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 연심의 쓸모 (8)
‘뭐, 뭐야, 갑자기….’
나는 굳혀두었던 낯만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입 안에 만들어 두었던 온갖 가시 돋친 말들은 절로 스러지고 말았다.
‘어울리지 않게….’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멎은 듯했던 심장이, 뒤늦게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일종의 폭탄 발언을 던진 사람치고 그의 낯은 단정했다. 그저 일그러진 미간만이 그가 퍽 동요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억누른 그의 날숨이 바스러졌다.
괜찮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리 물을 뻔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세르니타에서의 일이 떠오르고 말기에….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게 무서웠다.
내가 하거나 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그가 이토록 격하게 반응한다는 게 위태롭게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일인가….’
그건 세실 평생은 물론 ‘나’의 평생에 없던 일이어서, 나는 그런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
응접실 안에 얼마간 침묵만 흘렀다.
그가 제 가슴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말아쥐었다.
“…죄송합니다.”
그 눈썹이 완만하게 내려앉으며, 그의 얼굴이 멀어졌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아, 또….
그는 번번이 그랬던 것처럼 제 마음을 훅 드러냈다가, 허락받지 않은 영역에 들어선 듯 뒷걸음질 치는 것이었다.
마치 내 발코니에 드나들면서도 내 방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내 응접실에 들어왔으면서도 카펫 위에 오르기 주저하던 것처럼.
괜한 감상에 빠져들세라,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나와 만나기로 한 상단주 대리는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또 못 오게 된 건가? 경이 뭔가를 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면 이 자체가 경의 함정이었어?”
“함정이라니…. 아닙니다, 그런 게.”
그는 당혹스러운 낯을 한 채 멀거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가 나와의 추억을 돌이키고 있음이 확연했다.
“역시,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게 없으시죠.”
“물론 전하께선 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리고 그런 건… 다 끝내야만 했다.
‘내가 뭘 잘했다고.’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사랑은, 내가 얼마든지 손댈 수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운명 지어진 이들이니까.
스칼렛의 운명도, 바꿀 수 있었다. 그녀가 그걸 원하니까. 그건 변치 않을 야망이니까.
그 모든 일에 맞물려 운명이 바뀌는 이들의 삶은… 내가 옳게 한 거라고 믿었다.
‘그건 구원일 것이다.’
환생하면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그 말 덕에, 내가 하는 게 어떻게든 옳은 일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거기에 내 욕심을 집어넣는 건, 게다가 운명에 ‘죽음’이 걸려 있는 그가 그 상대라면… 전혀 자신이 없었다.
‘그와 개인적으로 연을 맺기 전에 계산해놓은 대로 움직이는 게 맞는 일이야.’
그러고도 또 어디선가 예측하지 못한 사고가 터질 테니까.
내 노력이 다 허사로 돌아가, 그를 죽게 할 그 끔찍한 현실이 도래할 수도 있으니까.
한편으로… 이는 내 비겁함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대한 계획을 알고 있어.
그리 말하면 간단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어찌 아는지 이야기하려면 해묵은 죄책감을 건드려야만 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음에도, 나를 둘러싼 공고한 세계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내 오랜 친구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지켜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내버려 두었던 그 오랜 시간을.
그 모든 자기혐오를 담아, 나는 위악적인 미소를 만들어냈다. 잔뜩 끌어 올린 한쪽 입꼬리가 바들대었다.
“그러면, 또 무슨 핑계가 있는데?”
“후작의 의지에 따라 상단이 에스메르에게 수정 유통을 떠넘기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전하를 뵙고 싶어서 억지로 만든 일이 아니고…. 아니, 남작을 못 오게 했으니 어느 정도 억지이긴 했지만요. 하지만….”
숫제 변명하듯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기는 그는 퍽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는 말이건 행동이건 넘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늘 정제된 말과 행동을 보였는데.
그래서였을까, 세르니타에서 분노하여 마법을 쓰던 거친 몸짓과 체내의 불안정에 시달리던 그의 위태로운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그 수정이 어디에 쓰이는데?”
“그건….”
루시페우스는 퍽 당황한 듯했다.
마치 내가 왜 마음을 바꿨느냐고 물어봤을 때처럼….
‘너 또한, 그 일을 입에 올릴 수 없는 거지….’
나는 쓰게 웃었다. 그건 나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과 닿아 있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원망할 구실을 찾으려는 내 옹졸함에 대한 자괴감.
그가 뭐라고 변명할세라,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래. 그 수정이 알비누스의 작전에 필요한가 보지. 놀랍지도 않아. 전부터 수정의 유통 양상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역시 전하께서는….”
“아니. 내가 뭐라고 다 알겠어? 나는 내 일을 하는 것뿐이고, 경은 본분대로 경의 가문에 충성해야지.”
“저는 더 이상 가문에….”
“경 때문에 내가 곤란하게 됐어.”
루시페우스가 당치 않다는 듯 대꾸하려던 순간, 나는 다시금 말을 끊었다.
그의 마음이 진득이 묻어나는 말을 들었다가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곤란하셨다면.”
“이르겐트에도 경의 입김이 닿지? 거기서 꽤 소문을 퍼뜨리던데.”
“무얼 말씀하시는지….”
“아니면 황성 주간지 기자를 매수했어? 사교 클럽을 통해 소문도 퍼뜨리고? 경의 그 쓸모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그러니까, 저를 그간 피하신 이유가….”
“꼭 그런 소문 때문만은 아니야.”
나는 그의 변명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애초에 그가 내게 건네려는 말들은 변명이라고 할 수 없는 거였으니까.
변명은 어떤 과오를 해명하기 위함이지만… 그에겐 잘못이 없었다.
잘못한 건 나뿐이니까.
내가 그의 마음을 믿을 생각이 없고, 무려 비겁하기까지 하고, 그에겐 평생을 묻어둔 죄책감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까.
그는 그저, 여느 사람들처럼 행동한 것뿐인데.
“그렇다면 어째서입니까.”
“…….”
“갑자기 프리지어궁에서 나오지도 않으시고, 답도 없으시고, 저를 못 본 체하셔서….”
“내게 그럴 의무가 있나?”
“…….”
“그 이유도, 내가 알려줄 필요가 있어?”
그리 말하면서도 나는 그 모든 미안함에 울 것 같았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억지로 나쁜 말을 뱉는 거였으니까.
울지 않기 위해 나는 더 괴로운 말을 입에 물었다. 내 마음을 무참히 파헤쳐 꺼내고 만, 그에 대한 원망의 말을.
“경도 그랬잖아.”
“그건….”
“경도, 말없이 사라졌잖아.”
“…….”
“그리고 그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잖아.”
그의 낯은 여전히 단정했지만, 나는 그 너머에 크나큰 절망이 깃들었음을 눈치채고 말았다.
그의 안경에, 달빛 아래서 울던 아이의 붉은 눈동자가 비치는 듯했으니까.
그걸 지켜보다 보면 미안하다고, 다 거짓말이라고, 실은 내가 어떤 지고지순한 사랑도 받을 자격 없는 한심한 머저리라서 그렇다고 절절히 쏟아내고 말 것 같아… 나는 아껴온 말을 뱉었다.
“경의 의형을 조심하라고 했지? 그가 내 체질을 빌미로 나를 협박하더군.”
루시페우스의 낯이 살얼음 낀 듯 얼어붙었다. 안경 너머 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암조 기사들이 듣고 있을 거라 에둘러 이야기한 거지만, 그라면 내가 말하는 ‘체질’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들었을 거였다.
“그걸, 경이 누설하지 않았다는 증거라도 있을까?”
그 말을 기어코 내뱉으며, 나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했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를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그가 그러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자네, 그게 사실이야?”
여느 때와 같이 레이븐 백작의 사교 클럽에서 젊은 귀족파 영식들과 회동하고 있을 때였다.
사교 클럽에서의 모임은 본래의 목적이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루시페우스가 후작을 돕는 일에 건성이 되면서 그들과 논할 귀족파의 대의랄 것이 희미해진 것이었다.
하여, 신사들은 사교 클럽에 모였다 하면 가십을 주워섬기기에 바빴다.
“자네가 그, 4황녀 전하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는 것… 말일세.”
어흠, 그리 말하며 레이븐 백작이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모든 신사가 그편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제가, 누구와?”
“구체적으로 말하면, 뭐, 자네가 전하를 연모한다거나.”
“…그분을 연모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기실 사교계에서 4황녀를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8년 전 게이블스와의 혼담이 절대 없으리라 황제가 못 박은 이후, 황성 사교계에 드나드는 또래의 청년들은 모두 한 번쯤 꿈에서 4황녀의 부마가 되었다.
다만 4황녀가 성년이 되고도 사교계 모임에 나타나지 않는 데다 황태자의 정권에서 일하려는지 군부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그녀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이들의 수가 줄어든 것뿐이었다.
로맨스를 꿈꾸기를 그만뒀을 뿐, 제 가문이 가진 것 중 무엇을 지참금으로 바쳐야 황태자에게 잘 보일지 계산하기 시작한 거였지만.
“자네가 전하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걸 보았다는 이가 있어.”
“그래, 내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렌틸 자작의 다과회에 다녀오셨는데 자네가 전하께 대단한 선물을 바쳤다던데.”
“맞아요, 프리지어궁 다과회에도 가셨다면서요? 제 누이가 거기 단골인데 경의 눈에 꿀이랬나, 설탕물이랬나. 하여간 뭐가 발려 있었다던데.”
“영식이 새벽부터 전하를 기다리는 걸 봤다는 소리도 들었소. 내 하인의 고모의 옆집 사람이 수선화궁 시종인데….”
기다렸다는 듯 신사들이 저마다 입을 대었다.
그들은 귀족파의 큰손인 알비누스의 책략가와 퍽 성실한 동료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의 쌀쌀한 성미 덕에 지금껏 친근히 말 붙일 일이 없었더랬다.
하지만 저 냉혈해 보이는 자도 결국엔 인간이어서, 막내 황녀님을 연모하는 게지.
아카데미 시절 그를 예사로 무시하던 것은 잊고, 그저 훌륭히 자라난 그의 근사한 외관만 놓고서 그를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전하를 연모한다고.”
“전하께서도 자네만 특별히 받아주시는 것 같다고.”
“그래. 자네의 형님만 해도 아주 매몰차게 거절하시지 않던가.”
“알제니아의 피크닉에서도 자네가 모셨다며?”
“오죽했으면 자네를 전하의 보좌관으로 임명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니까.”
루시페우스는 신사들의 말소리가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감히 내가, 전하와?’
상황은 더욱 기묘하게 흘러갔다.
다른 사교 클럽에서는 왕왕, 그와 세실리아의 사이를 두고서 내기가 벌어진다고 했다.
그 양상이 마치 지난 생에 그가 스칼렛 게이블스를 축출하기 위해 했던 일과 흡사하여, 그는 한편으로 심히 당황하였다.
“내가 경이 부마가 된다는 쪽에 금화를 열 개 걸었으니, 분발 좀 해줘?”
“경! 내 누이를 소개해줄까? 감히 4황녀 전하께 댈 미색은 아니지만, 같은 정파끼리 혼인해야 여러모로 뒤탈이 없지 않겠어?”
“에헤이, 자네. 그 알량한 금화 몇 개가 루시페우스 경의 연심보다 더 중한가?”
“무슨 소리야? 황실에서는 게이블스도 거절하는데 다른 가문이 가당키나 하겠어? 내가 다 우리 루시페우스 경 마음에 상처 입지 말라고.”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들이 제멋대로 짖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거기서 유일하게 맞는 게 있다면….’
제가 세실리아를 연모한다는 사실. 단 하나일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