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39화 (139/220)

139화. 그 연심의 쓸모 (11)

“그러지 마세요. 전하를 위해 제 오라비를 낫게 해주신 게 어찌나 가상해요?”

스칼렛은 여전히 느물거렸다. 나는 눈을 슬며시 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무 언질도 못 받으셨어요?”

“내가 왜?”

“…그만 좀 받아주세요. 저리 노력하시는데….”

“영애.”

듣다못한 나는 스칼렛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세실리아의 얼굴을 한껏 활용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암조 기사들이 내 말에 토 달지 못하게 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선은 넘지 말자.”

“어머.”

한데 스칼렛은 당황하기는커녕, 흥미롭다는 낯으로 부채만 살랑일 뿐이었다.

…허물없는 거 좋은데, 싫다….

“네에, 아무튼 루시페우스 경이 소후작을 낫게 해준 건 사실이에요.”

“그걸 영애가 어찌 알아?”

“…본인이 그렇다고 했으니까요?”

그리 말하며, 스칼렛은 어느새 접은 부채의 끝으로 어느 한쪽을 콕콕 가리키는 것이었다.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그편에 루시페우스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소후작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파게끔 하려는 것 같았어요.”

“…….”

“그러니까, 절 도와주겠다고 했다고요.”

전하를 위해서 말이에요. 스칼렛이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곧, 신경 안 쓰셔도 되게 하겠습니다.”

지난주, 안전 가옥에서 만난 그는 무언가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말했다.

온실에서 회복하고서 내게 제 마음을 털어놓을 때의 그는, 어떤 짐을 벗은 듯 개운한 기색이었다.

한데 이제는 꽤나 결의에 찬 것처럼 구는 것이 아닌가.

나는 루시페우스의 그런 모습을 몰랐다.

그는 늘 조용했고, 감정을 절제했다. 원작의 그는 아멜리에게 집착할 때조차 차갑고 미지근한 불꽃 같았고, 그 성격이 지금이라고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이 또한 내게는 하나의 불확실성이었다. 와인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칼렛은 내 낯을 찬찬히 살피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켰다.

“사이좋게 지내세요, 네?”

괴상한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스칼렛은 또래 영애들 무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내 관자놀이가 따가웠다.

루시페우스가 있는 방향에서였다.

‘윌로우를 루시페우스가 풀어줬다니…. 귀족파의 실권을 잡는 게 목표인 알비누스 후작이 그러라고 했을 것 같진 않은데. 후작 부자랑 내내 떨어져 있는 걸 보면 정말 사이가 틀어졌나….’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그의 시선이 오늘 연회 내내 나를 따라다닌 차였다. 언제고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것이 더 노골적이었다.

‘이미 소문 다 났다 이건가….’

그래서인지 종일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수군대는 목소리가 높았다.

심지어 내가 막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했을 땐 다들 루시페우스를 흘끗대느라 눈동자 구르는 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다.

막심은 루시페우스가 무서워 죽겠다고 엄살까지 부렸고….

‘…오래 있으면 안 되겠어.’

그러잖으면 또 어떤 일이 터질지 몰랐다. 그리 다짐하며, 내가 암조 기사들의 위치를 확인하려 할 때였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어떤 일, 터져버렸네.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느끼한 목소리…. 도미닉이었다.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만…. 그 드레스에는 그린 다이아몬드로 된 목걸이가 참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요.”

“추천 고마워. 비슷한 게 있나, 내 시녀들에게 한번 찾아보라고 할게.”

그의 선물을 잊었다는 식으로 답하자 도미닉의 턱이 불거졌다. 동시에 제 협박도 무시당한 셈이라 머리를 굴리는지 눈매도 가늘어졌다.

한편으로는 한층 날카로워진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관자놀이에서 따끔거렸다.

아, 정말 빨리 돌아가야지….

“…혹시, 제 동생에게 헛바람을 넣으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뭐?”

“어째서인지 가출을 하려는 것 같던데….”

그리 느릿하게 말하는 도미닉은 내 낯에 피어오르는 기색을 감지하려는 듯 눈매를 한층 더 좁혔다.

가출?

나는 절로 루시페우스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부여잡았다.

‘어쩐지 도미닉이 내 체질을 안다는 얘길 듣고서 화난 기색이더라니….’

그걸 계기로 그가 어떠한 마음을 먹고 만 것 같은데, 알비누스와의 불화는… 너무도 본격적인 일이었다.

그 또한 불확실성….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와인 잔을 꼭 잡으며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알비누스는… 집안일에 대해서까지 황실에 일일이 상의하나?”

내 에두른 빈정거림에 도미닉의 턱이 불거졌다.

“알비누스 형제의 우애에 관해서는 내가 목격한 바가 있는데…. 거기에 내가 낄 자리가 있는지 모르겠는걸.”

너네 원래 사이 안 좋은 걸 갖고 왜 나한테 그래?

기실 도미닉의 추측은 정확한 것이었지만, 그걸 확인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미닉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해질 무렵이었다.

“영식. 오랜만이야?”

이번에는 건들거리는 목소리의 등장이었다. 황녀가 무슨 동네북도 아니고, 나 참.

내가 눈동자만 굴려 올려다보자, 윌로우 놈이 도미닉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나한테 인사 안 한다 이거지? 진짜 못 배워먹은 티 난다. 나한테 복수한답시고 이런 무례를 저지르나.’

내가 나설 것도 없이, 그의 무례에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늘의 호위인 데릭이 그를 경계하면서도 비웃는 소리가 났다.

나는 스파클링 와인을 다시금 반의반 모금 홀짝이며, 여유롭게 그들을 살폈다.

윌로우의 등장에 도미닉은 뻣뻣하게 굳은 채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주눅 들어 있던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것이 또 한심해서 나는 와인 잔 너머로 작게 조소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정말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그랬나?”

“…영명하시다고 소문나신 전하께서 기억 못 하실 것도 아니고.”

어쭈, 루시페우스에게 혼쭐나서 넉 달을 앓아누웠다 온 주제에 아직도 입이 살아 있었다.

체구는 왜소해져 있었지만, 기분 나쁘게 번들거리는 황갈색 눈동자는 여전했다.

게다가 그새 취했는지, 불콰히 달아오른 낯빛…. 어휴.

“어쨌건, 다시 뵈니 좋군요. 그사이 제 동생하고 꽤 친해지신 것 같던데….”

아하.

렌틸 자작이 등장한 건으로 이제야 스칼렛을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누가 귀띔해준 건지 눈치도 좋네. 자작이 내 스승이니 나와의 연결 고리도 있을 거라고 지적했겠지.’

윌로우 놈에게 그런 눈치가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스칼렛과 내가 교류한 세월이 몇 년인데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수준이니….

“그리고, 도미닉 경하고도 친분이 생기셨을 줄은….”

“…아, 하하.”

도미닉이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어쨌든, 윌로우 놈이 나를 후작 부인 삼네 어쩌네 할 때 묵인하던 귀족파 불량 청소년 중 하나가 도미닉이었던 것이다.

‘알비누스가 궁극적으로 게이블스를 끌어내리려 한다지만, 해결사 역할을 하던 루시페우스랑 사이가 벌어진 게 맞는다면… 당장에 수단이 사라졌으니 눈치를 보는 거겠지. 마검사까지 데려와 놓고서 자신 없이 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두 사내를 살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였다.

“제,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새로운 목소리가 이쪽에 끼어들었다. 잔뜩 긴장한 낯의 아멜리였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외람되오나 제가 내일 먼 길을 떠나는지라, 먼저 자리를 떠나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리 말하며 깍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아멜리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그 영애가 이제, 힐베르크… 소후작이라니.”

윌로우 놈이 눈동자를 희번덕이며 아멜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멜리에게 껄떡대 보려다가 레오폴트 때문에 못 다가선 게 마지막 일인데, 그사이 그녀에게 후작 친부도 생기고 소공작 애인도 생겼으니 고까운 모양이었다.

나는 남몰래 고소한 마음을 삼키고서 두 사내에게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럼 경들, 이만 자리를 비켜주겠어?”

“…예. 그럼 이만.”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나는 떨떠름한 낯으로 떠나가는 두 사내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아멜리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루시페우스가 안심했는지, 내내 따끔거리던 관자놀이가 조금 평온해졌다.

“영애, 고마워. 타이밍이 좋았어.”

그러니까, 아멜리는 내가 두 사내에게 시달리는 걸 구해주고자 귀여운 오지랖을 부린 거였다.

“눈치채셨어요?”

아멜리가 배시시 웃었다.

몇 달 전, 데뷔탕트 무도회에 엄마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던 아멜리에게서는 촌티 비스름한 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헨리에테가 사교계의 인맥을 활용해 구해준 솜씨 좋은 하녀가 머리칼을 세련되게 단장해 주었고, 레오폴트가 공작 부인의 단골 의상실에서 기품과 사랑스러움을 다 잡은 드레스를 맞춰준 듯했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어울리는 청남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아멜리의 자태를 흐뭇한 낯으로 감상했다.

“이젠… 힐베르크 소후작이라고 해야 하나?”

“저, 전하, 그게….”

아멜리의 낯이 대번에 달아올랐다.

그래, 드디어, 힐베르크 후작이 성상을 갖고서 제 모든 권리를 찾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힐베르크 후작 또한 당당하게 원로원 의회에 참석했고, 아멜리도 정식으로 힐베르크에 입적된 참이었다.

때문에 알비누스를 비롯한 귀족파들이 초조해하는 게 다 느껴졌다.

“이번에 로즈버리 다녀오고서, 그때 제대로 다시 인사드릴게요.”

“응응, 그래. 힐베르크 쪽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는 로즈버리에 해뒀지?”

“네에, 사실 가족들이 오늘 연회에 축하해주러 오기로 했었는데….”

아멜리의 낯이 어두워졌다.

로즈버리 남작이 사고를 당한 게 벌써 보름 전의 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로즈버리로 달려가고 싶었겠으나, 오늘 힐베르크 후작의 친딸로 데뷔할 예정이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괜찮을 거야. 나도 케인에게 보고받는 게 있는데, 큰 부상 아니라고 했어.”

“네, 그렇지만….”

“응응, 걱정되는 마음은 당연하겠지만.”

귀족파가 고용한 인부들은 케인과 로즈버리 자경대에게 번번이 저지당하다가, 밤을 틈타 몰래 탄광을 폭파했다. 그 때문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났고, 거기에 로즈버리 남작이 휘말린 거였다.

남작의 부상은 단순한 골절상.

원작에서는 인부들이 아무 방해 없이 갱도를 폭파하는 바람에 산사태가 일어나,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걸 생각하면 퍽 나아진 일이었다.

어쨌든, 케인이 파견 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개입한 것이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서.

…그렇다 해도, 다른 것까지 방심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아멜리와 인사를 나눈 나는 그길로 연회장에서 빠져나왔다.

렌틸 자작도, 힐베르크 후작도 저마다의 사연으로 주목받으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아멜리 역시 힐베르크 소후작으로서 여러 유력 가문의 가주들과 인사를 나눴다.

딱 이 정도면 족했다.

나를 사랑해준 황실을 위해, 이 세계를 더욱 안전히 지키기 위해 한 이 정도의 변화면 충분했다.

‘잘되고 있어.’

나는 프리지어궁으로 이어지는 대연회장의 후원을 걸으며, 긍정적인 것만 골라 만족감에 젖었다.

찌르르 찌르르, 계절은 어느새 초가을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달빛이 내려앉은 후원 곳곳에서 풀벌레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시페우스는….’

내가 결국 도망치듯이 연회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원인인 그 남자는. 무언가 작정한 것처럼 내게 눈빛을 보내던 그 남자는….

“하아….”

한숨이 밤하늘에 녹아들었다.

“전하.”

그때, 나를 호위하던 데릭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그분께서.”

그분, 그 한마디에 심장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

내가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마치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서….

‘따라오고 있다는 거겠지.’

사실 짐작 못 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연회장을 나설 때까지 그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발걸음만 재촉했다. 할 말도 없고, 무슨 말이라도 했다가는 그에게 휘말리고 말 것 같았다.

무시하는 게 답이었다.

데릭 역시 더는 채근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암조 애들 사이에 소문이 빠른 게 이럴 땐 도움이 되네….’

나는 쓰게 웃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데릭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인 게, 그가 계속 따라오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프리지어궁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경!”

데릭이 놀란 소리를 내었다.

어느새 루시페우스가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황궁에서 감히, 대놓고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뭐 하는 짓이지?”

대꾸 없이 그가 몇 걸음 내딛자, 어느새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낯은 꽤 흐트러져 있었다.

손끝에서 심장이 울렸다.

입 안에서 말을 고르는 듯, 한참 주저하던 끝에… 그는 자백하듯이 말을 뱉었다.

“…이젠, 다 솔직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