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33화 (133/220)

133화. 그 연심의 쓸모 (5)

‘그렇게 봐도,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정말로 당황스럽고도 황당했지만, 그런 건 내색하지 않은 채 나는 영애들과 덩달아 고개만 모로 기울였다.

다과회 실무 담당인 헨리에테가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갔다.

“좋은 오후입니다, 알비누스 영식. 지금 여기는 4황녀 전하의 다과회가 진행 중인데….”

“아, 저는 가문의 일로 레이디 스칼렛께 용건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여기 계시다기에.”

헨리에테에게 따라붙었던 수십 개의 눈동자가 쪼르르, 스칼렛에게로 돌아왔다.

스칼렛은 놀란 낯을 하고서 부채를 살랑살랑 부쳤다.

“어머. 무슨 일이시지?”

다른 영애들 앞이어서 그림처럼 잘 꾸민 표정이었지만 내 낯을 살피는 눈빛에는 장난기가 진하게 배어났다.

또 일부러 부른 거네….

나는 그녀나 루시페우스 쪽은 쳐다보지 않음으로써 못마땅함을 표했다.

“전하, 잠시만 실례할게요?”

어느새 루시페우스가 헨리에테의 안내를 받아 다과회 자리 근처에까지 와 있었다. 스칼렛이 그에게 다가가 그녀 특유의 칼 같고도 우아한 예법으로 인사해 보였다.

“루시페우스 경, 좋은 오후입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스칼렛.”

루시페우스도 거기에 깍듯이 인사하였지만… 어째선지 두 사람 사이에 은근한 친근감이 느껴졌다.

‘정말 스칼렛을 보러 온 건가? 아니, 스칼렛이 게이블스에서 무슨 힘이 있다고…?’

내 신경 또한 온통 그쪽에 쏠려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데 스칼렛이 그와 바싹 붙어서는 부채로 저들의 입을 가리는 바람에, 그 대화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따, 딱히 엿들으려는 건 아니지만….

게다가 태양절 연회 때처럼, 이따금 루시페우스가 스칼렛에게 미소 짓기까지….

나는 자꾸만 그쪽으로 미끄러지려는 시선을 붙들기 위해, 애꿎은 오이 샌드위치만 꼭꼭 씹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전하께 인사드리고 가시겠어요?”

“…그래야지요.”

대화가 끝났는지, 그제야 두 사람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앉은 자리 뒤로 휘적휘적 걸어온 그가 허리를 숙였다. 그건 인사라기보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응, 좋은 오후야.”

나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곁눈질만으로 그를 살폈다.

“저희 아버님께서 게이블스 후작님께 서신을 보내라 하시기에, 레이디 스칼렛께 전달을 부탁드리고자 왔습니다.”

“…그랬구나.”

그가 순순히 제 방문 목적을 읊었다. 그 말소리가 사뭇 빠른 것이, 해명이라도 하는 투였다.

“이런, 이런.”

제자리에 돌아와 앉는 스칼렛이 아쉽다는 양 혀를 쯧, 차는 걸 보니 더더욱 그랬다.

그의 등장에 궁금증 가득한 낯을 지어 보였던 영애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중에서도 리피샤 쿠첼의 눈이 유독 빛났다.

‘아주 나불거릴 건수 잡은 표정인데….’

내가 리피샤의 낯을 흘겨볼 때였다.

“저희 아버지께서 참 좋아하시겠어요.”

스칼렛이 대뜸 목소리를 울렸다.

“제 정략혼 상대로 알비누스의 둘째 아드님이 어떻냐 하시며, 저를 얼마 전 떠보시기도 한 참이신데….”

그 말소리는 영애들이 선망하는 그와의 친분을 강조하는 것처럼 꾸몄지만… 그 눈빛은 이따금 나를 흘끗대었다.

“한데 후작님께서 루시페우스 경께 이런 심부름을 시키신 걸 보면, 그게 제 아버지의 일방적인 생각은 아니었나 보아요?”

그녀의 말에 귀족파 영애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리피샤 쿠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야, 네 애인 들으면 울겠다….

정략혼 운운하는 말에 손끝이 심장과 연결된 듯 욱신거렸지만, 나는 억지로 스칼렛의 연인인 헥터 경을 떠올리려 애썼다.

귓가에 루시페우스의 난처한 듯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는 태연하게, 내게만 들릴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저, 레이디 스칼렛이 본인에게 힘을 실어주는 걸로 보일 수 있다기에 온 것뿐입니다.”

이 역시, 다소 빠르게 울리는 것이 숫제 변명이었다. 태연한 낯을 가장한 것치고 그 말소리는 조금 절박한 듯 떨렸다.

“그, 그런 것도 내가 눈치 못 챘을 줄 알았어?”

“…물론 전하께서야 다 알고 계셨겠지요.”

귓전에 들러붙는 부드러운 목소리….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차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분명 그는 근사한 미소를 짓고 있을 거고, 그건 심장에 해로울 테니까.

나는 빼죽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앙다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끝내 그에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자, 루시페우스가 한숨 같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유명한 프리지어궁의 후원에 와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두가 극찬하는 전하의 온실도…. 낮에 보니 참 아름답군요.”

낮에 와봤으면서…. 억지로 마음을 삐딱하게 다잡아 샐쭉거리는데, 영애들의 낯이 어딘가 이상했다.

설핏 붉힌 낯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못 떼는 게….

어머머. 보셨어요, 저 표정? 근사해라….

그리들 조잘대는 낯이 그에게 홀린 듯하달까?

하여 나도 모르게,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나 싶어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괜히 봤어…!’

햇볕을 등진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매가 따뜻했다. 그가 말한 ‘아름다움’이 나에 관한 것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알제니아의 호숫가에서처럼, 한편으로 내 온실에서 제 마음을 고백했을 때처럼.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위험하게도 뛰었다.

다과회가 끝나고 난 뒤.

원로원 하반기 의회를 앞두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내 응접실로 따라온 스칼렛은 얄밉게도 목소리를 울렸다.

“아시잖아요, 전하.”

부채는 살랑살랑, 눈초리는 사르르 접으면서.

“제가 제일 잘하는 게 여론전이라는 것.”

“…….”

한때 스칼렛이 능청스레 구는 게,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좋아했었는데….

‘이런 건 괘씸하네.’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나는 미간만 팍 찌푸린 채로 그녀를 흘겨볼 뿐이었다.

“그 여론전. 영애 스스로를 위해서나 쓸 것이지, 왜 애먼 데 쓰는 거야?”

“뭐, 전 그쪽으로는 당분간 쓸 일이 없으니까요?”

스칼렛이 생긋 웃었다.

그녀가 오늘 펼친 여론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종의 스캔들을 내는 거였고, 그것은 기실 그녀가 평생 레오폴트를 타깃으로 펼쳐온 것이었다.

‘이제 레오를 좋아하는 척은 그만뒀다 이거지.’

내 덕에 일이 잘 풀려서 그런 거니 잘되었다는 생각도 잠시.

그 불똥이 왜 나한테 튀는 건데…. 나는 낭패감 깃든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이마를 짚었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응?”

“전하께서는 변하지 않을 것만 기대하신다면서요.”

내내 나를 놀리던 기색은 어디 가고, 한풀 가라앉은 스칼렛의 말소리는 꽤 진지했다.

“그는 전하의 마음을 원하고, 전하께선 마음이 아닌 다른 것을 원하시니…. 전하께서 지신 은사나 한 가문의 가주직처럼, 알비누스에게서 변치 않을 쓸모가 있음을 고민해 보십사 하는 거예요.”

“도대체 오늘 일에서 어느 부분이 그런데?”

“뭐…. 차기 게이블스 가주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고 있다는 것 역시 일종의 도움이 될 테고요.”

스칼렛이 씨익 웃었다. 렌틸 자작의 등장 이후로 이따금 남들에게도 대놓고 보이는, 퍽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곧 하반기 의회가 열리는데 윌로우 놈은 여전히 두문불출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얘가 뭘 몰라서 그러지. 알비누스가 도움이 되기는? 올해 칠 사고가 얼마나 큰데.’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은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귀족파에서 몇몇 가문들이 수정을 사들이고 있다지만, 그게 어디에 쓰일지까지 아는 건 극소수일 터였다.

그걸 암조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 역시, 외부에 알릴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스칼렛이 이에 대해 모르는 것은, 게이블스 후작이 그녀를 배제하기 때문이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고뇌를 좋을 대로 해석한 스칼렛은 그저 찻잔 너머로 후후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에 비친 것은 일종의 흐뭇함이었다.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고맙기야 한데…. 스칼렛도 슬슬 알 때가 됐지.’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손을 걷어내며 생긋 웃었다.

“영애. 그래서 말인데.”

스칼렛은 입매로 완벽한 호선을 그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만간 발신인 불명의 서류 뭉치가 영애 침실에 들어와 있어도 놀라지 마.”

“네?”

내 말에 눈을 치떴던 스칼렛은, 이내 알겠다는 듯 눈썹을 크게 들썩였다.

“…네에.”

그간 정리해둔 귀족파의 악행 목록을, 게이블스 후작 몰래 보낼 때가 온 거였다.

우리가 모은 귀족파의 음모들, 그러니까 그녀의 아비가 황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들은 분명 스칼렛에게 좋은 무기가 될 테니까.

스칼렛과 별개로 루시페우스의 기행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누가… 왔다고?”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경이라고, 알비누스 후작의 둘째 영식이시라던데요….”

“아아, 그 신사가…. 이런 시간에.”

렌틸 자작이 내 낯을 슬쩍 살피고는 집사에게 알았다고 손짓했다.

응접실에 자리한 귀부인들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들의 눈동자가 한 번쯤 나를 스치는 게….

‘…젊은 애들만 신난 게 아니었구나.’

나는 찻잔에 입을 묻으며 민망한 낯을 가리려고 애썼다.

원로원 개회 전, 바쁜 것은 스칼렛만이 아니었다. 렌틸 자작 또한 자기 세를 일구기 위해, 이런저런 사교 활동을 시작한 거였다.

옛 게이블스 영애 시절의 친우들을 초청한 다과회에, 그녀의 애제자인 내가 깜짝 방문하면 큰 효과를 내는 법.

그게 캐주얼한 모임인 만큼, 이 다과회가 열린 것 자체가 소식이 별로 안 났을 텐데…?

‘아, 결계가 있었지.’

경비 결계를 쳤다더니, 방문객의 신상까지 아는 건가.

그런데, 집사의 안내로 응접실에 들어온 루시페우스는… 다과회가 열리는 걸 미리 알았던 듯이, 근사하게 꾸려진 꽃다발과 선물 상자를 들고 온 것이었다.

‘…어디서 들었지? 내가 여기 온 건 스칼렛도 모를 텐데.’

응접실에 들어선 그는 내 쪽을 흘끗, 눈에 담고는 자작에게 선물을 건넸다.

“제 아버지께서 친애하는 게이블스 후작님의 누님께서 여시는 첫 다과회를 축하하며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알비누스 후작이….”

렌틸 자작이 그리 읊조리며 갸웃거리는 게, 알비누스 후작이 그런 살뜰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안목이 좋으시군그래.”

“전해 드리겠습니다.”

“초록색이 참, 아름답고.”

그 꽃다발은 흰색 칼라 몇 송이를 중심으로 안개꽃이나 은방울꽃 등 작은 흰색 꽃들이 듬성듬성 장식돼 있을 뿐이라, 곁들여진 잎사귀들이 더 돋보였다.

렌틸 자작이 억지로 찾아서 칭찬하는 말에, 루시페우스가 퍽 흐뭇해하고 있…는데….

왜 부인들이 다 나를 보지?

‘아, 초록색이라면.’

윽.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먼 창가를 바라보았다. 렌틸 자작이 언급한 그 초록색의 눈동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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