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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32화 (132/220)

132화. 그 연심의 쓸모 (4)

나는 눈동자만 움직여 그의 낯을 살폈다.

내 맞은편에 외따로 앉은 그는, 이 모임에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이 하나 없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어디 나무 밑에나 가서 위스키나 홀짝댈 것이지…. 어색하게.’

이 자리에 구비된 술이랄 것이 스파클링 와인뿐이긴 했지만.

“어머나, 그러고 보니 레이디 스칼렛은 루시페우스… 경과 처음으로 통성명한 레이디 아니신가요?”

급작스레 릴리안 알제니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것 역시 스칼렛의 계산 같다면 내가 그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걸까…?

“레이디 릴리안도 참. 루시페우스 경과 가장 처음 통성명하신 레이디라면 본대륙에서 가장 고귀하신 우리 4황녀 전하이실 텐데요.”

“…어머. 그런 거군요?”

그렇긴 뭐가 또 그래?

스칼렛이 의뭉스럽게 하는 소리에, 뭔가 눈치챘다는 양 릴리안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이편의 상황을 지켜보던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슬며시 스칼렛을 향했다.

“네, 뭐…. 낮에는 아버님의 일을 돕다 보니, 저녁에 열리는 연회에나 주로 방문하게 되더군요. 가문의 사업과 관련된 일로 사교 클럽이나….”

그는 어째서인지 스칼렛에게 꽤 호의적으로 대꾸했다. 태양절 연회 때 퍽 친근해졌더라니, 그래서 둘이 작당을 했나?

나는 빼죽 튀어나오려는 입을 가리기 위해 잔에 입을 묻는 척했다.

“어떠세요, 전하의 파트너 자리를 채워주신 보람이 있으신가요?”

“네, 나온 보람이 있군요.”

루시페우스는 스칼렛의 의뭉스러운 말소리에 별다른 의구심을 갖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알제니아 장원의 숲이 유명하더라니, 정말로 풍경이 참….”

그녀의 질문에 답하던 그의 말소리가 애매한 데서 멎었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윤슬 빛나는 호수를, 그 너머의 전나무 숲을, 더 너머의 만년설 어린 뾰족산을, 그 위로 조금씩 해가 기울기 시작한 하늘을 스쳤다.

그렇게 한 바퀴 휘돈 시선이 다시 이편으로 돌아와, 그 시선의 끝에 내가 걸렸나 싶었을 때.

“…참 아름답군요.”

그의 시선은 내 낯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오해의 소지 다분한 그 말에 사악한 두근거림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이건 마치, 나한테 하는 말처럼 들리잖아….’

내 마음이 수런거리거나 말거나, 그는 가볍게 시선을 스칼렛에게로 돌리며 입꼬리를 가늘게 끌어 올렸다.

“초대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아름다움을 눈에 담는군요.”

“…어머.”

스칼렛 곁의 릴리안 알제니아가 작게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너도 얘 웃는 거 처음 봤겠지….

“역시 그렇죠? 제가 무례하게 굴길 잘했네요.”

한데 무슨 꿍꿍이인지, 스칼렛은 루시페우스를 향해 한껏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네 연인이 저기서 다 보고 있거든?

정작 스칼렛의 연인이라는 헥터 경은, 묵묵한 낯으로 그녀의 뒤를 지킬 뿐이었지만.

스칼렛은 릴리안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레이디 릴리안. 오랜만에 카드놀이나 한번 할까요? 저기 레이디들과 인사도 나눌 겸.”

“좋아요. 레이디 아스티시아가 로제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니 한 병 챙겨 가도록 하지요.”

저들끼리 그렇게 이야기한 두 여인은, 부산스레 움직여 자리를 뜰 채비를 했다.

“전하, 저희 잠깐 손님들께 인사 좀 하고 올게요. 저런 카드놀이는 전하께 시시할 것 같아서, 같이 가시자고 말씀 못 드리겠네요.”

그리 말하면서 또 눈웃음 살살 치는 게, 루시페우스랑 나를 일부러 단둘이 남겨 놓으려는 게 빤했다.

나도 카드놀이 좋아하거든?

남들 앞이어서 그런 거짓말도 못 하고, 나는 그저 손을 가늘게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루시페우스가 어느새 내 옆자리로 옮겨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스칼렛이 앉아 있던 곳이었다.

“혹시 좀 걸으시겠습니까. 바람이라도 좀 쐬시면….”

“멀리 나와서 힘들어.”

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스칼렛하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두 사람의 협력에 대한 불만을 담아서.

한편으로 그건 적당히 사실이 섞인 말이기도 했다. 오늘 마차를 정말 오래 탔으니까.

그래, 마차를….

화륵, 귓가가 붉어지는 게 다 느껴졌다.

‘아까 마차에선 괜히 어색하기만 하고…. 스칼렛은 괜히 쓸데없는 짓을 다 해서.’

마차에서의 일도 그렇고, 지금 그와 나란히 있는 상황도 그렇고. 그 모든 게 거북하게 느껴져, 나는 손쉽게 스칼렛을 탓했다.

기실 내 의지에 상관없이 그와 얽혀버린 게 불쾌하기도 했다. 스칼렛 나름대로 호의에서 한 일임을 알지만, 그래도 마뜩잖은 건 마뜩잖은 거였다.

이것 역시, 내 계획에 다분히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계획이 어긋나 불안해하는 건, 세르니타에서의 일로 충분했다.

그 원망의 화살은 다시금 그에게 돌아갔다.

‘기다리라고 했는데, 왜 자꾸 나타나서 사람 심란하게 만들어?’

대신전에서도 그렇고, 수선화궁에 마검사들 잡아다 줬을 때도 그렇고.

‘그, 그건 고마울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오늘 스칼렛에게 장단 맞춰준 것까지.

나는 일부러 그를 곁눈으로도 보지 않고자 호수에만 시선을 붙박아 두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러고 얼마쯤 또 침묵이 흘렀을 때였다.

‘덥네.’

더위가 한풀 꺾였대도, 늦여름의 오후였다. 그늘에서 양산도 쓰고 이따금 산들바람도 불어온다지만 기온이 높아서야 별도리가 없었다.

‘신성력 있는 사람들은 나처럼 더운 줄도 모를 텐데.’

그렇게, 그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잡다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와글와글 채울 때였다.

“…혹시 발이 아프신 건 아니지요?”

꽤나 오래간 입 안에서 굴린 듯, 그의 말소리는 조금 연극적으로 울렸다. 어째서인지 그게 조금 시무룩한 듯하게도 울렸다.

발은 갑자기 왜…?

아.

‘도미닉을 거절하면서 댄 핑계 얘긴가.’

태양제 연회 때, 도미닉이 춤추자는 걸 내가 발 아프다며 거절했었지.

그러고 보면 내가 그의 제안이나 요구를 번번이 받아주고 말았으니까….

‘내가 그동안 너무 물렀지.’

그에 대해 툴툴대고 싶어지는 마음과는 달리, 나는 순순히 그의 추측을 반박해 주었다.

“아냐. 알제니아까지 오느라 아침부터 마차를 너무 오래 타서 그래.”

자, 잘못된 사실은 정정해야 하니까.

나는 민망하여 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런데… 호숫가 곳곳의 젊은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뭐지?’

다른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거야 세실 평생 겪은 일이지만, 그 눈빛이 어딘가 다른데.

사람들의 광대가 도톰해져서는 서로 귀엣말을 소곤대는 게, 이건 마치….

‘아. 우리 사이에 대해 소문이 났댔지.’

나도 모르게 그와 나를 ‘우리’라고 엮어놓고,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쑥스러움이 나만의 일인 게 또 불만스러워, 나는 퉁명스레 다그치듯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시선도 문제고 말이야.”

“다른 사람들요?”

“세르니타 때도 그래. 경이 나랑 만나기로 해놓고 약속 깼으면서, 엄청 사연 있는 사람처럼 굴었잖아. 자꾸 날 쳐다보고.”

생각하니 화나네. 나는 거친 손길로 손가방을 뒤적여 손수건을 찾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알고 계셨군요?”

“왜. 알면 안 돼?”

“한 번도 제 쪽은 안 보시길래, 모르시는 줄로만….”

괘씸해서 그랬지.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창피한 일임을 알아, 나는 대꾸도 않고 손수건을 꺼내 땀을 찍어냈다.

겸사겸사 그 손짓으로 내 얼굴을 집요하게 살피는 그의 시선을 가릴 수도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라서 그런가. 더 더운 것 같네.’

기온 탓인지, 내 옆의 남자가 선사하는 쑥스러움 때문인지.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저 때문에 괜한 주목을 받으셨다면,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얼마간 말이 없던 루시페우스가, 갑작스레 손을 내 쪽으로 뻗었다.

“이런 곳에 오시면서 저를 생각 못 하셨다니…. 역시 서운하기는 서운합니다.”

그의 손이 손수건을 쥔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손길에 내 손이 거둬지자, 하릴없이 그의 시선에 고스란히 내 얼굴을 다 보여주게 되었다.

다시금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런 곳이 뭔데?”

그리 말하며 나는 재빨리 내 손을 빼내었다.

“프리지어궁 결계도 없는 곳이니 전하를 위협할 요소가 너무나도 많고.”

“알제니아 후작이 들으면 섭섭하겠는데? 게다가 여기에 따라온 내 기사들이 한둘이 아닌 것도 알 거면서.”

“전하께서 다치셨을 때 바로 치유해드릴 수 있는 건 또 저뿐 아닌가요.”

“경의 신성력이 그렇게까지 많다는 걸, 다 내보이고 다니려고?”

타인을 치유할 정도의 신성력은 최소 신관급인 것이었다.

“은사를 지신 분께서 순식간에 자가 치유하신 것으로 보여도 나쁘지 않겠죠. 또 전하의 기사들 말씀이시라면…. 전하의 사람들인데 뭐 어떻습니까.”

그 말이 또 다정하게 들려, 나는 곁눈으로 그를 살폈다.

목소리는 퍽 평온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내 시선을 얻길 간구하는 양….

그걸 흘끗 본 것만으로도 얼굴이 또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암조 애들은 이미 내가 다 말해서 알고 있는데.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그게 양심을 콕콕 찔러서,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다시 호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말소리에 떨림과도 같은 웃음이 배었을 때.

그가 손에서 장갑을 벗겨내더니, 손끝으로 내 관자놀이를 슬며시 눌러내었다. 마치 땀을 닦아내는 듯이….

그 손끝을 타고 온몸이 시원해졌다. 살갗에 배어났던 땀이 싹 마른 느낌이 났다.

“날이 더워 전하께서 쉽게 피로해지실 테고요. 저와 호숫가 한번 못 거닐어주실 정도로 말이지요.”

그리 말한 그의 손끝이 내게서 떨어지더니, 몇 가지 동작을 이뤘다.

햇볕의 훈기가 한껏 줄어들었다.

아….

신성력을 써주었구나.

“이렇게 신성력 잘 쓰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야, 응?”

윽, 갑작스레 레베카의 목소리의 목소리가 떠올라, 나는 속절없이 또 낯이 타오르고 말았다. 미치겠네….

나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그를 향한 고개를 물리지도 못했다.

‘소문 다 난다는데, 왜 이렇게 가까운 거야?’

이어지는 목소리는 수줍은 듯 울렸다.

“게다가 이 모임, 짝을 맞춰야 하는 곳이라던데요.”

그 목소리는 명백한 서운함을 담고 있었다. 내게 연심을 고백한 그의 서운함을….

그가 아쉬움을 토로할 때마다 덧칠된 미안함이 너무도 커, 내 마음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나는 부러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래서 지금 게이블스 영애가 경을 끌고 왔네.”

“그건 다행이지만요. 그러니까, 이런 곳에 오시면서 전하께서 저를 생각하지 못하셨다는 게 아쉽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저를 그렇게도 쓰실 수 있으신데 말이죠.”

아, 또….

그가 이런 식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자꾸만 더 마음을 꽁꽁 숨기게 되었다.

‘내가 사랑을 한 번 더 믿어보는 문제는 차치하고, 올해는 정말 그런 쪽으론 생각할 수 없단 말이야….’

그리고 그사이, 그의 마음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고…. 내가 입술을 깨물려다가 또 멈칫했을 때였다.

“…제가 전하를 연모함이 전하께서 제게 곁을 내어주셔야 한다는 이유가 되지는 않지만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그리 덧붙인 그의 낯은, 나무가 드리운 그늘에 기묘하리만치 어둑하게 빛났다.

스칼렛의 오지랖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진짜 속 얘기 괜히 했지!’

9월의 첫날, 스칼렛의 요청에 따라 연 프리지어궁의 다과회.

귀족파 영애들을 불러놓고 치러진 그 다과회 자리에, 어찌된 것인지 루시페우스가 나타나고야 만 것이었다.

“어머, 보세요.”

“알비누스의 검은 신사님께서.”

“역시 그 소문이….”

다과회가 열리고 있는 프리지어궁 후원의 입구에 그가 나타나자, 귀족파 영애들의 눈동자가 슬며시 내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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