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 연심의 쓸모 (6)
그런 내게서 루시페우스가 시선을 떼지 못하는지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스칼렛한테 뭐라고 하면 뭐 해? 본인이 제일 문젠데.’
한데 말을 꺼내는 이가 없어, 응접실에 침묵이 흘렀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다시 다과상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응접실의 부인들이 모두 한껏 광대를 올린 채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청춘이네, 청춘이야. 뭐, 그런 종류의 말풍선이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
‘…아, 아무리 내가 딸뻘이라지만….’
부인들은 내가 상황을 정리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내가 루시페우스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였다.
진짜, 다들 속도 모르고….
나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작, 괜찮다면 내가 손님을 배웅해도 괜찮을까요?”
“전하께서 직접요?”
“내 스승을 위해 내가 이 정도도 못 해드릴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안의 부인들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스승께서 어린 시절 친우들과 회포를 푸시는데, 한참 어린 사람이 끼어 있으니 이야기들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서.”
어머, 전하. 무슨 그런 말씀을. 전하께서도요, 참. 부인들은 손사랫짓하면서도 기대감에 차 눈을 빛냈다.
나 참….
“경, 그럼 배웅해줄게.”
“영광입니다.”
그가 에스코트를 하려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나는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먼저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에스메르 상단의 명의로 구해준 렌틸 자작의 타운하우스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애초에 자작 한 사람을 위한 저택이니까.
그래서 응접실에서 나와 몇 걸음 걷자마자 현관으로 이어지는 홀이 나왔다.
나는 정말로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나왔을 뿐임을 피력하기 위해 곧바로 현관 쪽을 손짓했다.
“그럼, 경. 잘 가.”
“…….”
“문도 열어줘야 해?”
루시페우스는 멀거니 내 얼굴만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이 스치는지, 그의 안색이 사뭇 가라앉았다.
“…곤란하셨군요.”
그의 낯에 깃든 건, 자조.
그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래서 미안하다는 마음이 불쑥 치솟고 만 순간 나는 부러 날카롭게 말했다.
“그때도 그렇고, 정말로 스칼렛이나 렌틸 자작에게 용건이 있었던 건 아니잖아?”
“그건….”
“매번 갑자기 불쑥, 다른 사람들 다 보는 데 나타나면….”
다음 말을 잇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 그제야 나는 이편을 지켜보고 있는 집사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는 내내 민망한 낯을 지은 채, 최대한 가구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집사. 이분은 내가 전송할 테니, 손님들에게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살펴봐 주겠어?”
“아, 예!”
바싹 얼어 있던 그는, 재빨리 묵례한 뒤 응접실 쪽으로 사라졌다.
홀에는 그와 나만 남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날카롭게 내뱉었다.
“경비 결계를 쳤다더니, 누가 드나드는지 감시라도 하나 보지?”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면. 내 기사들하고 내통이라도 했나?”
“전하의 기사들이 얼마나 자부심이 큰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또, 10퍼센트도 안 되는 확률에 건 거야?”
무작정 몰아붙이는 내 질문 세례에, 루시페우스는 차분하게도 대꾸해 나갔다.
“그저, 자작님의 행보에 힘을 실어주시려는 것 같으니 오시지 않으실까… 짐작했을 뿐입니다.”
“그 행보가 굳이 방문의 형태로 나타나진 않을 수 있는데?”
“전하께서는 직접 행동하시는 걸 선호하시니까요.”
그 말소리의 내용은 너무도 평이한데, 그 말끝이 떨렸다. 내내 다른 쪽만 쳐다보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낯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매가 작게 일그러져 있었다.
“직접 혼외자 출신의 수하들을 거느리시는 모습을 보이시고, 직접 정보 길드며 경매장에 다니시고, 직접….”
거기까지 말한 그가 한 번 숨을 골랐다.
“직접, 함정에 빠지시고….”
“…….”
나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내 안전 때문에 괴로운 표정을 짓는 그를 보노라면, 나는 그때 괴로워하다가 정신을 잃고 만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기에….
내가 위험할 뻔했다며 가슴 아파하던 그가 생각나기에.
나로 인해 불안해하던 그에 대한 미안함만이 커지기에.
“그런 전하이신 만큼, 직접 오시지 않을까…. 기대한 것뿐입니다.”
그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려 미소를 그려냈다. 나는 더 이상 무엇도 따져 물을 수 없었다.
한껏 굳혀두었던 낯이 절로 풀어지고 말았다.
“뭐, 오지 않으셨다면 어쩔 수 없었지만요.”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인지, 루시페우스의 목소리는 농담인 듯 울렸다.
“렌틸 자작님과는 결계를 설치해 드리면서 안면을 텄고. 제 아버지께서 보내신 선물 역시, 구실을 못 만들 것도 없습니다.”
나는 거기에 차마 따라 웃을 수가 없어, 그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홀에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경이 이러는 거, 알비누스에서는 알아?”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엉뚱한 질문이었다.
“알비누스에서 렌틸 자작의 다과회를 축하한다니…. 자작의 등장이 알비누스에 기꺼울 리가 없잖아.”
“저야 뭐, 사고뭉치 막내아들이니까요.”
루시페우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레 울렸다. 다만 그의 눈썹이 조금 처져 있어, 그가 퍽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후작 이름을 마음대로 팔고 다녀도 된다.”
“원래 자식이란 건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잖습니까.”
그 말에 나는 또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리 간단히 말하기엔, 그가 실제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스르르 떨구어졌다.
“힐베르크의 성상을 놓친 일로 파문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걸요. 이미 저를 내놓은 자식이라 치시는지도 모르고요.”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려 했다.
잠시라도 나를 보겠다고 와놓고, 내 심기가 불편한 걸 달래려고 저답잖은 농담까지 주워섬기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죄어 괴로울 지경이었다.
두근거림이 너무 커서일 수도 있고, 그와의 관계에 대한 걱정이 커서일 수도 있고, 그걸 밀어내야 하니 미안해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평생 그랬듯 그가 안쓰러워서일 수도….
“그러면 그 마법 감식이라는 건.”
그 모든 감정이 괴로워, 나는 재빨리 새로운 화제를 뱉었다. 그를 만나면 물었어야 할 여러 가지 중 하나였다.
“알비누스 상단에서 창고 방화범이 누구인지, 마법으로 감식했다던데.”
“…네, 그랬었죠.”
그리 읊조리는 루시페우스의 낯이 씁쓸했다.
말을 꺼낸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내게서 홀연히 사라진 그 시기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전까지 내가 하는 일들을 알고도 내버려두던 그가, 에스메르의 일에 처음으로 어깃장을 놓은 거였다.
그래서 당시 알렉스의 보고를 받았을 때, 어찌나 마음이 처참했던지.
“그건, 이제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없는 일…?”
“그 결과를 모두가 잊었거든요.”
그의 태연한 말소리에 나는 목 뒤가 쭈뼛했다. 그러니까, 마법을 써서 기억을 조작했단 소리였다….
“그땐 저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말씀드렸잖습니까. 이제는 제게 중요한 게 뭔지 안다고.”
“…제게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았다는 정도면, 괜찮을까요?”
왜 갑자기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는지 물었을 때, 무언가를 굉장히 뭉뚱그려 표현한 듯하던 그의 말소리.
그 ‘중요’는 필시 나를 향한 거였고….
“경, 나는.”
“제 쓸모를 이것저것 피력하는 것뿐이니까요.”
혹여라도 내가 부담을 느낄세라, 그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말이 나온 김에 여쭙자면. 혹시 최근에 제 형님을 만나신 적이 있으신지요.”
나는 기꺼이 바뀐 화제로 머릿속을 채웠다. 나나 그의 마음에 대한 것보다야 훨씬 안전하고, 자꾸만 물씬대는 미안함보다야 나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도미닉 얘도 잠잠하네. 내가 신성력이 없다는 걸 갖고 협박했으면서. 뭘 어쩌려는 건지 알아야 대응도 할 텐데.’
특이 사항이 없으니 보고가 없는 거겠지만, 알비누스를 담당하던 케인이 로즈버리로 갈 때 인수인계가 미진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만간 부대장인 데릭이랑 얘기해 봐야겠어.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루시페우스의 낯을 뜯어보았다.
스스로 충실한 정보원이 되고자 하는 그를.
‘내가 신성력이 없는 걸 그가 어떻게 아는지도, 루시페우스가 알려나…?’
그런데 루시페우스는 내 체질에 대해 어떤 정보를 들어서 아는 게 아니라, 직접 감지해서 아는 것 같던데….
나는 머릿속을 바삐 굴리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경이 온실에서 깨어난 날 찾아왔었어.”
루시페우스는 별로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용건이 뭐라던가요.”
“별거 아니었어.”
나는 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이라고 주길래 상자는 태워버리고 다이아몬드는 에스메르에 투자했지.”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3황녀 전하의 사랑을 지니고 다니시니까요….”
루시페우스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용건이 그게 다였습니까.”
그리 묻는 그의 낯에 진한 걱정이 배어나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과분하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어떤 대답을 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가여운지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으니까.
“그 뒤로,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신 일도 없으셨고요?”
루시페우스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도움이 필요하기도 전에 경이 마검사들을 알아서 잡아줬잖아?”
내 말이 진심인지 가늠하듯 내 낯을 꼼꼼히 뜯어보며, 루시페우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를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렵게 말을 꺼낸 그는, 다시금 말을 잇지 못했다. 입 안에서 이런저런 말을 바꿔 무는 듯 입술을 달싹대다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이윽고 나온 말은, 원래 하려던 말은 아님이 자명했다.
“어쨌든, 전하를 한번 해하려 했던 자 아닙니까.”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농지거리하듯 대꾸했다.
“나인 줄 알았다면 안 그랬겠지.”
“네, 감히 그러진 못했겠지만요….”
그는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제 턱을 매만졌다. 무언가를 계산하듯, 그 시선이 내 뒤 어딘가에 붙박였다.
“…전하께 퍽 불경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모르는 바 아니야.”
그는 어쨌건 부마 자리를 노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내게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물론 루시페우스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전하께서는 뭐든 알고 계시지만요. 그리고 전하께는, 유능한 기사도 많으시고요. 그래도….”
한참 다른 곳을 향해 있던 그의 눈동자가 내게로 돌아왔다. 한 쌍의 다갈색 눈동자가 오롯이 붙박였다.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재차 여쭙게 되는군요.”
“…….”
“…저를 아직 못 믿으셔도 도리가 없지만요.”
나는 늘어뜨렸던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늘 그를 신뢰했다. 한편으로는, 그를 믿지 않았다.
늘 나를 구하고 나를 묵인해주는 그지만, 그가 언제까지 내게 무르게 굴지 알 수 없으니까.
결국 없는 일로 만들었다지만, 어쨌든 마법 감식을 실행했던 것처럼.
‘하지만 문제는….’
자꾸 믿고 싶어진다는 거겠지. 내가 입술 안쪽의 살을 슬며시 깨물 때였다.
“그런데, 팔찌나 반지라면 받아 주셨을까요?”
“응?”
“반지는 늘 마도구를 이것저것 끼고 다니시니까…. 역시 팔찌나, 아니면 귀걸이가 나을까요.”
그리 말하며 그는 곰곰이 따지는 듯 혼잣말했다. 그러는 내내 그의 시선은 내 귓가나 목, 손 같은 곳을 스쳤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늘 레베카의 초커를 하고 다니는 내가 그의 선물이 목걸이라서 버렸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니, 품목이 문제가 아니라.”
“하긴, 전하의 눈동자 색에는 그린 다이아몬드 보다얀 에메랄드 쪽이 더….”
그리 곰곰이 생각에 빠진 그의 낯이 더없이 진중했다. 그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는 그 낯에….
‘…망했어.’
귀여워 보이면 끝이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