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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40화 (140/220)

140화. 그 연심의 쓸모 (12)

은은하게 조명이 켜진 프리지어궁을 등져, 그의 낯은 한층 더 어둑했다. 그 어둠 속에서도 그에게 어떠한 갈망이 가득 찬 것이 선연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나는 부러 무감하게 대꾸했다.

“들을 말 없는데.”

“아뇨, 전하.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서 그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당연히 곧바로 가로막히고 말았지만.

“전하의 체질.”

그저 내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던 듯, 힘주어 말하는 그의 낯은 꽤 절박해 보였다.

“그에 대해, 거래를 청할 게 있습니다.”

“거래?”

나는 짧게 웃었다.

그가 내게 거래를 청한 것은 한두 번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여유롭지 못한 낯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정말 거래가 아니라, 모두를 물린 곳에서 대화하고 싶다는 이야기겠지….

‘내가 뭐라고 진짜….’

피하고 싶었는데. 정말로, 되도록 피하고 싶었는데….

나는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노려보았다. 이 모든 게 애걸인 양 그의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대꾸했다.

“…온실에서 얘기해.”

나는 루시페우스를 지나쳐 프리지어궁의 후원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전하, 그럼.”

데릭이 재빨리 물었다.

“밖에서 대기해.”

“넵.”

데릭의 기척이 조금 멀어지더니, 그만큼 루시페우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밤의 온실은 적막했다. 새들도 모두 잠든 시간이었으니까.

티 테이블에 앉았다가는 그 옆에 간이침대를 두고서 그를 돌보던 일이 떠오를 것 같아, 나는 일부러 구석으로 향했다.

후원이 내다보이는 통유리창을 앞에 두고서 적당히 울타리 하나를 골라 걸터앉았을 때. 몇 걸음 간격을 둔 채 말없이 따라오던 그가, 내가 멈춘 것을 확인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일견 위압적이라고 느껴진 순간.

그의 신형이 푹 꺼졌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나를 올려다보는 모양이 되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는, 시선을 떨구며 내뱉었다.

“그냥 저를 이용하십시오.”

그 말소리는 밖에서 언급하던 ‘거래’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쓸모를 찾아주시라 감히 청한 것이 너무 건방졌지요.”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낯에 기묘한 그늘을 드리웠다. 그래서 나는 그의 낯에 실린 간절함이 그림자 때문이라고 오해하기로 했다.

“게이블스 소후작, 그가 실각하게끔 제가 하겠습니다.”

스칼렛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알비누스 소후작의 수작질을 막고 싶으시지요. 저를 이용하세요.”

“…….”

“힐베르크의 비극을 추적하는 일요? 역시 저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로즈버리 탄광의 문제? 귀족파에서 수정을 독식하는 일? 전하께서 돌보시려는 일 모두 제가 알고 있습니다.”

평상시 잘 빚은 도자기처럼 무감정한 그의 낯은, 그의 말이 길어짐에 따라 더욱 흐트러져 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것 같았다.

“그러니, 저를 어떻게든 써먹으십시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괜찮으시다면. 그 말을 우물거리며 그는 제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말아쥐었다. 그 주먹이 작게 떨렸다.

“…저를 곁에 둬주십시오.”

그게 어떤 선언이었던 듯, 그가 양손을 내뻗어 내 발등을 쥐었다.

무언가를 간구하는 그의 낯이 더욱 가까워졌다.

분명 안경을 쓰고 있는데도, 그의 눈이 붉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저… 그저 제가 바라는 것은 그뿐인데요.”

달빛에 비친 그의 낯이 절박하게 빛났다. 그의 손이 뜨거웠다.

이런 건, 싫었다.

내가 뭐라고, 그가 나로 인해 슬퍼하고 불안정해지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

나는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경의 마음, 그냥 호기심일 거야. 내가 신성력이 없어서.”

“아뇨, 전하. 저는, 저는… 제가, 제 마음도 모르는 무지렁이는 아닙니다.”

더는 아니라구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계속 모른 척하셔도 좋습니다.”

“…….”

“전하께서 그리도 잘 쓰시는 책략,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아닌 척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시는 거요.”

모르는 척, 그게 네게는 안 돼서 문제인 건데.

“제가 다른 이를 연모한다고 생각하시고, 제 절실함 같은 건 모르는 척하시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낯에 실린 감정이 너무도 무거워, 나는 도망치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편에는 감정의 실타래가 이토록 묵직하게 엉겨 있는데, 관목 위로 달빛이 내려앉은 후원은 천연덕스러우리만치 고즈넉했다.

“전 사실, 아무래도 다 좋았습니다. 알아주지 않으셔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가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미약한 열기가 풍겼다.

놀란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며 돌아보자, 가까워진 그의 눈가가 엷게 반짝였다. 깜빡임 없는 그의 눈시울에 걸린 은빛은 작게 부풀었다가, 이내 그의 뺨을 갈랐다.

대체 왜….

마음이 아픈 건지 심장이 아픈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욕심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야 하는데…. 자꾸 알아주셨으면. 그렇게 바라게 되는 제가 저도 너무 싫지만….”

그의 낯에는 혼란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 그저 혼란일 거였다. 그래야만 했다.

한데 내 손은 나도 모르게 그의 낯으로 향했다. 섬세하게 각진 그의 턱을 감쌌다가, 안경 밑으로 엄지를 넣어 그의 눈 밑을 쓸었다.

물기가 밴 손끝이 욱신거렸다.

내 작은 손짓에, 그의 낯이 일렁였다.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뭐라고….

“그거, 변덕이야.”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경의 변덕에 흔들리고 싶지 않아.”

“아뇨…. 네?”

루시페우스의 낯이 멎었다.

그래, 계속 빙빙 돌아 피하느니…. 나는 쓴웃음을 입에 머금었다.

내가 지금껏 계략이며 책략을 쓴 것은 모두, 정말로 소중한 것에 대한 일이 아니어서 그럴 수 있었다.

‘소중한 것….’

나는 올해의 일들을 마치고 나면, 이대로 묻어두고 지내다 보면 내 마음이 그저 흘러가리라고 기대했다.

내 마음은 그의 다정에 휩쓸린 거였다고. 기실 내게 그를 좋아할 자격이나 있던가.

하지만 이 마음은… 결코 그렇게 흘려보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도저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거지만.

나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그의 동공이 크게 수축하였다.

“그거, 경의 힘으로 열 거잖아. 수정도 그래서 모으는 거잖아.”

“그건….”

나는 쓰게 웃으며 그의 얼굴을 밀어내듯 손을 거뒀다.

거기서 네가 죽을까 봐, 그런 말은 삼켰다.

“내겐 그게 더 중요해.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고.”

“그러니까 그 일에.”

“경은 이미 한번 나를 떠났잖아.”

루시페우스가 상처받은 낯을 지었다.

왜지, 그 일은 내게 상처였는데….

내가 발을 당기자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 이렇게… 떨어지고 말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침묵이 흘렀을 때.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거겠죠.”

그가 손을 다시 내뻗어 내 발을 덮었다. 선선하지조차 않은 초가을의 온실에서 내 발을 덥혀주려는 듯이….

“…그러려고 한 건 맞습니다. 이제 그만두기로 했지만요.”

“어제도 몬타즈 상단에서 수정 30카그람을 사들였잖아.”

루시페우스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그 낯에 깃든 건 당황과 분노였다.

“…그건, 왜 그런지 저도 모릅니다. 분명히 그만두겠다고 했고요.”

도미닉이 가출 운운하더라니, 그가 후작가와 척진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짐작하신 것….”

그의 입가에 부스러진 한숨이 어렸다. 그는 고통스러운 낯으로 말을 이었다.

“틀림없습니다. 그런 음모를 꾸민 건 사실입니다.”

“…….”

“제가 전하를 찾아뵙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그날 소후작에게서 협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하를 자꾸만 눈에 담으니, 그 일을 위해 알비누스가 지원하던 것을 끊겠다고요.”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깜빡이지조차 않는 눈동자가 간절하게 빛났다.

“저는 사실, 거기서 죽으려고 했습니다.”

뭐?

“그게… 제 생의 목표였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동정하시다시피… 제게 원한 적 없는 재능이 넘치는 건 평생의 괴로움이었거든요.”

그럼….

“어때. 어린 시절에 못 본 거 보상받는 느낌이야?”

“…황홀하군요. 죽기 전에 이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을 정도로요.”

그 말이 진심이었던 거야…?

나는 깜짝 놀라 숨도 못 쉰 채 눈동자만 떨었다.

나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스스로 연 그가 실수로 죽을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죽음 자체가 그의 소망이었다니.

그가 내뱉은 말의 무게에 짓눌려, 나는 아무런 말도 빚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내 바싹 언 낯을 살피던 루시페우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꿈을 꿨거든요.”

“꿈?”

“거기서 달의 신을… 만났습니다.”

어리둥절한 이야기를 읊조리는 루시페우스의 낯은 더없이 진중했다.

“전하께서는, 달의 신을 만나본 적이 있으신가요.”

“달의 신을, 만나…봤냐고?”

달의 신이 만남의 대상이 될 수나 있나? 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그의 낯을 살폈지만, 그는 그저 고요히 내 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단둘의 신 중 하나인 달의 신.

아수라마수라의 일족에게 마계를 멸할 힘을 준 것은 교단에서 주신으로 섬기는 태양신이었다. 그 형제이자 반려이자 친구이자 경쟁자로 묘사되는 것이 태양의 그늘을 관장하는 달의 신이었고.

달의 신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때는, 1년에 한 번꼴로 찾아오는 작은 달의 보름날뿐이었다.

‘그때도 그냥 소원이나 비는 거지, 만나본다고 하기에는….’

한데 루시페우스의 낯이 너무도 진지하여, 그게 어떤 은유나 농담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얼떨떨한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 무의식중이나 꿈에서도… 말씀이시죠.”

으응, 나는 고개를 살며시 떨구었다.

내 답의 진위를 가늠하려는 듯, 루시페우스는 여전히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짧은 탐색이 끝난 뒤.

루시페우스의 입가에 다시금 엷은 미소가 걸렸다. 그건 조금 씁쓸해 보이기도, 추억에 잠긴 듯해 보이기도 했다.

“허무맹랑하게 들리시겠지만….”

거기까지 말한 그는 시선을 내 발치로 떨구었다. 그가 양손을 모아 내 발을 덮고 있는 곳이었다.

그의 초조함을 반영한 듯, 그의 손끝이 내 발을 꾸욱 꾹 쓸었다. 신성력을 썼는지 간만에 신은 구두 때문에 욱신거리던 것이 사그라들었다.

“저는… 지금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뭐라고?

나는 얼굴에 넣어두었던 표정을 온통 잃고 말았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어째선지 제 이전 생에 대해서 온전히 알고 계시더군요.”

“내가…?”

내가 잘 알고 있는 그의 삶이라고 하면, 그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전생에서 읽은 책 속 이야기…였는데.

내 얼떨떨한 낯을 그저 그의 이야기가 당황스러워서인 걸로 생각했는지, 루시페우스는 쓰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아시는 저는 레이디 아멜리를 따라다니는 무뢰한이지 않았습니까.”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러니까, 정말로… 원작이, 루시페우스의 전생이라고?

“전하께서는 아시겠지요. 그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비참한 삶이었는지….”

그 이야기가 지금의 그의 삶이라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쉽게 긍정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말하는 비루함과 비참함이란 내가 알고도 내버려둔 것에 기인해서….

“제게 이번 생을 준 건 달의 신이었습니다. 그걸 세르니타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기억해낼 수 있었고요. 그리고 저는, 이번 생의 저는….”

루시페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낯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가득 찬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경애였다.

“전하께서 계셔서, 저는 평생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런 눈빛을 받을 자격이….

“이리 말하면 음침하다고 여기실 걸 알아 절대 말씀드리기 싫었지만….”

그리 말한 루시페우스가 괴로운 낯으로 웃었다. 그의 눈시울에는 또 뜨거운 것이 고였다.

“저를 믿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째서인지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밤마다 전하께서 찾아와 주셨던 것 같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뭐?

온몸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걸… 알아?

“제가 외로워서 울던 밤이면, 그때마다 전하께서 제 머리맡을 지켜 주셨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방관한 걸 다 안다고?

“그래서 처음 저잣거리에서 뵈었을 때도 낯설지 않았고요….”

네가 어디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내가 인지하고 있던 걸… 안다고?

“그런 전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전 생과 똑같이 비루하게 살고 말았을 테지요.”

머리가 윙윙 울리며, 눈앞에 그의 상이 흐릿해졌다. 그의 입에 걸린 건 미소… 같았지만.

“그러니까, 절대로 제 마음은 변덕 같은 게 아닙니다.”

그의 절절한 고백이 내 목을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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