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그 연심의 쓸모 (7)
이윽고 황성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4황녀가 새로운 호위 기사로 알비누스의 둘째를 뽑았다거나, 알비누스의 검은 신사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4황녀 곁으로 가야 한다거나, 뭐 그런….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내 곁을 맴도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다과회 때 리피샤 쿠첼의 눈빛을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아니, 알제니아 피크닉에 황성 주간지 발행인의 영애가 온 것부터가 문제였는지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황성 주간지의 이니셜 기사를 통해, 가을 시즌의 사교계를 준비하는 아녀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황성 전역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급기야는….
“사교 클럽에서 내기들을 한다고? 미친 거 아냐?”
“…에에, 뭐,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라고는 말할 수는 없잖아요.”
간만에 엘런이 심드렁한 말투로 웅얼거렸다.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기는!”
나는 비명처럼 내뱉고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헨리에테가 눈치 좋게 두통약을 내 찻잔 받침에 올려두었다.
‘이거, 루시페우스가 원작에서 스칼렛을 축출하겠다고 했던 짓이랑 똑같은데….’
여론을 몰기 위해 황성 주간지에 이니셜 기사를 내보내고, 사교 클럽을 통해 소문을 퍼뜨리는 것 말이다.
그 수가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게 귀족파 다른 누구도 할 수 있으리만치.
그가 스칼렛을 몰아내기 위해 한 일 중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정신계 마법을 걸어 스스로 악행을 자백하게 한 일뿐이었으니까.
‘거기엔 스칼렛이 한 일이 아닌 것까지 말하게 시켰다는 암시도 있었고….’
나는 원작 루시페우스의 음험함에 짐짓 어깨를 떨었다.
‘그래, 그가 아닌 원작의 루시페우스….’
원작 케인과 지금의 케인이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듯, 원작의 스칼렛과 내 친우인 스칼렛이 전혀 다른 인물이듯이 말이다.
“지금의 저는. 그 레이디에게 눈길이 간 적,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의 저’라….
어째선지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했고, 이따금 그 말소리가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거렸지만.
나는 내가 다룰 수 없는 변수를 하나라도 늘리기가 싫어서, 그에게로 흘러가는 생각의 가지를 번번이 끊어내곤 했다.
‘안 보일 때라도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런 건, 올해를 안전하게 잘 마치고 나서야 생각할 문제니까….
그때, 알렉스가 보고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알비누스 상단 측에서 온 연락인데요.”
“상단에서?”
“베라초 방화 건으로요.”
“아아, 이제 와서?”
웬일이지? 그들이 마법 감식 결과를 다 잊었다고 루시페우스가 말했는데…?
그게 거의 한 달이 다 돼가는 일이니까, 근거도 없으면서 재차 항의하기엔 민망한 시차였다.
“뭐, 휴가라도 다녀왔나 보죠.”
그리 말하며 알렉스가 빙긋 웃는 게, 루시페우스가 이쪽을 맴도는 걸 보면 그럴 리 없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를 잠깐 노려본 뒤 케인의 대리로 참석한 데릭에게 물었다. 케인 대신 그가 알비누스 후작저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그래?”
“그건 아니고, 그분께서 요즘 조금 다른 일들에 집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 말하며 데릭이 알렉스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까불거리는 성미의 그는 보고의 틈바구니마다 깐족댈 구실을 찾는 듯했다.
나는 그들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런데 그는 본인이 상단 일과 무관하다고 했거든.”
“그렇기야 한데, 다른 일에서도 손을 떼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알비누스 내부에서 이뤄지던 일들이 전체적으로 중단된 느낌입니다.”
“…그래? 하지만 수정은.”
“네, 매수량에 변화는 없습니다. 한데 그건 어차피 상단 직원들이 번외 업무로 하던 일이라서요.”
그렇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정을 사들이는 양에 변함이 없다는 것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대한 계획이 계속 진행 중이라는 것인데.
‘루시페우스가 정말로 그쪽 일에서 손을 뗐다고…?’
다시금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가 제 쓸모를 피력하겠답시고 다가오는 것에 번번이 설레게 되는 걸, 그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는 차인데.
거기에 수정이 여전히 귀족파에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좋은 핑계였다. 그만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 수 있는데, 그 계획이 건재하단 증거니까.
내가 답을 주지 않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좋은 핑계.
“안 그래도, 알비누스 상단에서 수정과 관련된 용건으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이번에는 수정 유통에 관한 것을 맡기겠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수정… 유통?”
나는 절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껏 귀족파가 수정을 사 모으는 것은 광산을 매입하거나 이르겐트 경매장에서처럼 수집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정을 본격적으로 유통한다고…?’
생각지 못한 정보에 내가 눈매를 좁히자, 알렉스가 내처 말을 이었다.
“이 일만 잘 맡아주면, 베라초 방화에 대한 배상은 면책해 주겠다고 했다는군요.”
“배상을 면책한다고?”
분명 루시페우스가, 마법 감식 결과를 다들 잊게 만들었다고 했는데?
“아, 그게, 일전의 마법 감식 결과 얘기가 허풍이었는지 그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어떻게든 에스메르를 이용하고 싶어서 던진 말 같았답니다.”
흠…. 나는 책상을 톡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거기서 요구하는 게 좀 이상했습니다.”
“뭐라는데?”
“어쨌든 자기들이 봐주는 셈이니… 단주가 직접 와서 사과하라고 하던데요?”
알렉스가 겸연쩍다는 듯이 뱉은 말에 나는 실소를 내뱉었다.
마치 전생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사과에 목숨 걸던 진상 고객님들이 생각나는걸?
사장 나와! 무릎 꿇어! 뭐, 그런 거….
흐음, 나는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수락해 보라고 할까요?”
“상단이 코코 에스메르 명의로 돼 있으니 단주가 젊은 여성인 건 확인했을 텐데. 내가 직접 가는 게… 괜찮을까?”
그리 말하며 나는 기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세르니타의 별채에서 내가 직접 행동한 것을 두고 굉장히 괴로워하던 그들이었으니 퍽 예민할 일이었다.
‘하지만 수정 유통망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어서, 기왕이면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은데….’
잠시 고심하는 기색이던 엘런과 알렉스가 대꾸했다.
“접선 장소를 우리 쪽 편의에 맞추는 쪽으로 한번 얘기해 볼까요?”
“마르탱 녀석은 영 못 미더워서 말이죠.”
예상외의 순순한 수긍이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서, 내가 재차 확인받기 위해 물어볼 정도로.
“역시 내가 직접 가는 게 맞겠지…?”
“전하께서 말린다고 안 가시겠어요?”
“무엇보다 알비누스 상단에서 에스메르 상단주를 해할 이유도 없고요. 그들이야 이번 한 철 대신 장사하고 꼬리 자를 상단을 찾는 셈이니 어떻게든 어르려고 노력하겠죠.”
“역시 그렇지?”
알렉스의 의견에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마르탱이 좋아하겠네요. 거기 단주 대리가 엄청 능구렁이 같다고 맨날 한숨 쉬던데.”
데릭이 고개를 주억이며 덧붙였다.
그래, 세르니타 별채에서의 일은 불확실성이 너무 많았던 것뿐이니까. 우리 쪽에서 완벽하게 방비하면 위험할 것이 없었다.
역시 유능한 내 기사들.
“좋아. 만날 장소를 우리 쪽으로 하는 걸 조건으로 걸어. 아르쥬 거리 안전 가옥도 나쁘지 않겠어. 거기 어차피 조금 있으면 계약 만료되니까.”
우리 쪽에서도 꼬리 자르기에 편하려면 말이다.
루시페우스가 알비누스 후작가의 일에서 손 뗀 것과 별개로 알비누스에서 수정을 모으는 건 방해해야만 했다.
그의 마음이 나중에 변하든 변하지 않든, 최대한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을 막기 위해서.
“아, 그리고. 케인으로부터의 보고인데요.”
회의가 끝날 무렵, 데릭이 잽싸게 덧붙였다. 태양제가 끝나자마자 로즈버리령으로 떠난 케인은 벌써 보름이 넘도록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귀족파에서 보낸 인부들이 폐광 내부에 함부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케인이 로즈버리 자경대와 합심해서 잘 막고 있다고 했는데.
“언제 돌아온대? 그 인부들 슬슬 돌아갈 것 같대?”
“그게… 폐광에서 사고가 나서 말이죠.”
서류를 갈무리하던 내 손이 우뚝 멎었다.
“…뭐?”
“로즈버리 남작이 다치는 바람에, 조금 늦겠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원작대로의 일이었다.
내가 막아 보겠다고 애썼지만, 결국 일어나고 만.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그가 손거울을 통해 연락해온 것은, 내가 궁 밖을 나서지 않은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혹시나… 싶었을 뿐입니다. 한 10퍼센트 정도의 확률로요.”
“전하께서는 직접 행동하시는 걸 선호하시니까요.”
그가 나를 그리 판단했으니, 그와 반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그 10퍼센트의 확률조차 없도록.
그러니까, 나는 명백히 그를 피하고 있었다.
딱 한 번, 그가 렌틸 자작에게 접근하려던 마검사를 잡아다 주느라 수선화궁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전하, 저, 그분 오셨는데요.”
“막심 경이 뭐래? 그들이 대가로 뭘 받으려던 건지 드디어 털어놨대?”
수선화궁의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를, 나는 그저 못 본 체하고 말았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로즈버리 남작의 사고에서… 나는 그의 죽음을 겹쳐 보고 말았으니까.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가 주는 설렘에 취해 그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내 마음을 돌볼 여력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답을 유보하는 사이 그의 마음이 변해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원래 다 그런 거니까.
그가 어떻게든 예정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결말이리라.
달칵, 나는 손거울을 닫아 협탁 안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다시 며칠 뒤, 아르쥬 거리의 안전 가옥. 렌틸 자작과 스칼렛을 처음으로 만나게 한 바로 그 저택이었다.
“보통 상단주 대리랑 그 비서 둘이서 온다고?”
“네. 그런데 이따금 호위 용병을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요.”
“오늘 같은 날은 데리고 오겠네. 그럼 많아야 서넛?”
그 두문불출의 일환으로 알비누스 상단과의 만남에 코코 에스메르의 비서라며 알렉스를 보냈는데, 그들은 진짜 상단주를 만나야만 한다며 단호하게 나왔다고 했다.
‘혹시나 루시페우스를 마주칠까 싶어서였는데, 그때 상단주 대리가 나왔다는 걸 보면 그가 꾸민 일은 아닌 거니까….’
사정이 꽤나 급한지, 우리가 한번 신뢰를 저버린 셈인데도 순순히 우리 쪽에서 섭외한 장소로 다시 온다는 거였다.
‘도대체 수정 유통이 어떻게 굴러가는 거길래….’
삐빅.
그때, 저택 전역에 쳐둔 신성력 결계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왔나 봅니다.”
“응.”
나는 방문자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나는 평민인 코코 에스메르고, 상단주 대리는 알비누스 후작가의 가신인 무슨 남작이니까.
저벅, 저벅, 저벅.
방 바깥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하나…? 한 사람인가?’
그 아무개 남작이 무예를 수련했을 리도 없는데, 뭐지…?
내가 마르탱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가 침착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게, 방에 은신해 있는 그림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듯했다.
벌컥. 문이 열리자, 거기 나타난 사람은….
“…경, 께서 여긴 어쩐 일로.”
“단주 대리가 앓아누워 제가 대신 오게 됐습니다.”
그리 말하며 남자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그간 내가 피하던… 루시페우스였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당혹감에 휩싸였다.
“이게 무슨 경우지?”
코코 에스메르인 척할 때 하던 경칭은 집어치우고서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문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루시페우스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저벅, 저벅, 저벅, 문밖에서 울리던 것과 같은 발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루시페우스가 내게서 한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멈춰 섰다. 마르탱이 숨을 집어삼키며 물러서는 소리가 났다.
상체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 그의 눈동자에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늘 똑같은 열기가 일렁였다.
“전하를 뵐 수 없다는 게.”
그의 미간에 비친 건 은은한 고통이었다.
“이렇게 버티기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