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그 연심의 쓸모 (3)
우선은 게이블스에서 제게 서신을 보낼 리가 없어서였고, 다음으로는 그 서신이… 마치 연서인 양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내용과 발신인의 정체를 알았을 때.
루시페우스는 스칼렛이 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에 감탄했다.
‘퍽 재밌어졌군.’
저처럼 이 여인도 제 작은 빛에 의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음이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는 걸 보니 귀족파 모임은 아닌 듯하고….’
루시페우스는 제 작은 빛에게서 그녀의 스승으로, 그리고 거기서 그 조카인 스칼렛 게이블스에게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떠올렸다.
‘곧 원로원 하반기 의회도 시작하니, 그전에 세력을 다져놓으려는 모양이지. 그리고….’
그 편지에 적힌 짤막한 정보로 이런저런 가늠을 해보던 루시페우스는 제 시선이 어딘가에 붙박여 떨어지지 않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거슬리는 몇 개의 단어.
‘피크닉에, 신사분이라.’
피크닉이라면… 그는 가본 적 없지만, 그 단어는 어딘가 정답고 화목하게 울리는 구석이 있었고.
신사분의 수가 모자라다는 것은, 수를 맞춰야 한다는 것일까.
수를 맞춰야 한다는 것은, 남녀가 짝을 맞추는 모임이라는 뜻인가.
‘본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레이디는 분명 그녀를 이야기하는 건데.’
스칼렛의 수가 너무 빤함에도 그에 여지없이 넘어가고 만 순간, 그에 불쾌해진 스스로를 발견한 순간.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종이와 펜을 꺼내 답신을 썼다.
「친애하는 레이디 스칼렛.
우려스러운 일을 맞닥뜨리셨음에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당일에 찾아뵙고 조언을 드려도 괜찮을지요. 초대장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세실리아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에 비하면야 퍽 날아가듯 그려진 글씨의 나열이었다. 그럼에도 수십 년의 달필인지라 근사한 필체였지만.
잘 보일 필요 없는 이에게 보내는 서신임에도 손끝이 성급하게 떨렸다. 거기 깃든 건 명백한 설렘이리라.
그날부터 루시페우스는 주말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이따금 렌틸 자작저와 힐베르크 후작저에 걸어놓은 결계를 확인하고, 도미닉이 몰래 돌보고 있는 마검사들의 동태를 확인하고, 후작과 도미닉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귀족파 영식들과 어울리고….
그러는 내내, 온갖 생각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번번이 주말의 알제니아 장원을 상상했다.
늦여름의 화사한 햇살 아래, 변장 모자를 쓰지 않아 찬란하게 빛나는 세실리아의 은사를 눈에 담는 상상을.
‘한 번이라도 더 뵈면, 내 쓸모를 보여드릴 기회가 한 번이라도 더 생기는 셈일 테고.’
그렇다면 제 쓸모를 더 긴히 여기실 수도 있고, 저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신뢰해주실 수도 있다.
저도 모르게 제 연심을 입 밖에 내고 말았지만, 루시페우스는 세실리아가 거기에 화답하리라고는 추호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제가 그녀를 돕는 걸 당연하게 여기길 바랐다.
그렇게 곁을 맴돌 수 있길 바랐다.
어차피 세실리아는, 그 다정하신 작은 빛께서는… 남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제게도 다정하셨던 것뿐이니까.
골목길에 쓰러져 있던 아이를, 제 의형에게 폭언을 듣는 아이를 지나치지 못하셨던 그 다정함으로, 저를 동정하시는 것뿐이니까.
알제니아의 별장에서 호숫가까지는 마차로 15분 정도 걸렸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엔 꽤 어색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루시페우스는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매섭게 전방을 주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이따금 슬며시 굴러 내 편을 향할 뿐….
그것은 이따금 내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고, 또 이따금 제 옆에 내가 있다는 감격…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고 말 때면.
‘아, 얼굴 좀….’
내 쪽을 바라보는 입꼬리를 들어 올려 씨익 웃는 그의 낯에, 나는 번번이 심장이 내려앉고 말았다.
‘유해하다, 유해해….’
그리 생각하며, 나는 슬며시 몸을 구석 쪽으로 기대었다.
심장에 해로운 그의 존재에서 최대한 떨어지기 위해.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경이 아까 마법 거는 거 다 봤어.”
“이런. 들켰군요.”
그리 말하며 그는 다시금 미소를 내건 채 앞쪽에 시선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만 좀 웃어….’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그는 손을 움직여 몇 가지 간단한 술식을 펼치는 듯했는데, 그중 하나가 멀미를 방지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평범한 마차 안에서 울퉁불퉁한 오솔길을 견디기가 퍽 어려웠으리라.
‘스칼렛이 소발에 쥐 잡았지….’
마차 안에 몸을 깊이 묻으니 그의 시선에 내가 걸리지 않을 거였다. 나는 마음껏 그의 옆모습을 뒤에서 흘끗대었다.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지만 여전히 볕이 뜨거웠다. 한데 그는 오늘도 손목까지 셔츠를 꼭꼭 채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하고 부딪히면 안 되니까 옷으로 싸매고 다녔던 거구나….’
늘 끼고 다니는 장갑도 아마, 그런 맥락일 테지.
그 사정이 또 안타까워지고 말았다.
물론 그야 신성력도 많고 마력도 많으니 알아서 시원하게 하고 다닐 것이겠으나….
“안 더워?”
생각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내 말소리에 루시페우스가 고삐를 늦추며 이편을 돌아다보았다.
“긴팔이잖아. 더워 보여서.”
“네, 저야…. 익숙합니다.”
그는 짧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익숙이야 하겠지. 평생을 저렇게 긴팔만 입고 다녔다면야….
그런 사정도, 그의 능력이라면 괜찮을 거라는 판단도 들었지만… 내겐 까닭 모를 충동이 들고 말았다.
‘지금 선선하니 바람 스치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데.’
볕이 뜨거워도 숲속이라 바람 끝이 청량했고, 마차가 쾌속이라 스치는 바람은 시원하기까지 했다.
‘나랑은 부딪히게 돼도 괜찮은 거 아닌가?’
그게 오지랖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는 불쑥 그에게 손을 내밀고 말았다.
소매를 걷어붙여 주고자 그 소맷부리의 단추를 풀었을 때였다. 고삐를 쥐고 있던 그의 팔뚝이 긴장으로 한껏 단단해진 순간.
“아, 그….”
그는 당황하여, 숫제 내 손을 피하듯 팔을 들어 올렸다. 마법을 걸었는지 고삐를 허공에 고정해둔 채였다.
손안에서 그의 팔이 빠져나가 내 손이 조금 무안해졌다.
“아니, 더워 보여서…. 나랑 있을 땐 괜찮잖아…?”
민망한 마음에 주절대며 그의 낯을 올려다보니….
‘어, 어라.’
잔뜩 굳은 그의 낯을 나는 뭐라고 해석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듯도 하고, 무언가를 참는 듯도 하고….
다만 그의 귀 끝이 새빨개진 것만은 확실했다.
“아, 아냐? 레베카 언니가 나는 경과 닿아도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 나는 잠깐의 접촉에서 그의 체온이 조금 높다는 느낌밖에 못 받았던 것이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소매 단추를 다시 꼼꼼히 채우기 시작했다.
‘뭐야….’
그게 적잖이 서운하게 느껴질 무렵이었다.
“그, 좀 간지러워서….”
기어들어 가듯 말하는 그는 내 쪽으로는 시선도 던지지 못했다. 그의 빨개진 귀는 본연의 색을 되찾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거 혹시.’
내가 어쩌다 보니 과감한 짓을 한 셈인가…?
의도한 건 아닌데…. 깨닫고 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 그냥, 더워 보여서….”
“전하께서 틀리실 리가 있나요.”
그는 난처한 듯 미소 지어 보이고는, 다시 고삐를 쥐었다.
나는 오지랖을 잘못 부렸다는 창피함 반, 그가 결국 내 도움을 거절하고 말았다는 서운함 반의 마음이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다가닥다가닥, 말발굽 소리만 울릴 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뒤, 루시페우스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의 변명처럼 조금 빠른 말소리였다.
“정말로 이쯤은 익숙하고요. 그리고… 전하께서 절 신경 써주시는 건….”
천천히 말을 잇던 그는 어디선가 말을 꾹 멈췄다. 말뭉치를 눌러 내리는 듯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이윽고 뱉은 말은 많은 것을 생략한 것처럼 울렸다.
“…제게 굳이 뭘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방을 주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금 내 편을 스쳤다. 그 입매엔 여전히 아픈 듯한 미소가 걸려 있어, 나는 가슴이 크게 욱신대고 말았다.
‘어디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그 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던 그의 모습이 겹쳐져, 나는 작게 심장이 내려앉고 말았다.
그의 체온이 그때처럼 뜨거워지지는 않았으니 안심할 수 있었지만….
서운함과 걱정을 숨긴 채, 내가 간신히 건넨 말은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그 마검사들, 아직 제대로 입을 열진 않았지만 일단 말귀를 알아먹는 기색이라 회유해 보려고 해. 그 마법, 이제 풀어도 괜찮을 것 같아.”
루시페우스가 그들을 체포할 때 온몸의 관절을 묶은 마법을, 그들이 반항할 경우를 대비해 아직 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말한 나는, 더 이상 대화할 생각 없다는 양 그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뭇하리만치 깊은 숲의 신록이 시야를 스쳤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한참 뒤에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개운한 듯이 들렸다.
피크닉의 분위기는 퍽 자유로웠다.
호숫가에 다과상이 차려져 있기야 했지만, 다들 한데 모여 어울리는 형식은 아니었다.
손님들은 저마다 파트너와 함께, 또는 가까운 지인과 삼삼오오 어울려 오솔길을 거닐기도 하고, 근처의 가제보에서 카드놀이를 하기도 하고, 호숫가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영애, 자꾸 이러면 재미없어?”
“아이, 왜요?”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찾아가 하는 말에, 스칼렛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을 달려 먼저 도착한 그녀에게선 시원한 활기가 풍겼다.
“영애 지인들 달래주러 오랬으면서, 상황이 영 다르잖아?”
“어머, 제가 그랬나요? 오늘은 전하께서 발굴하신 장기 말이 이렇게 유능하다고 뽐내려고 모신 건데요.”
그리 말하며 스칼렛은 호숫가에 도착해 있는 손님들을 눈짓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남녀들의 표정이 모두 밝았다.
그리고 스칼렛은 적당한 틈을 봐서, 마치 선거 유세하듯 돌아다니며 그들과 친분을 쌓겠지.
‘좋은 계획이야. 계획은 좋은데.’
왜 거기에 나와 루시페우스를…. 내가 울컥하는 마음에 눈동자를 홱 돌려 그녀를 노려볼 때였다.
“영애들이 뿔났다는 건 사실이에요. 조만간 프리지어궁 다과회 한 번만 열어주세요.”
그리 말하며 스칼렛이 생글생글 웃었다.
“날 두 번이나 써먹겠다고?”
“제가 차린 자리에 전하께서 오시는 것보다야, 전하께서 그들을 다독이고자 직접 자리를 만드시는 게 훨씬 의미 있지 않겠어요?”
“…….”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가을의 첫 다과회에 저를 위시한 귀족파 영애들을 초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까지 계산을 마친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능청에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아 불만스러운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너무 노여워 마시고요. 날도 좋고 경치도 좋은데, 전하 얼굴만 안 좋잖아요.”
스칼렛은 애교 있는 목소리를 내며 내 팔짱을 끼고서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래. 볕도 좋고. 바람도 좋고. 다들 흩어져 있어서 대화하느라 진 빼지 않아도 좋고. 다 좋은데….’
스칼렛이 안내한 호숫가 나무 그늘의 다과상에는 릴리안 알제니아와.
“루시페우스 경께서는 이런 모임엔 처음이시지요?”
루시페우스만이 앉아 있었다.
나를 놀리고 싶은데 릴리안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스칼렛이, 일부러 그에게 말을 걸었음이 확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