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38화 (138/220)

138화. 그 연심의 쓸모 (10)

“으, 으… 으으….”

저항하듯 후작의 턱이 삐그덕거렸다.

루시페우스가 손에 마력을 더 실었다. 후작의 검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후작의 잇새로 일그러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관 킬리온…. 황녀의 세례…를 목격한… 자들이 금언… 서약하는 걸 엿들었…다고….”

신관 킬리온?

후작에게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신관이라면….

“이건…. 혹시 아이가 세례를 안 받았습니까?”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따금 후작저를 드나드는 신관이 있었다.

신성력도 꽤나 강력하여, 어린 루시페우스가 신성력과 마력을 모두 과다하게 타고났음을 진단한 이였다.

‘그 정도의 신성력이면 교단에서도 꽤 세가 클 건데, 이상하게도 후작에게 쩔쩔매는 자였지….’

지난 생에건 이번 생에건, 어렸을 때부터 후작저를 드나든 손님.

그에 대한 정보는 딱 그 정도인지라 그 낯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원하던 답을 들은 그는 제가 무엇을 물었는지에 대한 후작의 기억을 삭제하고서 모든 마법을 풀었다.

“윽, 컥…!”

“아, 아버지?”

제가 뭘 당한 줄도 모르는 후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제 아비의 낯빛이 거무죽죽해져 있어, 도미닉은 루시페우스가 마법을 썼음을 알았다. 그는 루시페우스와 가슴팍이 맞닿을 듯 다가서며 눈을 부라렸다.

“너, 이 새끼…! 무슨 짓을!”

“…….”

한데 루시페우스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저 건방진 악마의 자식은 어린 시절부터 제가 괴롭히면, 애써 참아준다는 듯한 낯을 짓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지금 그의 낯에는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저 한랭한 낯.

도미닉은 씨근덕거리며 눈을 홉뜨고 루시페우스를 노려보았다. 품을 뒤지는 손짓이 더욱 부산스러워졌다.

도미닉의 갈급한 기색과 달리 루시페우스는 무심한 낯으로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을 굴렸다.

‘이전 생에도 이자가 마도 기계를 썼던 걸까. 그랬는데 내가 끝까지 후작의 개로 남았기에 알 일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뭔가 달라진 걸까…. 그땐 그분께서 안 계셨으니 부마 타령도 없었겠지만….’

그때였다. 마도 기계가 없는지, 도미닉이 후작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수석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 은혜도 모르는…!”

그러나 그 손은 루시페우스의 코웃음과 함께 간단히 막히고 말았다.

“…윽!”

도미닉은 팔을 높이 뻗쳐 든 채 그대로 굳어 있게 되었다. 바들바들바들, 별반 단련하지 않은 팔로 아기 머리통만 한 수석을 들고 있자니 팔이 마비될 듯 떨렸다.

“분수도 모르고…! 윽.”

후작이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그는 무형의 장벽에 부딪혀 의자 위로 다시 자빠지고 말았다.

이내 루시페우스가 읊조렸다.

“거래를 파기합니다.”

상황이 자아내는 기괴함 때문에 그 목소리는 음산하게 울렸다.

“…뭐?”

“수정은 그만 모으시죠. 거사도 취소입니다. 그간 해드린 일은 키워주신 데 대한 보답이라고 치겠습니다.”

보통 아이가 자라는 데 어른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그리고 제가 받은 대우가 거기에 어찌나 못 미치는지… 정확한 내역을 그가 알 수는 없었지만.

“선대 후작님의 친자가 아니신 것.”

꼭꼭 씹어 내뱉는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로도 시뻘겋게 빛났다.

“…알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신전에 발고하지 않겠습니다. 피차 갈 길 가시죠.”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거나, 제 복수가 실은 더 거창한 것이었음을 그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곧바로 루시페우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누, 누구냐…!”

“오랜만입니다, 소후작.”

“너 이 새끼…!”

그길로 루시페우스가 향한 곳은 게이블스 후작저의 별채였다. 불미스러운 일로 앓아누운 윌로우는 그 상태를 숨기기 위해 거기에 홀로 머무르고 있었다.

비쩍 쪼그라든 낯의 윌로우는 루시페우스를 보자마자 악을 썼다.

“거기! 밖에 누구 없냐! 이 새끼를 당장…!”

루시페우스는 작게 코웃음 치며 결계를 쳤다. 그의 악다구니는 방 밖을 나가지 못할 것이고, 근처에 오려는 자가 있다면 그대로 잠들게 될 거였다.

“여전히 기운차십니다.”

“뭐, 뭐 하러 왔어!”

몇 달을 침상에서 움직이지 못해 근육이 다 빠진 윌로우는 참 보잘것없었다.

루시페우스의 눈에 그가 한심해 보이지 않은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게 간단히 제압된 게 벌써 두 번인데,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아니, 너무 오래전이라 잊었나….’

짤막한 조소와 함께 루시페우스는 팔짱을 끼며 벽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윌로우의 눈에 핏발이 섰다.

“너 때문에 내가! 어? 당장 풀어, 당장!”

윌로우에게 걸린 결박 마법은 관절을 움직일 수 없게 하는 것으로, 루시페우스가 스스로 개발한 것이었다.

수년 전, 세실리아에게 감히 무력을 쓴 그를 벌하고자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마법.

유사한 효과를 내는 마법조차 마탑에 등록된 적이 없어 신관들이 중화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다시는 그 더러운 몸뚱이를 세실리아 근처에조차 두지 못하도록, 루시페우스는 그 마법이 풀리는 일이 없게끔 계속하여 마력을 주입해왔다.

아닌 척 눈속임하기 위해 조금씩 상태를 호전시키기야 했지만….

스칼렛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여길 만큼 간단한 움직임은 취할 수 있었지만, 윌로우는 어눌한 꼴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 늘 침상에 머물렀다.

그 모든 것에 대한 한심함을 숨기고,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좌우 대칭 완벽한 호선을 그렸다.

“소후작. 이제 가을입니다.”

“누가 날짜를 물어봤어!”

숫제 시뻘게진 낯에 목이며 관자놀이의 핏줄이 두드러졌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눈알이 아리리만치 눈을 부릅뜨는 것밖에 없었다.

“그대의 고모가 원로원에 진출하려는 것, 알고 있습니까.”

“내게 고모가 어딨… 엇.”

멍청한 자 같으니. 고모의 존재가 게이블스들 사이에서 이야기된 지 오래되어, 가문의 계보도에 어엿이 자리한 안네마리라는 이름을 잊은 거였다.

“그 고모님께서 소후작의 누이를 퍽 귀애하시는 것 같던데….”

“헹! 같은 계집끼리 정붙였나 보지!”

제 누이가 남자로만 태어났어도 제가 소후작 소리를 들을 일은 없었을 것을 모르는 머저리였다.

“내가 몸만 멀쩡했어도, 스칼렛 그 계집애를…! 어라?”

종종 그랬듯 제 누이의 목을 쥐어흔드는 상상을 하던 그의 손이, 별안간 큰 움직임을 이뤘다.

평소였으면 좀 부들대다 말았을 일인데…?

“어어?”

윌로우는 얼떨떨한 낯으로 제 팔을 들어 보였다. 허공에 들어 올려진 팔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그간 소후작이 안 계셔서 귀족파 영식들의 결속력이 개판 났지요. 소후작의 소중함을 다들 되새겼습니다.”

루시페우스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내내, 윌로우는 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볼 따름이었다. 다리를 들어 보고, 손을 꿈지럭대 보고, 고개를 돌려 보고….

이게 다 되네? 움직이네?

때꾼하게 가라앉았던 윌로우의 눈에 기묘한 이채가 돌았다.

“오랜만에 움직이시자면 좀 힘드실 테니.”

루시페우스의 손이 움직여 몇 가지 마법을 걸었다. 그 효과로 이제 윌로우는 몇 달간 쓰지 않았던 근육을 남들처럼 움직일 수 있을 거였다.

마법의 효능에 기대어 제 몸 상태도 모른 채 잔뜩 무리하도록. 미련한 그의 성정에 기댄 속임수였다.

“으, 으하하! 으하하하!”

병상에서 내려앉아 바닥을 굴러보는 윌로우의 낯이 귀기 어린 희열로 번득였다. 루시페우스는 잔뜩 비틀어진 입매로 그걸 내려다보았다.

“다음 주 원로원 개회 연회.”

“이 자식, 내가 고마워할 줄 알고!”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으하하! 잭! 퍼시! 나 다 나았어!”

제 수족들의 이름을 외치며, 윌로우는 별 의심도 없이 방에서 뛰쳐나갔다.

그가 빠져나간 방 안에 남은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윌로우를 부추기기 위해 짓던 미소와는 판연히 다른, 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미소였다.

‘모두 다, 그녀의 뜻대로….’

모든 걸 다 아시는 제 작은 빛께선 너무도 옳으셨다. 저런 단세포 얼간이가 귀족파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는 건 그녀의 나라에 위험한 일이었다.

그대로 그는 허공에 빛무리로 이뤄진 글씨를 썼다.

「그간 도와주신 데 대한 보답으로 레이디의 뛰어남에 대한 반례가 될 자를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시기를.」

스칼렛 게이블스는 렌틸 자작과 게이블스의 가신들, 그리고 게이블스의 사업에 투자한 가문들의 지지를 얻는 것만으로도 가주의 자리를 쟁취할 것이다.

하지만 후작가 내부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선, 후작이 믿어 마지않는 아드님이 스스로 실책을 저질러 주시는 편이 좋겠지.

‘진작부터 이랬어야 하는 건데.’

작은 빛께서 저를 믿어주시길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도움이 될 걸 알아서 하고, 그다음에 믿음을 간구하면 된다.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가 제가 한 일을 칭찬해 주십사 매달리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으나….

알비누스도 아닌 알비누스들에게 의심을 안 사겠답시고 어영부영 허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마지막 번민마저, 그들이 직접 끊어내 준 셈이지.’

루시페우스는 입꼬리에 자조를 매단 채 빛무리로 된 글씨를 쳤다. 사라진 글씨는 이 시간이면 혼자만의 티타임을 즐기는 스칼렛의 찻잔에 떠오를 거였다.

원로원 하반기 의회의 개회를 기념하는 황실 연회.

나는 흡족한 낯으로 내가 만들어낸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전 대성공이야.’

겉으로는 여느 때처럼 순진해 보이는 미소를 띤 채, 속으로는 신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내 시선의 끝에 바싹 언 게이블스 후작의 낯이 걸렸다.

‘고소해라. 좋은 안주네.’

그러면서 홀짝, 손에 쥔 스파클링 와인을 반의반 모금 머금었다.

낮에 열린 하반기 첫 의회에서 렌틸 자작은 20여 년 전 포기한 게이블스의 성을 되찾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껏 학자의 탑에 들어갔던 이가 가문에 대한 권리를 회복한 전례가 없어서, 꽤나 논란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가문을 포기했던 렌틸 자작의 복귀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저, 저, 저, 제 딸 보는 눈빛이.’

게이블스 후작의 구겨진 낯은 무시로 제 딸을 향했다. 스칼렛은 여느 때처럼 젊은이들의 한가운데서 사교계의 일인자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게 달리 보일 거였다.

스칼렛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한대도, 렌틸 자작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하니까.

“제가 게이블스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려면 그것을 왜 포기했는지부터 이야기해야 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게이블스와 이해관계가 얽힌 가문들이 게이블스의 후계 선정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전혀 흐뭇하지 않은 광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필 이번에 깨어날 게 뭐야. 뭘 알고 온 것처럼.’

귀족파 망나니들과 어울리고 있는 윌로우 게이블스였다.

‘몇 달 동안 누워만 있고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가, 말라서 완전 다른 사람 같네.’

제 무리와 저열하게 킬킬대는 표정이나 건들대는 몸짓은 누가 봐도 윌로우 놈 그대로였지만.

며칠 전, 게이블스를 담당하는 엘런이 갑자기 윌로우 놈이 나아서는 망아지처럼 뛰어다닌다고 하기에 어찌나 놀랐던지.

‘망아지는 무슨. 미친 말이지.’

나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복잡한 심사를 다스렸다. 그가 지금 복귀한 것이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지만…. 나의 유능한 친구와 스승이 알아서 잘할 거였다.

줄 도움은 대강 다 줬으니까.

‘내 일만 아니면 이렇게 안심이 되는데….’

그리 생각하며 내가 와인 잔에 입을 묻을 때였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전하. 제 오라비가 나타나서 깜짝 놀라셨지요?”

어느새 스칼렛이 내게 다가와 있었다. 오늘도 듣는 귀를 의식하여 주변을 다 물려둔 채였다.

“지지자들 모아놓고 유세하더니 여기 올 짬도 나나 봐?”

“전하께도 유세하려고요.”

그리 말한 스칼렛은 과장하여 허리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그러고는 그대로 내 귓가에 속삭여서 한다는 말이….

“제 오라비를 낫게 해준 건 전하를 연모하는 신사님이랍니다.”

“뭐?”

스칼렛이 은근하게 윌로우의 뒤편을 턱짓했다. 루시페우스가 윌로우를 주시하며 위스키를 홀짝이는 모습….

‘오늘은 절대 안 보려고 했는데…!’

스칼렛의 꾐에 빠져 나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을 던진 순간. 그걸 눈치챘는지,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나는 눈을 돌릴 시간도 모자라 재빨리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어머. 또 싸우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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