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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37화 (137/220)

137화. 그 연심의 쓸모 (9)

연심이라….

그는 세실리아에게 제 마음을 비치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만남을 청하고, 제 낯을 들여다봐 주시기를 청하고, 제 쓸모를 고민해 주시기를 청하고….

“…제가 전하를 연모함이 전하께서 제게 곁을 내어주셔야 한다는 이유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그건 일종의 변명이었다.

그러잖으면 세실리아의 앞에 번번이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제가 세실리아의 마음에 제 존재를 심기를 바랐음을 뒤늦게야 인정했다.

달의 신과의 일을 알게 된 뒤.

제 마음을 바꾸어 죽지 않고, 세실리아를 위해 살아가리라 새로이 결심한 그 순간.

그때는 제 연심을 고백한다는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실상 제 마음을 연심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제가 세실리아를 연모한다고 생각한 적도, 딱히 없었다.

그저 세실리아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다칠 일 없었으면 했고.

늘 편안한 곳에서 늘 그래왔듯 앞으로도 아름답기를 바랐고.

험한 것은 보지도 겪지도 않고, 인상 찌푸리지도 않고, 그 능청스러운 연기 같은 걸 원하는 만큼 계속하고, 모두에게 다정을 나누고, 만인의 사랑을 받고, 그리고 기왕이면….

…제 존재를 기억해 주시면 좋겠고.

조금 더 바라자면 제게도 미소 한번 보여주시고, 또 이따금 시간을 나눠주시길 바랐다.

거기에 또 욕심내자면, 가끔 저를 떠올려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을 거였다. 제가 생각하는 반의반의 반만큼이라도….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그 모든 감상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사람들이 감정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수많은 단어 중 가장 흡사한 것이 ‘연심’일 뿐이었다.

그래, 분류하고 보니 제가 세실리아를 연모하는 거였다.

그 단어에 제 마음을 가둬두고 싶지 않았으나, 이보다 더 어울리는 다른 말은 없었다.

그러니 그걸 털어놓을 생각 역시, 당연히 없었다.

한데….

“평생을 통틀어 제가 연모해온 이는 레이디 작은 별, 당신뿐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털어놓은 뒤였다.

뭐가 그리도 갈급했을까. 뭐가 그렇게 조급했을까.

그는 그것을 오래 후회하며 자책했다.

그 다정한 분이시라면, 제가 한 말 따위 흘려 넘기지도 못하시고 끙끙 고민하실 텐데.

애초에 무슨 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그 일을 언급하는 것조차 실례라 생각하여, 그는 이후로 제 마음의 아주 작은 부분이나 간신히 짜낼 뿐이었다.

뵙고 싶었습니다. 딱 그 정도.

다른 많은 바람은 차마 상상조차 되지 못했다.

한데 연심이라는 건 이상했다.

자꾸만 맥락도 없이 가닿고 싶게 만들었고, 저와 거리 두기를 원하시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게 했다.

“저와 움직이셨으면 안전하셨을 텐데요. 생각보다 제 쓸모가 꽤 많은데….”

부담이 안 되기를 바라 ‘쓸모’라는 허울 좋은 말을 껴 넣어보았고.

“그럼, 바쁘신데 이만. 잠시라도 뵈어서 좋았습니다.”

애써 담백한 척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게 억지였음을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연심이 이런 것임을 진즉에 알았다면, 지난 생에 제가 겪었던 것이 연심이 아니었음을 알았더라면, 그 삶이 조금은 덜 비참했을지도….

‘아니, 그리 끝난 게 다행이지.’

덕분에 달의 신의 안배로 세실리아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달의 신이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황성 사람들 모두가 그의 연심을 읊기 시작한 것이었다.

‘스칼렛 게이블스인가?’

그녀는 연심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아는 듯했고, 제 마음을 퍽 정확히 짐작하고는 도와주려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하지만 스칼렛의 권유로 프리지어궁의 다과회에 방문했을 때.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응, 좋은 오후야.”

제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인사를 받는 세실리아의 옆모습에서, 루시페우스는 낭패감을 느꼈다.

‘…불편하시게 하고 말았군.’

이후에도 스칼렛 게이블스는 뭔가 도움이 돼주려는 양 서신을 보내왔다. 그녀의 제안대로 행동한다면 스칼렛을 게이블스의 가주로 세운다는 세실리아의 야망에 확실히 보탬이 될 터였으나… 루시페우스는 그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세실리아를 부담스럽게 하는 일이니까.

‘이미 나를 곁에 둬주시라 간원한 것부터가 마음에 짐 지워드린 셈이지만….’

그럼에도 렌틸 자작저에 방문하셨을 땐, 성내에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른다는 마음을 핑계 삼아 거기로 향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날까지는, 제 저의를 의심하시면서도 제 이야기를 곧잘 들어 주셨었는데.

그와 세실리아를 엮은 괴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 이후로, 어째서인지 세실리아를 만나볼 수 없었다.

렌틸 자작저와 힐베르크 후작저에 걸어둔 결계를 활용하면 세실리아의 동선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스칼렛 게이블스가 이따금 세실리아의 일정에 대해 알게 되면 편지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세실리아가 황궁 밖으로 외출한다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슬슬 가을 시즌이 시작되니 바깥에는 안 나오시나?’

세실리아는 원래 사교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며칠을 거듭하니 초조해졌다.

그의 마음이 하루를 못 봐 애달픈 것은 아니었다. 그전까지 세실리아와의 만남은 이따금 내리는 단비와도 같은 일이었고, 참고 기다리는 건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요 얼마간 자주 찾아가고 만 탓에, 갈급함이 커지고 말았다.

마침 좋은 구실이 생겼다. 원로원에서 인장 반지를 수령해 나오는 힐베르크 후작을 암살하려던 마검사를 붙잡은 것이다.

근래 들어 안면을 튼 엘런이, 곧 세실리아가 올 테니 인사라도 하고 가라기에 기다렸지만….

“전하, 저, 그분 오셨는데요.”

“막심 경이 뭐래? 그들이 대가로 뭘 받으려던 건지 드디어 털어놨대?”

어째서인지 세실리아가 그를 못 본 척하는 것이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셨을까?

의아하게 생각한 것도 잠시. 그날 이후 세실리아가 수선화궁에조차 걸음 하지 않는 게 아닌가.

마검사들에게 걸어두었던 결박 마법을 풀 때 그들이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게끔 쳐둔 결계가 있어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여 정말로 오랜만에.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세실리아가 기다림을 주문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보낸 적 없던 메시지를 보냈으나… 답이 오는 일은 없었다.

그럴 만했다. 제가 세실리아의 전언을 감히 무시한 적이 있었으니까.

제가 응당 그런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리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지만.

그렇게 시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에스메르 놈들이 꾀를 부리는지, 몸을 사리는 건지. 이번에도 단주랍시고 웬 사내놈을 들이밀더군요.”

“거기 단주가 평민 계집이라고 했지?”

“예에….”

“어떻게든 고분고분 말 듣게 만들어.”

웬일로 알비누스가 도움이 되었다.

제가 알비누스의 일들에서 잠시 손을 뗀 사이, 그녀의 상단과 얽혀준 게 아닌가.

“남작.”

“앗, 작은 도련님. 오랜만에 뵙습니… 윽!”

한번 세실리아를 위해 사람에게 마법을 쓰기 시작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상단주 대리의 뇌리에서 에스메르와의 일을 며칠간 삭제해 두고서, 그 대신 그 자리에 나갔다.

눈빛 한번 받을 수 없음이 그리도 괴로운 일일 줄은 몰랐다.

예전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참았을까.

어린 시절의 온기, 제 작은 빛을 한때의 꿈결로 치부하고서 수년을 묻어두었기에 며칠 정도는 괜찮을 줄로만 알았다.

연심이라는 것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에게 고백한 순간부터 몸집을 거침없이 불리는 것임을… 그는 이제야 처음으로 겪었으니까.

그리하여 세실리아를 십수 일 만에 마주친 오늘.

그는 저도 모르게 제 속내를 다 털어놓고야 말았다.

“전하를 뵐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버티기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습니다….”

뱉고도 놀랐다.

그토록 무책임하게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입에 올릴 줄은, 약속 장소에 가면서도 상상한 적 없었던 것이었다.

번번이 그랬다.

애초에 고백할 일 없던 연심을 읊고.

귀찮게 해드리지 않으려고 했건만… 자칫했다간 저라는 존재를 잊으시는 건 아닐까 싶어 자꾸만 얼굴을 비추게 되고.

자꾸만 떠올리고, 자꾸만 보고 싶고, 자꾸만 닿고 싶어지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이 곤란한 감정….

돌아온 건 책망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나기로 한 상단주 대리는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또 못 오게 된 건가? 경이 뭔가를 해서?”

“아니면 이 자체가 경의 함정이었어?”

“그러면, 또 무슨 핑계가 있는데?”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 세르니타의 별채에서와 같았다.

그 아름다운 낯에 악의 한가득한 미소를 지으신 모습은… 제 잘못으로 인한 거여도 꽤 가슴 아팠다.

그리고….

“그 수정이 어디에 쓰이는데?”

그 질문을 들은 순간, 루시페우스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건, 제 바보 같은 선택으로 인해 꾸미던 괴악한 음모에 쓰일 거였으니까.

고작 저 하나의 완벽한 죽음을 위해 그녀의 나라에 해악을 끼치려던 일이었으니까.

제가 개입하지 않기로 했으니 없게 될 일이지만, 세실리아가 제 허물을 눈치채고 있다는 것 자체로 절망스러웠다.

게다가.

“경도, 말없이 사라졌잖아. 그리고 그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잖아.”

제 잘못은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렸던 것에까지 닿아 있었으니까.

제가 말없이 사라졌던 것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서.

당황한 루시페우스가 어떠한 말도 빚어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세실리아의 낯에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그 자태가 가슴을 죌 듯 안타깝고 처연하여 애써 변명하려던 순간.

“그가 내 체질을 빌미로 나를 협박하더군. 그걸, 경이 가문에 누설하지 않았다는 증거라도 있을까?”

세실리아의 그 한마디에, 그는 교수대에 목매달린 사람의 심정이 되었다.

동시에 가슴에 일고 만 것은 해묵은 분노의 들불이었다.

“내 피앙세께서 뭐, 묻는 것 없으시던?”

“그분의 놀라운 비밀에 관해 이야기 나눈 차였는데.”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그랬던 것인가.

‘도대체 그자가 어떻게….’

루시페우스는 당연히 세실리아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그건 그가 함구하고 말고 선택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코코 에스메르에 대해 침묵하듯 그의 운명처럼 자연스러운 거였다.

제가 빨간 눈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탄로 나는 한이 있어도, 세실리아에 대한 그 무엇도 발설하는 일 없으리라.

그는 간신히 답했다.

“제가 알리지 않았습니다.”

“…….”

“물론 제가 신뢰를 저버렸으니… 믿지 못하신대도 어쩔 수 없지만….”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변명은 졸렬하게만 울렸다. 제가 생각해도 세실리아가 저를 못 믿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같이 뵙기를 청하다가 갑자기 발길을 끊고,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제멋대로 다가가고.

저처럼 이기적인 자를 그녀가 어찌 믿겠는가….

“하지만… 무엇을 염려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간신히 주워섬기면서도, 그는 세실리아가 귀담아들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약속을 저버린 건 매번 저였으니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우선 그는 그걸 직접 확인할 재능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그리 내뱉는 루시페우스의 말소리엔 결기가 실려 있었다.

그간 번민이 길었다. 비겁한 주저함이 끝났으니, 할 일은 명확했다.

“그리고 곧, 신경 안 쓰셔도 되게 하겠습니다.”

“…뭐야!”

세실리아와 헤어진 루시페우스가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후작의 집무실에 들이닥쳤을 때.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이 새끼, 뭐야?”

마침 후작 부자가 한자리에 있었다.

루시페우스는 대꾸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후작은 늘 그를 빛이 들지 않는 문간에 세워두는지라 그 걸음은 정말 낯선 것이었다.

그 기세가 위협적이었다.

“뭐, 뭐야, 이 악마 새끼야…!”

“이, 이 고얀…!”

마도 기계라도 찾는지, 도미닉이 성큼 나서며 허둥지둥 품을 뒤졌다. 후작은 손에 잡히는 걸 아무거나 던지려 했다.

그 모든 것보다 루시페우스가 손을 휘두르는 게 훨씬 더 빨랐고, 어느새 그 공간의 모든 것이 멈췄다.

“제가 그동안 너무 우유부단했습니다.”

“이, 이, 이게…!”

후작과 루시페우스, 단둘을 제외하고.

“너는 지금부터.”

루시페우스의 손이 붉으락푸르락한 채로 멎은 도미닉의 낯을 스쳐, 후작의 이마 앞에서 멎었다.

그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던 그 기나긴 세월의 증오심을 억눌러 손가락 마디마다 힘줄이 불거졌다.

“4황녀의 비밀을 어찌 알게 되었는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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