 알잖아요. 정말로, 진짜 중요한 일이라면 레이디 비올레타나 헤라르도 경에게 맡겼을 거라는 걸.”
설득은 쉬웠지만, 한편으로 어려웠다. 파올리의 모습에 자꾸만 스스로가 겹쳐 보였던 탓이다.
아버지가 저를 버리는 패 취급했음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 침통한 낯….
게다가 그 고배가, 실은 제게 먼저 왔던 것 아닌가.
어쨌든 그 결과로, 세르니타 후작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마수 거래 관련 서류가 스칼렛의 수중에 떨어졌다.
‘누가 봐도, 사냥감으로 적합한 목록은 아니네….’
평소 마멧돼지나 마사슴처럼 마기에 오염된 동물들이 주로 풀리던 것과 달리, 덩치도 훨씬 큰 마물의 아종들이 그 내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루시페우스 경이 거기에 세뇌 마법까지 걸었댔지….’
제 아버지가 알비누스 후작과 근래 가까이 지내는 걸 보면서 알비누스가 심상찮다 여겼지만, 막상 목록으로 정리된 것을 보니 더 놀라웠다.
힐베르크령을 흡수하기 위해 레이디 아멜리를 납치하려 하고, 황성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약초를 마기에 잠식시키고, 수정 광산을 밀매하기 위해 한미한 가문을 이용하고….
그 모든 곳에 알비누스의 둘째 아들이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전하를 연모한 나머지 이 모든 걸 순식간에 그만뒀고 말이야. 이러고도 그 쓸모란 것을 인정하지 못하시다니.’
솔직하지 못하신 분.
스칼렛은 제 은인을 떠올리며 후후 웃었다.
처음에 이 자료들을 마주했을 때 스칼렛은 한동안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잠시 뒤 그 정보가 제게 가져다줄 게이블스의 가주직을 생각하고, 거기에 세실리아의 연애사까지 곁들이자 그저 흥미진진함만이 남았다.
이 내용을 고모님과 상의하여 원로원에 발고하면 꽤나 흡족한 미래가 올 거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를 신실하게 증언해줄 한 남자가 필요했다.
은인의 한마디면 모든 걸 자백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가.
‘상의드릴 겸 만나 뵈어야 하는데…. 어쩐 일로 그리 편찮으신 거람?’
그러니까 원로원 개회연 이후, 세실리아는 며칠째 와병하여 모든 이의 방문을 거절하는 중이었다.
낮일까, 밤일까.
두꺼운 커튼을 꼼꼼히 닫아둔 방에서는 분간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밤마다 전하께서 찾아와 주셨던 것 같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외로워서 울던 밤이면, 그때마다 전하께서 제 머리맡을 지켜 주셨다고요.”
“그래서 처음 저잣거리에서 뵈었을 때도 낯설지 않았고요….”
그의 이야기를 들은 그날.
내가 원작이라고 치부했던 것이 실은 그의 첫 생이었고, 그리고 그가… 그에게 향한 내 죄책감의 근원을 모조리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경, 나는…. 그러니까, 그 얘기는. 잘 모르겠어.”
“아무래도 좀… 음험하게 울렸겠지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아득했다.
정수리를 따라 피가 다 휘발되는 것 같았고, 오래된 죄책감과 그를 실망시키고 말 거라는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쿵쿵쿵. 크나큰 맥박 소리가 온몸 가득 울렸다.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간신히 하나 마나 한 대꾸만 읊조린 나는.
“전하…!”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진짜 한심하다.’
그건 완벽한 회피였다.
비밀이라고 여겼던 내 허물을,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알고 있다는 현실을 나는 조금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의 마지막 기억은….
놀란 그가 황급히 나를 안아 들고, 다급히 내게 신성력을 쓰고, 그 낯은 자책으로 물들고. 그러니까, 그가 언제나처럼 나를 보살피던 장면의 연속들.
그 모든 풍경에서… 나는 도피하고 만 거였다.
그리고 며칠째,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아팠다.
신성력이 없다는 게 판명 난 세례식 이후로 이리도 오래 아픈 건 처음이었다.
‘아, 계속 이렇게 아프면 안 되는데. 빨리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 하는데. 쓸모 있는 세실이 돼야 하는데….’
그 쓸모라는 것을, 그 빨간 눈의 아이에 관해서는 생각지 않았던 게 문제겠지….
“세실, 정신이 드니?”
어렸을 때 그랬듯, 레베카가 매일같이 내 방을 드나들며 나를 살폈다.
신성력으로 치유를 받아도 그때뿐, 레베카가 자리를 비우면 금세 열이 높아졌다. 간신히 잠들어 시간을 꾸역꾸역 보냈고, 그러다가 깨어나도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어렸을 때랑 똑같았다. 당시 꽃샘추위 때문에 돌치레한 거라던 궁의의 진단은 역시 틀린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평생 내 건강을 책임져온 언니의 낯이 가물가물한 시야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연보랏빛 머리칼의 실루엣이 하나 더. 헨리에테도 입궁하면 늘 내 병상을 지키는 모양이었다.
“…그날 호위 담당이던 기사들도 잘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연회장에서만 해도 분명 컨디션 좋아 보이셨는데….”
루시페우스가 곧바로 나를 방으로 옮기기야 했지만, 밤의 프리지어궁에 허락되지 않은 그가 시녀들을 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데릭과 그날의 그림자들이 급히 따라온 모양인데, 어쨌건 그들도 정확한 사정을 몰랐다.
루시페우스 또한 설명하지 못했을 거였다.
‘그가 진짜 연유를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 다행인 건 그가 불안정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나를 받아 들던 그의 품이 뜨거운 듯도 했지만, 기사들이 별말 없는 걸 보면 말이었다.
‘그래. 내가 뭐라고, 나 때문에 그리되면 안 되지….’
내가 뭐라고.
이 세계를, 이토록 생생한 내 삶을 고작 책장 속의 납작한 세계라고 착각하고 모든 걸 내 멋대로 주무른다는 자만심에 취해 있던 내가 뭐라고.
그래서 뭐가 소중한지도 모르고.
그저 내 일신의 평화와 행복을 유지한다는 핑계로, 내가 현실과 미래를 알고 있는 한 존재가 멍들어가는 걸 내버려 두었다.
‘어떻게든 하고자 하면 도울 수 있었을 건데….’
전생이라면 그토록 무감히 굴지는 못했을 텐데, 이곳이 그저 활자의 세계라고 착각해서.
‘…착각은 무슨.’
그건 일종의 모순이었다.
나는 이 삶을 너무도 사랑했고, 이 삶을 선사한 환생에 감사했으며, 그걸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저 활자로 된 인간들이라고 치부하여 쓸모를 가늠하고, 그 운명을 조작하고, 거기서 뿌듯함을 느껴왔다.
그 위화감을, 기실 나는 오랫동안 인지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을 뿐.
그리고 가장 큰 과오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
사랑이라니….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버석해진 눈가에 흐른 눈물이 열기에 날아가며 시원해졌다. 그 자기연민의 위선이 그렁그렁한 것이, 꿈에서인지 현실에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계속 아픈 게 나은 것도 같았다.
어떤 답도 내리지 않아도 되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나는 계속하여 도피하고 있었다.
제 막냇동생의 방에 남자의 신형이 나타났을 때, 레베카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남자 또한 레베카의 존재에 놀라지 않은 듯했다.
“주신의 여명에….”
“그런 건 됐네.”
레베카는 그저 시선을 거두는 것으로 모든 허례허식을 거절하였다.
남자는 그대로 세실리아의 침상 건너편에 가서 섰다. 발코니를 등지고서 고개를 떨군 남자의 낯이 어둑하여, 그 표정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익숙한 신성력과 평소 볼 일 없는 낯선 기운이 남자에게서 일렁일 뿐.
“혹시, 에이든 님… 아니. 힐베르크 후작과 혈연이 있나?”
남자는 고개를 들어 말없이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진 능력을 생각하면 레베카가 무슨 근거로 그런 걸 물었는지 알 거였다.
“그대를 세실의 온실에서 처음 봤을 때 왠지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분과 신성력과 닮아서인 듯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