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그 연심의 쓸모 (1)
“제국의 작은 별을 뵈옵니다. 황성 사교계에서 이름 마를 날 없는 우리 전하.”
온실에 나타난 스칼렛은 굉장히 과장된 몸짓으로 내게 예를 갖췄다.
세르니타 사냥 대회 이후로 처음 만나는 자리. 그녀의 장난스러운 몸짓과 의뭉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영애도, 그간 별러 온 게 있는 거야?”
“저도라니요?”
“레오도 요즘 작정한 듯이 날 놀리더라고.”
“어머, 역시 제가 연모하는 분답게 의외의 눈치가 있으셨네요.”
그리 말하면서 눈웃음 살살.
얘가, 진짜.
나는 그녀에게 눈을 흘기며 자리를 권했다.
스칼렛과 나의 첫 인연이 되어주었던 달마르사의 찻잎을 차갑게 우린 차가 8월의 무더위를 식혀주었다.
“갑자기 황성으로 올라가셔서 다들 얼마나 놀랐게요. 기사님들이 저택 다 부수고서 가셨으니, 거기 휘말리셔서 다치셨나 하는 이야기도 있고.”
“내가 은사를 졌는데, 누가 감히 그런 망상을 해?”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 얼굴도 안 보여주시고 가셨으니 걱정한 거죠.”
다친 거야 맞았지만…. 나는 표정을 숨기며 차를 홀짝였다.
“아마 루시페우스 경도 전하와 같이 올라온 모양이지요?”
“켈록.”
“어머. 정곡을 찔러버렸네. 제가 좀 무엄해요, 그렇죠?”
그리 너스레 떨며, 스칼렛은 제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얘, 얘는 아까부터…!
나는 그녀에게 밉살스레 눈을 흘기며 그녀의 손수건으로 입가며 손을 닦았다.
렌틸 자작이 사교계에 등장한 이후로 스칼렛은 더 이상 내 앞에서 제 본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나를 믿지 않는다는 식으로 굴었던 마지막 거리감은, 혹시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였음이 확실했다.
지금까지 이런 본성을 어찌 숨겼나 몰라.
“그러면 알비누스는 동생이 형을 이긴 셈인가아.”
“뭐?”
“한쪽은 내내 거절만 당했는데, 다른 한쪽은 여러모로 전하와 시간을 보내잖아요?”
“…….”
나는 못 들은 척하며 냉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아무리 속내를 드러낼 정도로 편해졌다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능글맞아질 일인가?
“사냥 대회 내내 루시페우스의 경의 시선이 아주 이글이글하던데.”
“통성명은 또 언제 했는데?”
지금껏 그를 두고서 이름을 부르는 이는 하나도 없었는데.
그건 기실 지난 태양절 연회 때 둘이 친근하게 굴 때부터 궁금했던 내용이었다.
“어머어, 질투신가?”
“영애.”
스칼렛의 장난스러운 말소리에 나는 정색했다.
그녀가 이토록 친근하게 구는 게 오랜 우정의 결과니 기껍기야 하면서도… 그 방향이 하필이면, 내가 외면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것이어서.
내 낯을 살피던 스칼렛은 장난기를 지우고 순순히 대꾸했다.
“전하와 어떤 사이가 될지 모르는 분이니 잘 보이려고 통성명해 뒀죠.”
“…기가 막혀서.”
“왜요, 황궁에 남으실 거라서요?”
내가 툴툴대자 스칼렛이 어르듯이 말했다.
“알면서 왜 물어?”
“이상하네요. 전하께서는….”
스칼렛이 상체를 이편으로 기울이며 은근한 목소리를 내었다.
“사랑을 믿지 않으세요?”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믿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렇게 답하자면 그 연유에 대해 물을 것이고, 그러자면 세실리아로 살면서 애써 묻어둔 전생을 떠올려야 하는데….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유리잔만 만지작거렸다.
“정말로 루시페우스 경이 레이디 아멜리를 연모한다고 생각하세요?”
“그거야….”
“그가 스스로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질투한다고 말했다고도 하셨지만요.”
스칼렛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하, 하지만요. 이따금 백 마디 말보다 눈빛 하나가 더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
“말은 결국 말뿐인걸요. 말이 진실만을 담는다면 거짓말이란 개념은 왜 있겠어요?”
절 보세요, 스칼렛이 생긋 웃었다. 사교계에서 선보이는 그 그린 듯한 미소가 아니라, 어딘가 장난꾸러기 같은 구석이 있는 미소였다.
눈빛이라…. 내가 아는 그의 눈빛이라면.
“그리고 그건, 상대는 속여도 오히려 다른 사람은 못 속여요. 그렇잖다면 전하와 루시페우스 경에 대해 왜 소문이 그렇게도 나겠어요?”
“소문이? 그거야 영애가 다과회 때….”
“그땐 장난이었죠. 한데 사냥 대회에서 그를 잠시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가 전하를 연모한다는 걸 모를 수가 없을걸요?”
“…….”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유리잔의 테두리만 덧그렸다.
세르니타에서 내내 그의 시선이 내게 붙박여 있었던 걸, 나는 알았다.
내가 그 정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가 개회사를 읊던 때, 레오폴트와 내 기사들과 조카들에게 무운을 빌던 때, 그리고 유스티안의 일로 좌절해 있을 때까지….
그가 나와의 관계를 끊어내려는 듯 더는 내게 연락해오지 않음에도, 여전히 내게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는 것을.
어찌 모를 수 있었을까.
‘그가 나와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것 같아서 모른 척했지만.’
게다가….
“평생을 통틀어 제가 연모해온 이는 레이디 작은 별, 당신뿐입니다.”
그가 직접 그리 말하기까지 했는데.
그때를 떠올리니 또, 심장이 저릿했다.
“그처럼 그가 열렬한데 전하께서 모르실 리도 없고. 귀족파라서 멀리한다기엔, 황태자 전하께선 오히려 탕평책이라며 좋아하실 테고. 그가 후작의 친아들이 아니라서…. 그건 전하의 평소 인선과 너무 다른 선택 아닌가요?”
스칼렛의 말엔 조금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러면 거기 남은 건, 전하의 마음뿐인데. 혹시 그에게 마음이 없으세요?”
“그게….”
“전하. 눈빛은 못 속여요. 전하께서 억지로 루시페우스 경 있는 쪽은 쳐다도 안 보시는 것, 저는 다 봤다고요.”
스칼렛의 검지가 제 눈가에서 까딱거렸다. 예법에 맞지 않는 그 친근한 손동작에는 나에 대한 친근함과 애정이 담뿍 깃들어 있었다.
“거기에 답은 딱 하나. 전하께선 그런 관계를 애초에 원하지 않으신다. 전하께서 평생 황실에 눌어붙어 사신다고 노래하셨던 걸 생각하면 말이죠.”
“…내 장기 말이 생각 이상으로 더 영리했네.”
“전하께서 안목이 좀 좋으셨어야죠?”
스칼렛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오늘도 게이블스 후작이 만족하리만치 화려하게 꾸민 차림새 중에 그 미소가 가장 생동감이 넘쳤다.
계속 모른 체할 수도 없어서, 나는 내 속내를 털어놓는 편을 택했다.
그녀는 내 수하가 아니었고, 그러니 내 태도가 달라진 걸 대놓고 보여도 상황에 큰 영향이 없겠으며, 어쨌든… 여성 지인 중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이 아니던가.
‘암조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언니들하고 말하겠어, 시녀들하고 말하겠어?’
나는 입 안에서 이런저런 말을 고르다가, 간신히 첫마디를 뱉었다.
“난 영원하지 않을 것에는 관심이 없어.”
“역시나….”
나는 여전히 유리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스칼렛이 눈매를 휘어 웃음을 알 수 있었다.
“한순간 불타오를 수는 있어.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굴고, 그 사람을 위해서 돈이나 시간이나 두 가지 모두를 다 투자하고. 한 번쯤 그럴 수는 있어.”
그 말은 결국, 지금은 다 묻어두었던 내 전생의 상처를 파헤치는 말이었다.
정확한 사건들은 잊힌 지 오래였지만, 그때의 설렘과 실망감들은 여전히 내 심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어서 이따금 명치께를 욱신거리게 했다.
“보기에 예뻐서, 좋아할 수 있지. 마음씨가 선해서, 목소리가 예뻐서, 그러다 보니 눈길이 가서 좋아할 수 있어. 첫눈에 반하는 거? 그래, 그럴 수 있어. 다 믿어.”
내내 유리잔의 테두리에만 눈동자를 고정한 채 주절대던 나는, 스칼렛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퍽 심각한 낯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아?”
“…….”
“1년? 10년? 갈 수 있지. 하지만 사랑은 언젠가 변해.”
“전하.”
“하지만 내가 아수라마수라의 4황녀 세실리아 에슈바이크 알 아마리우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아버지의 총애도, 내가 황태자 전하의 치세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맡으리라는 사실도 마찬가지야.”
“…….”
“그리고 영애가 게이블스의 가주로서 쥐게 될 권력, 그것도 변하지 않는 거야. 영애의 진짜 목적이 게이블스를 잇는 것이 아니라 그 기사와의 미래였다면, 난 절대로 돕지 않았을 테고.”
스칼렛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처음으로 간신히 털어놓는 이야기를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가는 내 낯을, 그저 가만히 들여다볼 따름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 무렵이었다.
“그럼,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연애는 왜 밀어주시는 건데요?”
그 영애의 뒷배가 되어 주시면서까지…? 스칼렛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건….”
…그거야말로 더더욱 답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런 운명을 타고났고, 남주인공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걸….’
내가 답을 피하는 이유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스칼렛은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듯 말을 이었다.
“뭐, 그게 일종의 호의일 수도 있고, 아우렌바흐 소공작이 어쨌든 전하께는 타인이어서 그럴 수도 있죠.”
“아냐, 레오는….”
“그의 사랑이 변하건 말건, 그 영애도 힐베르크 후작이 될 테니 전하의 계산에 따르면 큰 문제 없을 거고요.”
어깨를 으쓱인 스칼렛은, 그들의 관계 따위 논외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헥터가… 아, 제 호위 기사요.”
음, 이걸 말해도 되나…. 조금 주저하는 기색이던 스칼렛은 가볍게 말을 뱉었다.
“그는 제가 열 살 때 제게 평생을 바쳤어요.”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10년 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제 연인에 관한 거였다.
사실, 나는 남의 연애 감정이 어떻게 되는지는 큰 관심 없는데.
그저 내게 다가왔던 모든 마음이 그러했듯, 내게 오려는 마음이 다시 변할 게 두려운 것뿐인데.
‘변하지 않는 사랑, 그런 건 남에게만 일어나는 행운이니까….’
내 방어적인 마음을 내색하듯 유리잔을 쥔 손이 곱아들었다.
“그건 영애가….”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잖아.
거기까지 말한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외모로 연심의 유효 기간이 결정된다면, 세실리아 또한 오래오래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내가 받는 넘치는 사랑이 세실리아의 인형 같은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지금도, 아주 영향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문제였다.
세실리아가 받는 사랑은 정말 ‘나’를 향한 사랑인가? 연심을 고백한 그의 마음은 어디를 향한 걸까?
나는, 그의 마음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내가 입술을 꾸욱 깨물었을 때였다.
“시작은 말이죠.”
돌연 스칼렛이 제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과감한 행동에 내가 놀란 것도 잠시. 그녀의 허벅지에는 깊은 흉터가 있었다. 길게 갈라진 세 개의 흔적은 분명한 발톱 자국이었다.
“그의 시작은 죄책감이었어요. 유모의 아들인 그를 데리고 숲에 놀러 나갔다가 마수한테 당했죠. 그때 그도 고작 열하나. 그가 저를 못 지킨 게 당연하지 않나요?”
상흔이 깊었다. 스칼렛이 자라면서 옅어진 게 이 정도라면, 그 당시에는 더욱 심했을 거였다. 언뜻 보기에도 거기를 할퀸 앞발의 크기가 아기 머리통만 할 듯했다.
“그날 이후로 헥터는 저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우습죠, 그 꼬맹이가.”
그걸 추억하는 스칼렛의 눈빛이 자못 따뜻했다.
“다음엔 고마움이었어요. 그의 어머니, 제 유모가 모르탈레아 병에 걸려서 약값이 급했는데…. 아시다시피, 게이블스 후작님께선 돈을 참 합리적으로 쓰시잖아요?”
스칼렛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아부하는 데는 펑펑 쓰면서 사용인들에겐 인색하다는 소리였다.
“유모는 저에게도 어머니 같은 존재였으니까, 저도 마음이 급했죠. 그때는 저도 열다섯이라 사재는 없었지만, 비싼 드레스며 장신구야 많았으니 그걸 좀 팔아서 약값을 구했을 뿐인데.”
“그래서 유모는?”
스칼렛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약을 못 구했더라면 더 빨리, 헥터가 기사로 서임받는 것도 못 보고 죽을 뻔했으니까요.”
“…다행이네.”
잠시간 분위기가 침울해졌을 때였다.
“요는 말이죠. 사랑이 변하는 건 당연하다는 거예요.”