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 연심의 쓸모 (2)
“그는 평생 저를 좋아해 왔지만 그 마음은 죄책감으로 시작해서 고마움, 충심 같은 게 섞였다가, 이제는 연정이 되었죠. 저 또한 처음에는 우애, 의지하는 마음, 유일하게 남은 내 편이라는 애착, 그리고 이제는 애정까지….”
그리 읊조리며 그 갈색 머리의 기사를 떠올리는지, 스칼렛의 낯이 퍽 따뜻해졌다.
“그 구체적인 모양이야 계속 변하는 게 당연하죠. 두 사람 사이의 서사가 쌓이기 나름이니까. 근데.”
스칼렛이 부채를 탁, 접었다.
“그게 배신으로 가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어쨌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도 금슬이 좋으셔서 그 늦은 나이에 전하를 보셨고.”
스칼렛은 농담처럼 내 부모님의 이야기를 덧붙였지만, 나는 거기에 실소조차 머금을 수 없었다.
마음을 배신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내게 그리도 자주 일어난….
흔한 일인데….
‘이 세계는 조금 다른 걸까…?’
이 세계에서라면 나도, 마음껏 마음을 내줘도 보답받을 수 있는 걸까?
왜 그녀의 말을 믿고 싶어지는 걸까.
나는 그것이 불만스러워, 눈에 힘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럴 때면 그가 단단한 손끝으로 문질러 주던 것이 자연스레 생각나… 울고 싶어졌다.
“뭐, 그게 아니라면 그때 가서 죽여도 나쁘지 않고요.”
“…응?”
“평생을 저한테 건다고 해놓고 생이 끝나기도 전에 마음이 변한다면. 약속 지키게 도와줘야 그게 의리 아니겠어요?”
“…영애,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그 말에 스칼렛이 부채를 다시 펴 살랑대며 웃었다.
“제가 이리 무서워서 그가 감히 변심이나 하겠어요?”
말은 그리해도, 내 표정이 심상치 않으니 기분을 풀어주고자 한 농담일 거였다. 내 입가에 헛웃음이 어리자, 스칼렛은 안심한 듯 부채를 탁 접었다.
“이 얘기는 이제 전하께서 곱씹어보실 일이고. 도움이 됐다면, 전하의 영리한 장기 말한테 시간 좀 내주세요.”
“시간?”
“마지막 주에 레이디 릴리안과 알제니아의 장원에서 피크닉을 열고자 해요.”
“마지막 주라면….”
“네, 원로원 휴회 기간 마지막 주죠.”
스칼렛이 생긋 웃었다.
“지난번에 사냥 대회 오셔놓고 제 연적 되시는 레이디만 챙기셔서 다들 서운해하고 있는데. 기분 풀어주러 한번 오셔야 하지 않으시겠어요?”
9월이 되면 황성 사교계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거였다.
태양제 이후 여름휴가 갔던 귀족들이 황성으로 돌아와, 원로원의 하반기 의회와 함께 사교계의 가을 시즌이 시작되니까.
그리고 휴가를 가지 않았거나 휴가에서 일찍 돌아온 젊은이들끼리 시간을 보내자며 꾸린 스칼렛의 피크닉은… 다분히 정치적인 수.
‘휴회 마지막 주에 잡았다고 했을 때 이미 알아봤지만.’
알제니아 장원의 별장에 들어섰을 때. 일전의 가든파티 때와는 달리 목가적인 분위기로 꾸려진 정원에 모인 이들의 낯을 살피며… 나는 꽤 아연해졌다.
‘저 빨간 머리는 황성 주간지 발행인인 리히트 백작의 딸이고. 저 애는… 맞아. 중도파인 메디카 자작의 딸. 저기 모여 있는 영식들은… 원로원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무당파(無黨派)나 귀족파 중에서도 급진파나 중도파에 가까운 이들….’
역시, 사교계 일인자가 공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귀족파 영애들 달래라고 불러놓고선.’
그날 내게 다가오지 못해 안달복달하던 스칼렛의 추종자들은 이 자리에 하나도 없었다.
게이블스 후작에게 의심을 안 사게끔 한가한 피크닉 모임으로 위장했으면서도, 곧 시작될 후계 싸움에서 제게 득이 될 집안 자제들만 초대해놓은 거였다.
‘처음부터 스칼렛을 후계자로 키웠으면 이런 무의미한 에너지 낭비도 안 하고, 얼마나 좋아.’
나는 다시금 게이블스 후작의 한심한 낯짝을 떠올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 그럼. 전하께서도 오셨으니, 슬슬 호수 쪽으로 이동해 볼까요?”
스칼렛의 말소리에 정원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젊은이들이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모임이 나와 독대하는 자리가 아니어서인지, 스칼렛은 퍽 자연스럽게 차려입은 채였다. 그렇다 해도 스칼렛은 스칼렛이니 꽤 화려하기야 했지만….
직접 말을 타고 이동하려는지 언뜻 치마로 보일 만큼 폭 넓은 바지를 입은 게 인상적이었다.
“호숫가까지 승마를 즐기실 레이디들은 이쪽으로, 마차를 타고 이동하실 레이디들은 이쪽으로. 신사분들께서 말이나 마차를 대신 몰아주시기 위해 가 계시니 마음껏 움직이세요.”
가든파티 때도 그랬듯, 릴리안 알제니아가 아닌 스칼렛이 행사의 주관인 행세를 하는 게 퍽 익숙해 보였다.
‘리피샤 쿠첼 같은 애들이 보면 슬프겠지만…. 스칼렛이 귀족파 영애들 중에 가장 신뢰하는 건 릴리안 알제니아인가.’
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니 게이블스의 눈을 피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믿고 빌린 게 알제니아의 별장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알제니아 후작은 귀족파 내에서 중도에 가깝기도 하고….’
승마복을 입고 온 몇몇 영애들이 직접 말을 타러 가고, 신사들이 모는 말이나 마차를 타려는 영애들이 저마다 목적한 곳으로 이동하는 걸 바라보며 내가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영애들이 자리를 잡는 걸 지켜보던 스칼렛이 내게 다가왔다.
“전하께서는 마차로 움직이셔야죠?”
“아무래도 그렇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승마 또한 낙상의 위험이 있어 배운 적이 없으니까.
호숫가까지 가려면 좁은 오솔길을 따라 움직여야 하는지라 육중한 세실리아 전용 특제 황실 마차를 타고 움직일 순 없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스칼렛이 배정해줄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어쩌죠, 짝이 안 맞아서요.”
“짝?”
“뭐, 사교 모임의 기본적인 기능에는 이성과의 만남도 있으니까요.
“괜찮아. 나야 뭐, 기사들도 있고.”
그리 말하며 내 곁에서 양산을 받쳐 들고 있는 데릭을 턱짓하는데.
“기사님께서 2인용 마차도 모실 줄…. 아시던가요?”
스칼렛이 그리 느릿하게 말하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명백히 데릭이었다.
뭐지? 데릭에게 수작인가?
데릭의 낯을 올려다보니… 스칼렛과 바쁘게 시선을 교환하는지, 눈동자가 한껏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뭐야?
“아, 마차를 모는 것보다… 말을 타고 따르는 게 전하를 호위하는 데 훨씬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죠?”
스칼렛이 다시금 생긋 웃었다.
“사람 없다며? 나 혼자 타라고?”
“어머. 전하께서 직접 고삐를 쥐셔서 그 섬섬옥수에 굳은살이라도 박였다가는 역모로 몰릴 텐데요. 어디 보자아…. 어떡하지?”
“무슨 수작이야?”
“수작은요? 제가 가장 아끼는 기사를 내어드리고 싶지만 그가 전하께 좋은 말벗이 되진 못할 것 같고….”
네 애인 안 내줄 거 뻔히 알거든? 나는 눈매를 좁히며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아아, 맞아. 그분이 계셨지….”
스칼렛의 눈썹이 느릿하게 들썩였다.
“마침 다른 일로 이곳을 방문하신 신사님이 한 분 계신데, 한번 여쭤봐야겠네요. 먼저 마차에 가 계시겠어요?”
스칼렛이 눈을 가늘게 휘며 나를 마차 쪽으로 안내했다.
뭐지, 불안한데….
나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순순히 마차에 올랐다.
말 한 필이 이끄는 2인용 마차인지라, 남녀가 밀회하기에 퍽 알맞은 크기였다.
‘알제니아 정원의 가든파티가 워낙에 그런 쪽으로 유명하니, 손님들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왔을 거라 이런 기획을 한 거겠지….’
그리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남녀 둘씩 짝을 지어 저마다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애들이 탄 말의 고삐를 영식들이 쥐거나, 마차의 마부석에 영식들이 올라앉거나….
‘게이블스 후작이야 그냥, 스칼렛이 별 영양가 없는 사교 파티 열었겠구나 하고 넘어갈 테고.’
나야 적당히 자리 지키러 온 거니, 그냥 데릭하고 다니면 되는데. 도대체 누굴 데려오려고 그러나….
나는 부러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머릿속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누군가와 파트너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속절없이 생각나고 마는 얼굴이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짜잔. 모셔왔어요. 오늘 전하의 파트너가 돼주실 신사님.”
스칼렛의 장난스러운 말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내게 드리운 그림자만으로도 그녀가 데려온 신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제가 모셔도 될까요, 레이디 작은 별?”
그 나직한 목소리에 심장이 툭 떨어졌다.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니, 마차 앞에 루시페우스가 서 있었다.
“이렇게 또 뵙는군요. 달의 신의 축복입니다.”
“…경이 이런 덴 어쩐 일로.”
“아버님의 심부름을 왔던 차입니다.”
“경이? 여기에? 심부름?”
알제니아는 귀족파의 뒷공작에 딱히 끼어드는 것도 아닌데, 심부름을 와도 후작도 없는 별장으로?
“예, 뭐…. 저희 아버지께서 벌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시니까요.”
누가 봐도 이치에 안 닿는 소리였지만, 정작 루시페우스는 천연덕스러웠다.
아닌 척해도 신은 것이 구두가 아니라 발목이 올라오는 부츠에, 조끼 안에 받쳐 입은 셔츠도 보통 입는 것과 재질이 다른 것이, 한눈에 봐도 야외 활동을 위한 옷차림….
“저야 뭐, 잔심부름이나 하는 막둥이 아니겠습니까.”
허, 참 나…. 황당한 낯으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안 될까요?”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작게 갸우뚱했다.
안경 너머 그의 눈매가 퍽 온화하게 휘어지고, 그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깃들었다.
얘, 얘는 자꾸, 얼굴 쓰고….
그것이 그의 근사한 미소에 번번이 넘어가고 있는 내 해석인 것도 모르고, 나는 늘 그렇듯 그를 탓했다.
“그래서. 우연히 왔는데 게이블스 영애의 피크닉 날이었고, 또 마침 우연히 내 파트너가 자리가 비어서 시간을 내게 되었다?”
“네, 레이디 스칼렛께서 부득불 청하시기에.”
“그럼요. 제가 조르느라 공을 많이 들였죠. 알비누스 후작께서 피크닉이 열릴 줄 알고 심부름을 보내셨겠어요? 멀리까지 오셨는데 피크닉까지 참가해 달라니, 어휴. 이 스칼렛 게이블스, 살면서 이리도 무례히 군 적이란 없었답니다.”
그리 능청스레 말하며 스칼렛이 루시페우스를 향해 눈웃음을 살살 치는 것이었다.
‘얘가 진짜…!’
그를 몰래 섭외해 놓고서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게 빤했다.
나는 대놓고 할 말이 없어 눈빛으로만 윽박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영애, 자꾸 이러면 재미없어?
“어머, 전하. 저한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요. 이따 봬요?”
그리 말한 스칼렛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제 말이 있는 쪽으로 쏠랑 가버렸다.
‘그때 괜히 말했지…!’
뭔가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같아서 속내를 털어놓았더니…. 역시 루시페우스와 엮어서 나를 놀리는 데 맛 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차마 티 내지 못하고 꾹 쥔 주먹만 바들바들 떨 무렵.
“그럼, 출발할까요.”
어느새 내 옆자리에 들어앉은 루시페우스가 말의 고삐를 당겼다.
아니, 나야 기사들이 있는데…!
그리 생각하며 허둥지둥 주변을 살피니, 이 상황을 예상한 듯 데릭과 린지는 딴청을 부리며 말을 타고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루시페우스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짐작하고 있던 양 퍽 태연한 기색이었다.
‘누가 원작 흑막이랑 원작 악녀 아니랄까 봐…!’
죽이 잘 맞네, 어?
「친애하는 루시페우스 경께.
저희가 인사말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니 본론만 말씀드려도 실례가 아니겠지요?
다음 주말에 알제니아의 장원에서 작은 사교 모임을 꾸렸습니다. 한데 휴가철의 끄트머리여서인지 참석하신다는 신사분의 수가 모자라네요. 제가 따르는 레이디께서 내방하실 예정인데, 이래서야 피크닉의 구색이 본대륙에서 가장 고귀하신 그분의 안목에 차지 않을까 걱정이 많답니다. 혹 경께 조언을 구해도 실례가 안 될는지요.
경과 언제든 말이 잘 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스칼렛 게이블스.」
며칠 전, 게이블스의 전령이 서신을 보내왔을 때. 루시페우스는 제가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